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 62마리."
시율이 블랙라벨의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돌렸다. 건우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만남. 첫 번째는 신경전이었다면, 이번에는 시율이 먼저 연락한 것이었다.
건우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한양대 의대 모의지원 데이터. 80명 급증분. 그중 62명의 가입 패턴.
"대치동, 같은 시간대, 같은 IP 대역." 시율이 화면을 넘겼다. "탑에듀 입시전략팀이에요."
"탑에듀?" 건우가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놀라지 않았다. "아, 걔네."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랄 게 뭐 있어. 원래 그래." 건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모의지원은 반만 믿어. 그래서 내가 감을 쓰는 거야."
"감이 아니라 보정된 데이터가 필요한 겁니다."
건우가 시율을 봤다. 2주 전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와 같은 구도.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경멸이 아니라 탐색.
"보정? 그 보정도 데이터로 하잖아. 오염된 데이터를 오염된 데이터로 보정하면 뭐가 남아?"
시율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건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의지원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정 모델을 만들면, 기반 데이터 자체가 오염되어 있을 경우 보정도 왜곡된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 데이터 과학의 기본 원리.
"그래서 어쩔 건데?" 건우가 물었다.
"제보하려고요."
"제보?"
"모의지원 플랫폼 운영사에. 유령 계정 62개의 패턴을 보내서 삭제를 요청할 겁니다."
건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생각하는 표정.
"그러면 어떻게 돼?"
"유령이 삭제되면 모의지원 숫자가 정상화됩니다. 한양대 의대뿐 아니라, 탑에듀가 건드린 다른 대학도 영향을 받겠지만."
"다른 대학도?"
시율이 노트북에서 추가 분석 결과를 열었다.
"한양대만이 아닙니다. 경희대 의대, 중앙대 의대, 성균관대 약대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보입니다. 탑에듀가 자체 학생들이 지원하는 대학의 경쟁률을 낮추기 위해, 경쟁 대학의 모의지원을 부풀리고 있어요."
건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체계적이네."
"모의지원 시스템의 허점이에요. 실명 인증 없이 가입할 수 있으니까."
"근데 제보하면." 건우가 시율의 눈을 봤다. "너한테도 영향이 있지 않아? 네 분석도 모의지원 데이터 기반이잖아."
"그래서 제보하는 겁니다."
건우가 눈을 깜빡였다.
"오염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하는 건 분석이 아닙니다. 제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데이터가 정확해야 해요."
건우가 시율을 한참 봤다. 무표정한 얼굴. 금테 안경. 검은 터틀넥. 2주 전과 같은 모습. 하지만 하는 말이 달랐다.
"야, 너 좀 변했다."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했어." 건우가 웃었다. 이번에는 칼날 없는 웃음이었다. "2주 전에는 '감으로 배치하면 도박'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데이터를 지키겠다고 하고 있어. 다른 소리 같지만, 실은 네가 데이터 '밖'을 보기 시작했다는 거야."
시율은 커피를 마셨다. 블랙. 역시 쓴맛.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10시.
시율은 모의지원 플랫폼 운영사에 메일을 보냈다.
분석 보고서 12페이지. 유령 계정 62개의 가입 시간, IP 패턴, 점수대 이상 분포, 탑에듀와의 연관성 추정 데이터, 객관적 근거만으로 구성했다. 감정이나 추측은 한 줄도 넣지 않았다.
제목: 모의지원 데이터 이상 패턴 신고.
보내기를 누르고 의자에 기대었다.
'이게 맞는 걸까.'
유령이 삭제되면 모의지원 경쟁률이 변한다. 여러 대학에서 순위가 바뀔 수 있다. 이미 모의지원 결과를 보고 지원 전략을 세운 학생들이 패닉에 빠질 수 있다.
선의가 혼란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오염된 데이터를 그대로 두는 것은 더 큰 피해다. 잘못된 숫자 위에 세운 전략은 모래 위의 성이다.
준혁이 들어왔다.
"형, 민재 학생한테 연락할까요? 한양대 모의지원 왜곡 건 설명해야 하지 않아요?"
"해야지."
"뭐라고 말해요?"
"사실대로. 모의지원 숫자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유령 계정이 있었고, 보정하면 실질 경쟁률이 달라진다고."
"그러면 민재 학생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유령이 빠지면 경쟁자가 줄어드니까."
"맞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대학의 숫자도 바뀌어. 전체 모의지원 판이 흔들리면 예측 자체가 불안정해져."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오후 3시. 시율의 사무실.
민재에게 왜곡 데이터를 설명하는 상담.
"그러니까… 모의지원 숫자가 조작됐다는 거예요?"
민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작이라기보다는 의도적 왜곡입니다." 시율이 모니터를 돌렸다. "한양대 의대 모의지원자 956명 중 62명이 실제 지원 의사 없는 유령 계정이에요. 이걸 제외하면 실질 지원자는 894명."
"894명이면 경쟁률이 내려가잖아요."
"네. 42명 선발 기준으로 경쟁률이 22.7대 1에서 21.3대 1로 떨어집니다. 합격선도 소폭 하락할 가능성이 있어요."
민재의 눈이 빛났다.
"그러면 저한테 유리한 거잖아요?"
"결과적으로는요. 하지만 제가 모의지원 플랫폼에 신고했습니다. 유령 계정이 삭제되면 한양대뿐 아니라 여러 대학의 모의지원 경쟁률이 변동합니다."
"왜 신고를… 저한테 유리한 거면 그냥 두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시율이 민재를 봤다.
"유령이 남아 있으면 다른 학생들이 잘못된 데이터로 판단합니다. 한양대 경쟁률이 부풀려진 걸 보고 한양대를 포기하는 학생이 생겨요. 그 학생에게는 한양대가 맞는 선택일 수도 있는데."
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데이터는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학생이 공정한 조건에서 판단할 수 있어요."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선생님은… 다른 컨설턴트랑 다르네요."
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지 같은지 몰랐다. 다만, 2주 전의 자신이라면 유령 계정을 놔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기 학생에게 유리한 왜곡이라면.
'정말 그랬을까. 그때도 데이터의 정확성은 중요했을 텐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틀 후. 오전 8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의지원 플랫폼 운영사에서 온 메일.
『제보해주신 이상 패턴을 확인하였습니다. 분석 결과 비정상적 가입으로 판단되는 계정 98건을 일괄 비활성화 처리하였습니다.』
98건.
시율이 제보한 62건보다 많았다. 운영사가 자체 조사를 확장하여 추가 유령 계정 36건을 더 찾아낸 것이다.
모니터를 켰다. 모의지원 플랫폼에 접속했다.
경쟁률 표가 갱신되고 있었다.
한양대 의대: 956명에서 858명. 경쟁률 22.7대 1에서 20.4대 1. 경희대 의대: 1,103명에서 1,024명. 경쟁률 18.1대 1에서 16.8대 1. 중앙대 의대: 987명에서 921명. 성균관대 약대: 1,456명에서 1,389명.
숫자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양대뿐이 아니었다. 유령이 여러 대학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삭제 후 여러 대학의 순위가 동시에 바뀌었다.
준혁이 달려왔다.
"형, 입시 커뮤니티 난리예요."
준혁의 노트북 화면. 학부모 게시판.
'[속보] 모의지원 경쟁률 대폭 변동 — 무슨 일이?' '[긴급] 한양대 의대 경쟁률 22:1에서 20:1로 급락?' '의대 모의지원 경쟁률 다 바뀜;; 이거 뭐야' '모의지원 믿지 마라 vs 이래도 안 보면 어떡해'
시율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학부모들. 기존 상담 학생의 부모들. "선생님, 경쟁률이 바뀌었는데 우리 아이 전략 괜찮은 건가요?"
한 통. 두 통. 세 통. 여섯 통.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다. 2주 전에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유가 달랐다. 그때는 학부모의 불안이 귀찮아서. 지금은 학부모들에게 할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준혁아."
"네."
"학부모들한테 일괄 문자 보내. '모의지원 데이터 변동이 있었으나, 개별 학생 전략은 이미 보정 데이터 기반으로 수립되어 있어 영향 없음. 변동 사항 반영한 최종안은 내일까지 안내 예정.' 이 내용으로."
"네, 알겠습니다."
준혁이 문자를 치기 시작했다. 시율은 모니터를 봤다.
12명의 학생 배치안. 모의지원 변동을 반영하여 전부 재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2화에서 모의지원 왜곡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보정 모델을 구축해왔으니까. 유령이 삭제된 지금의 데이터가 오히려 시율의 보정 모델에 가까워졌다.
'내 모델이 맞았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모의지원을 믿고 전략을 세웠던 다른 컨설턴트의 학생들은 혼란 속에 있을 것이다. 시율이 제보한 것이 맞는 일이었지만, 그 결과가 혼란을 낳았다.
오후. 건우에게서 전화.
"야, 네가 제보한 거지?"
"네."
"대단하네. 98개가 날아갔어."
"62개만 제보했는데, 운영사가 추가로 36개를 더 찾았나 봅니다."
건우가 웃었다.
"우리 쪽은 괜찮아. 원래 모의지원 안 믿으니까. 학부모들한테 '내가 뭐랬어, 모의지원 반만 믿으라고 했잖아' 했더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더라."
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우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직감 기반 전략은 모의지원 데이터에 덜 의존하므로, 데이터가 흔들려도 영향이 적다.
"근데 한시율. 너한테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요."
"민재."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 학생이 나한테도 왔어. 너한테도 갔고. 다은이 때랑 같은 구도지."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번엔 좀 달라." 건우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이번엔 나도 네 전략이 뭔지 대충 알거든. 한양대 반영비 잡은 거 맞지?"
"맞습니다."
"좋은 전략이야. 인정해." 건우가 말했다.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근데 마진이 좁아. 올해 한양대 커트가 0.5점만 올라도 끝이야."
"유령 계정 삭제로 실질 경쟁률이 떨어졌습니다. 커트가 오르기보다 내리는 방향이에요."
"그건 모의지원 기준이지. 실제 지원은 또 달라."
침묵.
"한시율, 민재한테 네 안만 고집하지 마. 그 학생한테 선택지를 줘."
전화가 끊겼다.
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봤다.
한양대 의대 환산 137.0. 보정 후 커트 예측 136.2에서 136.8 사이.
마진이 넓어졌다. 유령 삭제 전보다 안정적이다.
'이 전략이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숫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우의 말이 남아 있었다. "선택지를 줘."
다은에게 A의대만 고집했을 때 무엇이 빠졌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새 파일을 열었다.
강민재 배치 전략안 v2.0.
Option A — 최적해. 가군 한양대 의대. 환산 137.0. 보정 커트 136.2에서 136.8. 합격 확률 78.4%.
Option B — 안전판. 가군 충북대 의대. 표준 408, 커트 403. 합격 확률 96.1%. 나군 경희대 의대. 표준 408, 커트 410. 최초합 확률 22.3%. 추합 포함 시 41.7%.
두 개의 선택지.
처음이었다. 시율이 하나의 케이스에 두 개의 전략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은.
'최적해를 제시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하나의 답. 가장 확률 높은 답.'
하지만 다은이 가르쳐준 것이 있었다. 최적해는 컨설턴트의 판단이지, 학생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
파일을 저장했다.
밤 9시. 민재에게서 전화.
"선생님, 저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건우 선생님한테도 상담 받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전략이 다르거든요. 시율 선생님은 한양대 직행, 건우 선생님은 충북대 안전에 경희대 추합."
"네."
"다은 선배한테 연락해봤어요. 건우 선생님 통해서 번호 받았는데."
시율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다은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선생님들 말고 내가 정했어.'"
침묵.
"선생님, 저도 제가 정해야 하는 거죠?"
시율의 입이 열렸다. 2주 전이라면 "제 전략을 따르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데이터가 답이니까. 숫자가 최선을 말해주니까.
"민재 씨, 내일 사무실로 오세요. 두 가지 전략을 모두 보여드릴게요. 숫자와 조건을 다 설명하고, 그 다음에 민재 씨가 정하면 됩니다."
전화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요."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놓았다.
준혁이 퇴근 인사를 하러 왔다.
"형, 나 먼저 갈게요. 학부모 전화 스물두 통, 다 처리했어요."
"고생했어."
준혁이 멈칫했다. '고생했어'라는 말을 시율에게서 들은 것이 몇 번이나 될까. 두세 번이었다. 2년 동안.
"형도 좀 쉬세요."
문이 닫혔다.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모니터 두 대가 켜져 있었다. 왼쪽에는 12명의 학생 배치안 목록. 오른쪽에는 모의지원 변동 후 경쟁률 추이.
그러나 시율이 보고 있는 것은 화면이 아니었다.
2주 전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다은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계산만 하던 자신. "힘들어 보이는 건 내 전공이 아니야"라고 말하던 자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다르지.'
숫자는 여전히 본다, 반영비도 계산한다, 모의지원도 분석한다.
하지만 하나가 추가되었다.
'왜.'
학생에게 '왜'를 묻기 시작했다. 숫자 뒤에 있는 이유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더 나은 배치를 만드는 건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건지는 아직 모른다.
안경을 벗고 스탠드 불빛을 봤다. 렌즈에 빛이 반사되어 천장에 작은 점을 만들었다.
내일. 민재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보여준다. 시율의 전략과 건우의 전략을 모두. 숫자와 맥락을 다 설명하고, 학생이 고른다.
하지만 민재가 고르는 것은 대학이 아니다. 0.5점의 줄타기를 감수하고 서울에 남을 것인지, 안전을 택하고 여자친구에게서 멀어질 것인지.
숫자가 줄 수 없는 답이었다.
'컨설턴트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아직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방향은 잡혔다.
겨울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대치동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고, 학원가의 간판들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나군 원서 접수 마감까지 일주일.
전쟁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