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의 대치동은 죽어 있었다.
학원 간판들은 꺼져 있었고,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시율 어드바이저스 4층의 창문 하나뿐이었다.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밤새 돌린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화면에 떠 있었다.
모의지원 왜곡 변수를 보정한 B의대 합격선 예측. 세 가지 시나리오.
``` 시나리오 1 (보수적): 왜곡 50% 반영 → 합격선 270.1 시나리오 2 (중립적): 왜곡 75% 반영 → 합격선 269.2 시나리오 3 (공격적): 왜곡 100% 반영 → 합격선 268.0 ```
다은의 환산점수: 268.4.
시나리오 3에서만 합격 가능. 그것도 간신히.
화면을 응시했다. 시나리오 3은 모의지원 왜곡분 98명이 전원 이탈한다는 전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부는 진짜로 B의대에 지원할 것이다.
'건우의 직감이 방향은 맞았다. 하지만 크기가 다르다.'
메모를 정리했다.
-결론: B의대는 여전히 리스크가 높다. A의대가 최선.-
변함없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손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건우가 데이터 없이, 직감만으로 같은 방향을 짚었다는 사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패턴을 읽은 건가, 운인 건가.'
파일을 저장하고 의자에 기대었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고, 모니터 빛만 얼굴에 닿았다.
준혁이 어젯밤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첫 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없었어.'
거짓말이었다. 있었다.
첫 해, 시율은 지금처럼 숫자만 보지 않았다. 학생의 눈도 봤고, 학부모의 사정도 들었다. 그리고 한 학생에게 숫자가 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허용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이후로 변수를 차단했다. 감정이라는 변수. 사정이라는 변수. 직감이라는 변수.
숫자만 남겼다.
적중률은 63%에서 95%로 올라갔다.
'숫자만 보면 틀리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이 케이스는 이렇게 찝찝하지.'
같은 시각. 대치동.
건우의 연구소에는 화이트보드 세 개가 서 있었다. 세 개 모두 숫자와 화살표로 가득했다.
건우는 다은의 이름이 적힌 보드 앞에 서 있었다.
B의대. 추합 2차 내 가능. 확신도 85%.
마커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정윤호.'
7년 전의 이름이 또 떠올랐다.
그때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화이트보드 앞에. 마커를 들고. "올해는 컷이 내려간다." 그렇게 말했다. 정윤호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을 믿을게요."
컷은 내려가지 않았다.
윤호는 떨어졌다. 재수를 했다. 또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 윤호는 스물셋이었고, 목소리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선생님, 저 이제 그만 하려고요."
그 한마디가 7년 동안 건우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화이트보드를 봤다. 빨간 마커로 쓴 '최다은 — B의대 서울 — 추합 2차 내 가능'.
'이번엔 달라.'
중얼거리며 숫자들을 다시 점검했다. 정원 원복에 따른 경쟁 구도 변화. 상위권의 안정 지향 트렌드. 교차지원 패턴의 변화. 전부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데이터를 돌려 확인한 것이 아니라, 20년의 경험이 쌓아올린 감각으로 읽은 것이었다.
'맞아. 이번엔 맞아.'
하지만 확신이 클수록 입안이 말랐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꺼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컷은 움직여."
혼잣말이었다.
"근데 사람은…"
말을 멈췄다.
"사람도 움직이는 거야."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렸다. 눈물은 아니었다. 아마도.
오후 3시. 시율의 사무실.
다은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회색 후드. 짧은 단발.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뭔가를 결심한 사람의 눈. 아직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결론을 내리겠다는 결심.
"선생님, 시간 되세요?"
시율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이 상담석에 앉았다. 의자를 돌렸다.
"배치안 수정은 없습니다. A의대가—"
"선생님,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말이 끊겼다. 다은이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100%가 아니잖아요."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열렸다가 닫혔다.
"100%는 없습니다."
처음으로 그 문장을 학생 앞에서 소리 내어 말했다.
"A의대도 94.7%이지 100%가 아니에요. 5.3%의 리스크는 존재합니다."
다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면 선생님은 왜 A대학이라고 하신 거예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게 제 일입니다."
"리스크요." 다은이 그 단어를 반복했다. 맛보듯이. "그 리스크 안에 저도 들어가 있나요?"
대답하지 못했다.
다은이 눈을 봤다. 시율은 마주하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상담에서 시선을 피한 것이.
"선생님은 저를 숫자로 보시는 거잖아요."
"숫자가 가장 정확합니다."
"선생님." 다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오히려 그래서 더 무거운 목소리. "저는 숫자가 아니에요."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무의식적으로. 키보드가 없는 곳에서.
"…알겠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인정한 건지, 시율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은이 일어났다.
"고마워요, 선생님. 생각해볼게요."
문이 닫혔다.
한동안 빈 상담석을 봤다. 다은이 앉았던 자리. 의자가 약간 비틀어져 있었다.
'숫자가 아니라고?'
'숫자가 아니면 뭘 봐야 하는데.'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닦았다. 닦을 필요가 없었는데 닦았다.
저녁 7시.
준혁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시율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화면에 아무것도 띄우지 않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격자. 배경화면뿐.
"형, 커피요."
"고마워."
준혁이 커피를 내려놓고 자기 자리로 가려다 멈췄다.
"형."
"응."
"다은이 말이에요."
시율이 고개를 돌렸다.
준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를 꺼내려는 표정. 2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형, 다은이는 단순히 안전한 데를 가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아요."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 학생 얘기를 안 들어봐요? 진짜로. 숫자 말고."
"배치에 학생 얘기가 왜 필요해."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순간, 자신의 목소리에 확신이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준혁도 느꼈다.
"형, 다은이 아버지가 편찮으시대요."
손가락이 멈췄다.
"서울에 큰 병원이 있어서 가까이 있고 싶다고. 그래서 서울 의대를 고집하는 거래요. 단순히 서울이 좋아서가 아니라."
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형은 숫자가 전부라고 하지만, 이건 숫자 밖의 문제잖아요. A의대 충남이면 서울에서 두 시간이에요. 아버지 면회 가는 데 왕복 네 시간. 6년 내내."
준혁이 시율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형이 배치하는 건 대학이 아니라 그 학생의 6년이에요. 아니, 인생이에요."
침묵이 흘렀다. 사무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겨울바람이 건물 모서리를 돌아가는 소리.
"…나도 알아."
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알면서 왜—"
"알면서도 숫자를 보는 게 내 방식이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숫자 밖을 보기 시작하면 판단이 흐려져. 판단이 흐려지면 실수를 해. 실수를 하면…"
말이 끊겼다.
'실수를 하면 그때처럼 된다.'
첫 해의 케이스. 감정을 허용해서 틀린 배치. 검게 지운 이름.
"형?"
"다은 학생의 결정은 다은 학생이 하는 거야." 모니터를 켰다. "내 일은 가장 확률 높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거지."
준혁이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바뀐 것은 분명했다. 준혁이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 시율이 "나도 알아"라고 말한 것.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하지만 있었다.
정시 지원 마감 3일 전.
최종 배치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12명의 학생, 12개의 전략. 11개는 확정. 하나만 남았다.
최다은.
파일을 열었다. 배치안 v3.2. A의대 합격 확률 94.7%.
'이게 최선이다.'
준혁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병원. 서울에서 두 시간. 왕복 네 시간.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
파일을 닫으려 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최다은.
문자를 열었다.
『선생님, 두 분의 안 다 감사했어요.』
눈이 문자 위에 멈췄다. '두 분'. 건우에게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다음 줄.
『그런데 저는 제가 직접 정하기로 했어요.』
손가락이 굳었다.
한 줄 더.
『C대학교 의대에 넣으려고요.』
C대학교.
머릿속에서 전국 의대 배치표가 돌아갔다. A가 아니다. B가 아니다. C대학교 의대.
경남 소재. 지역인재 전형 40% 이상 할당.
다은의 프로필을 열었다. 출신 고교.
경남 창원 소재 고등학교.
재수는 서울에서 했지만, 고등학교는 경남이었다.
'지역인재 전형.'
C대학교 의대 지역인재 전형. 경남권 고교 출신 대상. 정시에서도 별도 운영. 일반 전형보다 합격선이 15~20점 낮다.
다은의 환산점수 268.4면 합격선을 넉넉히 넘는다.
시율은 이 대학을 검토하지 않았다. 다은이 "서울 의대"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건우와의 대결에서 서울 B의대에만 집중했으니까.
서울도 아니고. 충남도 아니고. 경남.
봤어야 할 선택지를 보지 못했다.
건우도 보지 못했다.
다은이 스스로 찾았다.
핸드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책상 위에 떨어졌다. 가벼운 소리.
"…뭐?"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형? 왜요?"
핸드폰 화면을 봤다. 다은의 문자가 여전히 떠 있었다.
C대학교 의대. 지역인재. 합격 확률.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반영비, 입결, 지역인재 컷.
97.3%.
시율이 권한 A의대의 94.7%보다 높았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숫자로도 다은의 선택이 더 나았다. 데이터로도. 확률로도.
하지만 그 선택지를 보지 못했다.
왜?
'"서울 의대 가고 싶어요."'
다은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으니까. 진짜 목적을 묻지 않았으니까. 아버지 곁에 있고 싶다는 것. 장학금이 필요하다는 것. 확실한 곳에 가고 싶다는 것.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았으니까.
"형, 무슨 일이에요?"
준혁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배치안이 떠 있었다. v3.2.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안. 그 옆에 핸드폰. 다은의 문자.
그리고 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숫자가 아닌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이 학생을 알고 있었나?'
같은 시각. 대치동.
건우도 같은 문자를 받았다.
C대학교. 지역인재.
문자를 읽고 한참 동안 화이트보드를 봤다. 빨간 글씨로 쓴 'B의대 서울'. 자신이 밀었던 전략.
다은은 B의대도 선택하지 않았다.
건우가 웃었다. 크게. 연구소 전체에 울리도록.
"야, 이 학생 봐라."
아무도 없는 연구소에서 혼잣말을 했다.
"지역인재. C대학교." 화이트보드의 숫자를 훑었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아갔다. "되네. 이거 되잖아. 내가 왜 이걸 못 봤지?"
웃음이 사라졌다.
왜 못 봤을까. 시율과 같은 실수를 했다. 다은이 "서울"이라고 했으니 서울만 봤다. 학생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학생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읽지 못했다.
'내가 사람을 본다고 했지. 근데 이 학생을 봤나?'
마커를 잡았다. 천천히 화이트보드에 한 줄을 추가했다.
-컷은 움직인다. 사람도 움직인다. 그런데 내가 놓친 건 —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였다.-
마커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저는 제가 직접 정하기로 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쓸쓸하게. 하지만 어딘가 대견하게.
"그래. 네가 정해야지. 원래 네 인생이니까."
그날 밤.
시율은 사무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스탠드 불빛만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핸드폰이 한 번 더 울렸다. 다은에게서.
『한 선생님 덕분에 숫자 보는 법을 배웠어요. 노 선생님 덕분에 숫자 밖을 보는 법을 배웠고요. 근데 결국 정하는 건 저잖아요. 그래서 제가 정했어요.』
세 번 읽었다.
준혁이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다은의 프로필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숫자가 아닌 곳을 봤다.
출신지: 경남 창원. 가족: 어머니(자영업), 아버지(입원 중). 비고란에 자신이 적어놓은 메모. "장학금 중요."
'장학금이 중요해요.'
첫 상담 때 다은이 한 말이었다. 시율은 그것을 A의대 장학금 가능성과 연결했다. 맞았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읽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 경제적 부담. 서울이 아니라 '아버지 가까이'라는 진짜 목적.
C대학교 의대. 경남 소재. 아버지가 경남에 계시다면.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았다.
'94.7%보다 97.3%가 높다.'
'숫자로도 내가 졌다.'
'근데 진짜 진 건 숫자가 아니야. 나는 이 학생을 몰랐어. 케이스 번호는 알았지만, 최다은을 몰랐어.'
안경을 다시 쓰고 핸드폰을 들었다.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쓰다 지웠다. 쓰다 지웠다.
결국 보낸 문자는 한 줄이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보내고 나서 한참을 봤다. 그 한 줄이 충분한지 부족한지 모르겠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모니터가 꺼진 채로 서 있었다. 이 사무실에서 모니터가 꺼져 있는 밤은 처음이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었다. 12월의 바람. 정시 지원 마감까지 3일.
그리고 한시율은, 처음으로, 숫자가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