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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표 전쟁

5화 반영비라는 무기

건우의 연구소는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화이트보드 세 개가 벽을 차지하고 있었고, 직원 두 명이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정시 지원 시즌의 한복판. 학부모들의 문의가 쏟아지는 시기.

건우는 그 소음 속에서 화이트보드에 마커를 휘갈기고 있었다. 빨간색. 새 이름.

-강민재 / 표준 408 / 국131 수140 탐137 / 서울 의대 희망-

밑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수학 강점. 국어 약점. 반영비 게임.-

마커 뚜껑을 물었다. 민재의 성적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408. 서울 의대 커트 410에서 415. 2점 부족. 정면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건우가 보는 것은 숫자만이 아니었다.

어제 민재가 찾아왔다. 키가 크고, 눈이 반짝이는 청년. 성적표를 건네고 나서 건우가 접어두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성적표 안 보세요?"

"봤어. 408, 수학 강하고 국어 약해."

"그걸 한 번 보고—"

"20년이면 그 정도는 돼." 건우가 의자를 끌어 민재 앞에 앉았다. 화이트보드가 아니라 민재를 봤다. "근데 성적 말고. 너 서울에 왜 남고 싶어?"

민재의 귀가 빨개졌다.

"그냥… 서울이 편해서요."

"그냥?"

"네."

건우가 웃었다. 크게.

"야, 재수까지 해놓고 '그냥'이야? 서울 살면 뭐가 좋아? 학원? 문화생활? 아니면—"

민재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여자친구?"

정적. 민재의 입술이 굳었다.

"맞지?"

"…네. 여자친구가 서울이에요."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이해의 끄덕임.

"그런 이유면 충분해."

"충분해요? 여자친구 때문에 대학을 정하는 게?"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지가 중요한 거야. 네가 서울에 남겠다는 의지가 확실하면, 거기에 맞춰서 전략을 짜는 게 내 일이지."

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곱씹는 얼굴이었다.

건우는 화이트보드를 돌아보며 마커를 들었다.

"자, 보자. 408. 서울 의대 직행은 빡빡해. 한시율이면 뭐라고 했을까. 반영비 최적화? 한양대?"

민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아세요?"

"뻔하니까." 건우가 웃었다. "한양대 반영비가 국어 20%에 수학 40, 탐구 40이거든. 네 수학 140이면 환산에서 유리해. 한시율 정도면 당연히 그걸 잡지."

화이트보드에 한양대를 적고, 옆에 '시율안'이라고 표시했다.

"근데."

마커가 멈췄다.

"한양대 직행은 마진이 좁아. 환산 커트 0.5점 차이? 그건 줄타기야."

"그러면 선생님은?"

건우가 보드에 새 줄을 썼다.

가군 — 충북대 의대. 안전. 표준점수 커트 403. 민재의 408이면 넉넉하다. 나군 — 경희대 의대. 상향. 표준점수 커트 410. 2점 부족하지만 추합 가능성.

"가군에서 충북대를 확보해. 여기는 너 점수면 합격이야. 안전판."

"충북대는 지방인데요."

"들어. 가군에서 안전하게 잡고, 나군에서 경희대를 노려. 경희대 의대 커트 표준 410. 너는 408이니까 2점 부족해. 정시 최초합은 어려워."

"그러면 왜—"

"추합." 건우의 눈이 빛났다. "경희대 의대는 매년 추합이 깊어. 3~4바퀴 돈다. 올해 수능이 어려웠으니까 상위권이 흔들려. 불안한 애들이 안정 지원으로 내려가면 위가 비어. 추합 2~3차면 커트가 406에서 407까지 내려올 수 있어."

"올 수 있다는 거지, 온다는 건 아니잖아요."

"맞아. 보장은 못 해." 건우가 마커를 내려놓았다. "근데 가군에서 충북대가 잡혀 있잖아. 경희대 추합이 안 오면 충북대 가면 돼. 잃을 게 없어."

민재가 두 전략을 비교했다.

시율의 전략: 한양대 의대 직행. 반영비 최적화. 서울 확보. 하지만 마진 0.5점.

건우의 전략: 충북대 안전 확보에 경희대 추합. 서울 가능성은 추합에 달림.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의대 합격은 보장.

"두 개 다 일리가 있는데…"

"당연하지. 한시율은 바보가 아니야."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점은 하나야. 나는 안전판을 깐다. 쟤는 최적해를 노린다. 뭘 고르느냐는 너한테 달렸어."

민재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선생님."

"응."

"한시율 선생님도 저한테 물었어요. 왜 서울에 가고 싶냐고."

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침묵.

"그래? 그 인간이?" 건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좀 변했네."


같은 날 오후. 건우의 연구소.

윤서연이 상담을 하러 왔다.

스물한 살. 재수생.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안경 너머로 피곤한 눈을 하고 있었다. 노트를 안고 들어왔다. 노트에는 본인이 직접 정리한 대학별 입결 데이터가 빼곡했다.

"서연아, 앉아."

건우가 물을 한 잔 건넸다. 서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앉았다.

"성적 먼저 볼게."

서연의 성적표. 국어 130(백분위 94). 수학 133(백분위 95). 영어 1등급. 과탐 — 생명과학 67, 화학 65, 합산 표준점수 132(백분위 평균 94).

표준점수 합산: 130 + 133 + 132 = 395.

건우가 숫자를 한번 훑고 접어두었다.

"의대 가고 싶어, 약대 가고 싶어?"

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근데 현실적으로 약대도 괜찮다고 생각은 해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랑 가고 싶은 거랑 달라."

서연이 노트를 꺼내 펼쳤다.

"제가 정리해봤어요. 395면 서울 약대는 커트가 395에서 407이니까 하위권 약대는 가능하고요. 의대는 최소 402 이상이니까 부족해요. 7점이나."

건우가 노트를 들여다봤다. 깔끔한 글씨. 표까지 그려져 있었다.

"꼼꼼하네."

"수험생활 2년 하면 이 정도는요." 서연이 쓸쓸하게 웃었다.

건우는 노트를 서연에게 돌려주고 화이트보드에 서연의 이름을 적었다.

"서연아, 약대는 숫자로 되는 문제야. 너 점수면 가천대 약대, 강원대 약대 사정권이야. 확실해."

"네."

"근데 네 얼굴을 보면 약대 얘기할 때 눈이 죽어."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의대 얘기할 때는 눈이 살아. 본심 숨기고 있지?"

입술이 떨렸다.

"선생님, 저는 현실적이어야 해요. 395로 의대는—"

"없어. 올해 정시로는 방법이." 건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서연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근데 없다고 끝이 아니야." 건우가 마커를 들었다. "올해 정시는 안 돼. 하지만 내년 수능은 있어. 올해 약대를 안전하게 잡으면서, 반수로 내년 수능을 노리는 방법이 있어. 약대 1학년을 다니면서 수능을 다시 치는 거지. 성적이 오르면 의대로 갈아타고, 안 오르면 약대 그대로."

서연이 손에 쥔 노트를 내려다봤다. 2년간 정리한 데이터가 빼곡한 노트.

"생각해봐. 오늘 당장 정할 필요 없어."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문을 나서다 멈췄다.

"선생님."

"응."

"다은이라는 학생 아세요?"

건우가 눈을 깜빡였다.

"알지. 왜?"

"제 친구 오빠가 다은 선배 동기래요. 다은 선배가 두 컨설턴트 말 다 듣고 결국 자기가 직접 골랐다는 얘기 들었어요."

건우가 웃었다.

"그래. 그 학생이 가장 똑똑했지."

"저도… 저도 제가 정해야 하는 거죠?"

"당연하지."

서연이 나갔다. 건우는 화이트보드를 봤다. 서연의 이름 옆에 적은 숫자들.

395. 의대 커트 402. 7점 차이. 올해는 안 된다.

'이 학생에게서 다은이가 보여.'

본심을 숨기고 있었다. 약대가 괜찮다고 말하지만, 진짜 원하는 것은 의대. 하지만 숫자가 허락하지 않는다.

마커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입시가 끝나면 뭐가 남을까. 번호? 합격 통지서? 아니야. 그 학생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남는 거야.'


저녁 7시. 시율의 사무실.

한양대 의대 모의지원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민재의 배치안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모의지원 현황을 열었다. 한양대 의대 모의지원자 수.

어제까지: 876명.

오늘: 956명.

하루 만에 80명 증가.

손가락이 멈췄다.

80명. 하루 증가분으로는 비정상적이었다. 정시 시즌 막바지에 모의지원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특정 대학에 80명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은 패턴이 아니다.

2화에서 발견했던 것이 떠올랐다. B의대 모의지원 왜곡. 대치동 대형 학원이 학생들에게 모의지원을 유도하여 경쟁률을 교란한 사건.

'또?'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80명의 가입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가입 시간대. 지역 정보. 점수대 분포.

데이터가 정렬되었다.

80명 중 62명이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가입했다. 지역은 대치동이 아니었다.

대치동.

시율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대치동의 대형 컨설팅 업체. 자체 학생들의 경쟁을 줄이기 위해 다른 대학의 모의지원을 부풀리는 수법. B의대 때의 대치동 학원과 같은 논리지만, 주체가 다르다.

메가에듀 입시전략팀.

업계 3위. 직원 수 50명. 모의지원 플랫폼과 데이터 공유 계약을 맺고 있는 대형 업체.

62명이 메가에듀의 공작이라면, 실제 한양대 의대 모의지원자는 956이 아니라 894명.

실질 경쟁률이 달라진다. 합격선 예측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모니터를 응시했다. 숫자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공개하면 모의지원 시스템의 신뢰가 무너진다. 공개하지 않으면 다른 학생들이 왜곡된 데이터로 판단한다.'


밤 10시. 다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시율이 아니라 준혁에게.

『준혁 오빠, 나 C대학교 원서 냈어. 고마웠어요.』

준혁이 미소를 짓고 답장을 쳤다.

『잘했어, 다은아. 잘 될 거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 한 줄을 더 쳤다.

『아버지는 좀 어때?』

잠시 후 답이 왔다.

『좀 나아지셨어. 엄마가 많이 웃으셔. 내가 결정하니까.』

준혁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율이 모니터 앞에서 아직 데이터를 돌리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형."

"응."

"다은이 원서 냈대요. C대학교."

키보드 소리가 잠깐 멈췄다. 1초. 다시 이어졌다.

"잘했네."

그 두 글자에 감정이 실려 있는지 없는지, 준혁은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키보드 소리의 리듬이 아까와 미세하게 달라진 것은 느꼈다.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부드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