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율의 사무실에는 시계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벽시계는 없었다. 대신 모니터 우측 하단의 디지털 숫자가 시간을 알려줬다. 09:14:37. 시율은 그 숫자가 바뀌는 것을 보지 않았다. 다른 숫자들이 눈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모의지원 현황.
B의대. 서울 소재. 정시 모집 42명.
현재 모의지원자: 1,247명.
식은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았다. 언제 식었는지 모른다.
"준혁아."
"네, 형."
"B의대 모의지원자 점수대 분포 뽑아봐. 표준점수 기준으로."
준혁의 키보드 소리가 시작되었다. 시율은 자신의 모니터에서 다른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건우가 어제 말한 것. 의대 정원 원복. 추합 예측. 감이라고 했다. 20년의 감.
'감으로 학생 인생을 건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아마도.
"형, 나왔어요."
준혁이 화면을 돌렸다. 시율이 의자를 끌고 준혁의 모니터 앞으로 갔다.
B의대 모의지원자 1,247명의 표준점수 분포.
시율의 눈이 그래프를 훑었다. 상위 100명의 점수대, 200명까지의 분포, 합격선 근처의 밀집도.
멈췄다.
"이상한데."
"뭐가요?"
화면의 한 지점을 짚었다. 표준점수 합산 395~400 구간.
"이 구간 지원자가 비정상적으로 많아."
"많으면… 경쟁이 세다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야." 키보드를 빌려 데이터를 필터링했다. "이 구간은 B의대 합격선보다 10점 이상 낮아. 이 점수로 B의대에 넣는 건 무모해. 그런데 이 구간에만 170명이 몰려 있어."
"무모한 지원을 하는 사람이 많은 거 아닐까요?"
"모의지원이야, 이건. 진짜 원서가 아니라 연습이지. 하지만 모의지원에서도 이 정도 집중은…"
말을 멈추고 숫자를 다시 봤다. 170명. 정상 분포라면 이 구간에 40~60명이 적정했다. 100명 이상 초과.
'왜?'
메모장을 열어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일단 닫았다. 지금은 다은의 케이스가 먼저였다.
오후 1시. 다은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제 노건우 선생님이 다은이한테 하신 말씀 때문에… 저희가 좀 혼란스럽습니다."
시율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창밖을 봤다. 겨울 햇살이 대치동 빌딩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꽂혔다.
"어머니, 제 배치안은 변함없습니다. A의대가 최선이에요."
"그건 알겠는데요, 건우 선생님은 서울 B의대도 된다고…"
"모의지원 데이터를 보여드릴까요?" 감정 없는 목소리. "B의대 현재 모의지원 경쟁률 29.7대 1입니다. 여기서 실제 지원 전환율 72~78%를 적용하면 실질 경쟁률은 21~23대 1. 다은 학생의 환산점수로는 합격선 아래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한숨이 들렸다.
"숫자로는 그런데… 다은이가 서울을 가고 싶어 하거든요."
"감정은 변수가 아닙니다, 어머니."
전화를 끊었다. 준혁을 봤다. 준혁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뇨. 없습니다."
시율은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같은 시각. 대치동.
노건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보드에는 숫자들이 빼곡했다. 빨간 마커, 파란 마커, 검은 마커가 뒤섞여 하나의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 올해 의대 정시 배치 전체 그림.
마커 뚜껑을 물고 보드를 응시했다.
"소장님, 2시에 학부모 상담 있습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보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B의대. 서울. 정시 42명. 작년 증원 원복으로 경쟁 구도 변화.
건우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아닌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느낌. 20년간 쌓인 패턴들이 만들어내는,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올해 상위권은 안정 지향이야.'
수능이 어려웠다. 어려운 수능은 상위권 변별이 커진다. 한 문제 차이로 순위가 크게 갈리면 상위권이 더 보수적으로 지원한다. 자기 점수에 확신이 없으니까. 불안해지니까.
'불안한 놈들은 아래로 내려간다. 아래로 내려가면 위가 비어.'
마커로 B의대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여기, 빈다."
혼잣말이었다. 확신에 찬 혼잣말.
핸드폰이 울렸다. 다은 어머니.
"선생님, 저희 다은이 건으로 한번 더 상담 가능할까요? 한시율 선생님이랑 의견이 다르니까 다은이가 혼란스러워해서…"
"그럼요. 언제든 오세요. 다은이 데리고."
전화를 끊고 다시 화이트보드를 봤다.
'한시율. 대치동의 계산기.'
눈이 좁아졌다.
'데이터가 다 맞으면 왜 해마다 예상이 빗나가?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고? 아니야. 숫자도 거짓말해. 읽는 놈이 맥락을 모르면.'
빨간 마커로 한 줄을 추가했다.
-최다은 — B의대 서울 — 추합 2차 내 가능-
그리고 밑에 작게.
-(확신도: 85%)-
건우의 확신도는 숫자가 아니었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20년간 수천 명의 성적표를 보고, 수천 번의 합격과 불합격을 지켜본 몸이 보내는 신호.
하지만 그 몸이 한 번 크게 틀린 적이 있었다.
마커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잠깐, 7년 전의 얼굴이 스쳤다. 이름은 기억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억났다.
'정윤호.'
직감을 믿고 상향 지원을 권했다. "올해 컷이 내려간다." 내려가지 않았다. 정윤호는 불합격했다. 재수도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맞아.'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말이 7년 전에도 했던 말이라는 것을, 건우는 알고 있었다.
저녁. 시율의 사무실.
준혁이 파일 캐비닛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율이 외출한 사이, 오래된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작업.
3년 전 자료. 시율이 독립하여 '시율 어드바이저스'를 처음 열었던 해의 기록.
파일을 열었다. 배치 결과 통계.
적중률: 63.2%.
준혁의 손이 멈췄다.
63.2%. 올해 시율의 목표가 100%라는 걸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숫자였다. 지난 2년 연속 95%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첫 해에 뭐가 있었길래?'
파일을 더 넘겼다. 개별 케이스 기록. 대부분은 간결한 메모. 학생 이름, 지원 대학, 결과. 그런데 한 케이스만 메모가 길었다.
이름은 검게 지워져 있었다. 결과란에 '불합격 → 재수 → 미추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시율의 필체로 한 줄.
-"다시는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준혁은 파일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시율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 정리했어요."
"응."
"그런데 형, 한 가지 궁금한 게…"
시율이 코트를 벗으며 돌아봤다.
"첫 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동작이 멈췄다. 코트를 든 채로. 1초. 2초.
"없었어."
"자료를 보니까 적중률이—"
"준혁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과거 데이터는 참고용이야. 지금은 달라."
준혁이 입을 다물었다.
시율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아침에 발견한 B의대 모의지원 이상 데이터. 아직 해결하지 못한 변수. 395~400 구간의 비정상적 집중.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 10시.
다은은 대치동 독서실에 있었다.
수능은 끝났지만 습관처럼 왔다. 책상 위에는 교재 대신 두 장의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왼쪽. 시율의 배치안. 깔끔하게 인쇄된 A4용지. 숫자, 그래프, 확률.
오른쪽. 건우의 배치안. 손글씨로 적힌 메모. 화살표, 동그라미, 느낌표.
같은 학생. 같은 성적. 정반대의 결론.
두 종이를 번갈아 봤다. A의대, 합격 확률 94.7%. B의대, 추합까지 포함 시 가능성 있음.
94.7%는 거의 확실하다. 거의.
하지만 '거의'는 '전부'가 아니다.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
"다은아, 엄마인데. 건우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아. 서울이 좋지 않겠니? 아빠 병원도 서울이 가까우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 나 생각 좀 하고 있어."
"그래도 빨리 정해야지. 원서 마감이 얼마 안 남았잖아."
"알아."
전화를 끊었다. 창밖을 봤다. 겨울밤 대치동의 불빛들. 학원 간판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나는 뭘 원하는 거지?'
서울 의대. 그것이 목표였다. 재수까지 한 이유였다. 하지만 시율 선생님의 숫자가 말하고 있었다. 31.6%. 세 번 중 두 번은 떨어진다.
건우 선생님은 "된다"고 했다. 경험과 직감을 근거로. 하지만 그건 보장이 아니다.
두 종이를 포개어 접었다. 가방에 넣었다.
"선생님들은 다 맞다고 하는데, 왜 답이 다른 거예요?"
독서실은 조용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1시. 시율의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B의대 모의지원 데이터. 395~400 구간의 170명. 정상 분포 대비 110명 초과.
시율은 가설 세 개를 세웠다.
하나, 올해 수능이 쉬워서 무모한 상향 지원이 증가했다. 둘, 작년 의대 증원 뉴스에 자극받아 의대를 준비했던 N수생들의 '묻지마' 모의지원. 셋, 특정 단체가 의도적으로 모의지원을 유도했다.
하나와 둘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170명까지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셋을 파고들었다.
모의지원 데이터는 익명이지만, 가입 시간대와 지역 정보는 열람할 수 있었다. 395~400 구간 170명의 가입 패턴을 분석했다.
결과.
170명 중 98명이 같은 주에, 같은 지역에서 가입했다.
대치동.
눈이 가늘어졌다.
대치동의 대형 학원이 학생들에게 B의대 모의지원을 유도한 것이다. 모의지원 경쟁률을 높여서 다른 수험생들의 B의대 지원을 막기 위해. 실제 지원에서 경쟁이 줄어들면, 자기 학원 학생들이 유리해지니까.
흔한 수법이었다. 모의지원 시스템의 허점.
시율의 손이 멈췄다.
'이 98명을 빼면.'
계산이 돌아갔다. 머릿속에서.
'실질 모의지원자 1,149명. 실제 지원 전환율 75% 적용하면 862명. 42명 선발 기준 경쟁률 20.5대 1. 합격선이… 내려간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합격선이 내려가면 다은의 환산점수 268.4가 B의대 사정권에 들어올 수 있다.
건우의 직감이. 맞을 수도 있다.
'아니.'
고개를 저었다. 모의지원 왜곡은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다른 변수들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모니터를 봤다. 숫자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모의지원 1,247명 중 실제 지원 전환율은 72~78%. 이 범위 안에서 안전 마진이 존재합니다."
다은 어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모의지원 자체가 오염되어 있다면?
안경을 벗었다. 렌즈에 모니터 빛이 반사되었다. 천장의 작은 빛이 흔들렸다.
'…틀릴 수도 있다고?'
한시율의 인생에서 그 질문이 떠오른 것은 3년 만이었다. 첫 해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
안경을 다시 썼다.
모니터를 껐다.
꺼진 화면에도 숫자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1,247. 98. 268.4.
그리고 94.7%.
94.7%는 여전히 높은 숫자였다. A의대는 여전히 안전했다. 전략에 빈틈은 없었다.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무실 밖에서 대치동의 겨울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끝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모니터를 다시 켰다.
숫자를 다시 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숫자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