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치표 전쟁 목차
배치표 전쟁

1화 환산점수 268.4

수능 성적 발표일.

한시율은 모니터 세 대가 만들어내는 푸른 빛 속에 앉아 있었다. 왼쪽 화면에는 올해 수능 표준점수 분포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가운데 화면에는 자체 개발한 배치 시뮬레이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오른쪽 화면에는 전화번호 목록. 오전 9시부터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의 발신자들.

시율은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다.

숫자가 먼저다. 학부모의 불안은 나중이다.

"형, 전화 좀 받아야 하지 않아요? 벌써 스물세 통째…"

박준혁이 노트북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율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국어 표준점수 최고점 147. 작년보다 8점 높아. 수학 만점자 비율은 0.34%에서 0.17%로 떨어졌고."

"네?"

"올해 수능이 어려웠다는 뜻이야. 어려운 수능은 표준점수 상위권 변별이 커져. 변별이 커지면 배치표가 벌어져."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훑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빠르고 정확하게.

"배치표가 벌어지면 우리한테 유리한 건가요?"

"유리하냐가 아니라." 시율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금테 안경 너머로 준혁을 봤다. "예측하기 어려워진다는 거지."

준혁이 입을 다물었다.

시율은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숫자들이 정렬되고, 분류되고, 의미를 만들어갔다. 수능이 끝나면 수험생들은 쉬지만, 입시 컨설턴트의 전쟁은 그때 시작된다.

배치. 반영비. 환산점수. 모의지원. 추합.

한 칸의 차이가 한 인생을 가른다.

그리고 한시율은, 그 한 칸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오후 2시. 상담실.

시율은 책상 위에 태블릿 하나만 올려놓고 기다렸다. 상담석 세 개 중 가운데 자리. 맞은편에 놓인 의자 두 개.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온 건 어머니였다. 쉰 가까이 되어 보이는 여자. 겨울 코트 속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 그 뒤로 작은 체구의 소녀가 따라 들어왔다. 회색 후드, 짧은 단발. 얼굴에 감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최다은. 재수생.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1년을 보낸 학생.

"앉으세요."

시율이 짧게 말했다. 어머니가 먼저 앉았고, 다은이 그 옆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몸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자세.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듯.

"성적표 보여주시겠어요?"

다은이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시율이 펼쳤다.

국어 132(백분위 97). 수학 128(백분위 93). 영어 1등급. 사탐 2과목 평균 백분위 94.

시율의 눈이 숫자 위를 스캔했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아갔다.

"국어가 강점이네요."

"네."

"수학이 아쉽고."

다은의 손이 살짝 움찔했다. 시율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의대 지망이라고 들었는데, 맞죠?"

"네. 서울 의대… 가능하면요."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선생님, 서울 쪽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작년 재수할 때도 지방은 싫다고…"

시율은 태블릿을 켰다. 숫자들이 정렬되었다.

"백분위 97, 국어 반영비 40% 기준으로 환산하면 268.4."

정적.

"이 점수로 갈 수 있는 의대는 세 곳입니다."

손가락이 화면을 넘겼다. 세 대학의 이름과 환산점수, 작년 입결이 표시되었다.

"첫째, A의대. 충남 소재. 작년 합격선 265.8. 안전 지원. 합격 확률 94.7%."

손가락이 내려갔다.

"둘째, D의대. 경북 소재. 작년 합격선 267.1. 적정 지원. 합격 확률 78.3%."

한 번 더.

"셋째, B의대. 서울 소재. 작년 합격선 271.2. 상향 지원. 합격 확률 31.6%."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제 추천은 A의대입니다. 안전하고, 장학금 가능성도 높습니다."

다은이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가 흘렀다. 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1%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31.6%는 세 번 중 한 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율은 감정 없이 말했다. "100명이 지원하면 68명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재수를 한 번 더 하실 건가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머니의 입술이 떨렸다.

"장학금이 중요해요."

다은이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꺼낸 말.

시율이 다은을 봤다. 짧은 눈 맞춤. 다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한마디에는 설명하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A의대 상위 합격 시 등록금 전액 장학금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

상담이 끝났다. 시율은 어머니와 다은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이미 태블릿을 닫고 다음 상담 데이터를 열고 있었다.

준혁이 상담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형, 다은이 좀 많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어요?"

"힘들어 보이는 건 내 전공이 아니야."


저녁 8시. 블랙라벨.

대치동 사거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시율은 이 카페의 딱 한 가지를 좋아했다. 자리 간격이 넓다는 것. 옆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배치.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오늘 상담한 12명의 데이터를 정리해야 했다. 각 학생의 성적, 지망, 반영비 환산점수, 지원 전략 초안.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올해도 배치표만 보고 애들 인생 정리해?"

목소리가 크고 굵었다. 카페 전체에 울렸다. 시율은 눈을 들었다.

노건우.

덩치 큰 남자가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었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채, 두꺼운 손에 카페라테를 들고. 눈이 작았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것은 분명 호기심이었다.

"자리 비었지?"

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우는 이미 앉고 있었다.

"한시율. 올해 몇 명 받았어?"

"관심 없으실 텐데."

"관심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지." 건우가 라테를 마셨다. 입가에 거품이 묻었지만 닦지 않았다. "대치동에서 네 이름이 자꾸 들려. 데이터의 신이라나 뭐라나."

"과장이 심하시네요."

"과장이 아니라 비꼬는 거야." 건우가 웃었다. 웃음에 칼날이 있었다. "데이터로 배치하면 그게 컨설팅이야? 그건 그냥 계산기지."

시율의 손가락이 멈췄다.

"계산기가 감보다 정확합니다."

"감이라고?" 건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20년 동안 수천 명을 봤어. 성적표 들고 오는 애들 눈만 봐도 알아. 이 애가 도전할 애인지, 안정을 원하는 애인지. 그걸 감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네 배치표보다 내 직감이 정확했던 해가 더 많아."

시율은 건우의 눈을 봤다. 진심이었다. 자기 확신에 취해 있었다.

"적중률로 말씀하시죠."

"적중률?" 건우가 고개를 젓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숫자로 따지면 네가 높겠지. 근데 내가 배치한 애들은 대학 가서도 행복해. 네 애들은?"

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우가 라테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건우의 눈에 그림자 같은 것이 스쳤다.

"물론 나도… 틀린 적은 있어."

목소리가 작아졌다. 한 순간이었다. 금방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호탕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든, 올해는 재밌겠다. 대치동에 신인 하나가 나왔으니까."

건우가 일어났다. 시율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가지."

시율이 말했다. 건우가 멈췄다.

"감이요? 감으로 배치하면 그건 도박이지 컨설팅이 아닙니다."

건우가 돌아보지 않고 웃었다.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시율은 화면을 봤다. 숫자들이 빈틈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한시율의 유일한 신앙이었다.


새벽 2시.

사무실의 불은 스탠드 하나뿐이었다. 준혁은 소파에서 잠들었고, 시율은 여전히 모니터 앞에 있었다.

다은의 배치안이 완성되었다.

화면에 정리된 세 줄의 전략이 깔끔하게 빛났다.

``` [최다은 배치 전략안 v3.2] 가군: A의대 (충남) — 합격 확률 94.7% 나군: D의대 (경북) — 합격 확률 78.3% 다군: E대학 약학과 — 합격 확률 88.1% 예상 최종 결과: A의대 합격, 장학금 수혜 가능 ```

세 번을 다시 읽었다. 빈틈이 없었다. 반영비 계산, 입결 추세, 모의지원 데이터, 올해 난이도 보정. 모든 변수를 반영했다.

'완벽해.'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았다. 스탠드 불빛이 렌즈에 반사되어 천장에 작은 빛을 만들었다. 잠깐이었다. 다시 안경을 쓰고 파일을 저장했다.

내일 아침, 다은에게 설명한다. 이 안으로 가면 된다. 숫자가 보장한다.


다음 날 오전 10시.

다은이 혼자 왔다. 어머니 없이.

"어머니는요?"

"일하셔요. 오늘은 저 혼자 들을게요."

시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태블릿을 켰다. 배치안을 화면에 띄웠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A의대가 최선입니다. 새벽까지 추가 시뮬레이션을 돌렸는데, 안전 마진이 충분해요. 장학금도—"

상담실 문이 열렸다.

시율과 다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노건우가 서 있었다.

덩치 큰 몸이 문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마치 자기 사무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 미안. 상담 중이었나?"

미안하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누구세요?" 다은이 물었다.

"노건우야. 입시전략연구소." 건우가 다은 앞에 앉았다. 시율의 옆자리에. "네 어머니한테 연락받고 왔어. 다른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시율의 눈이 좁아졌다.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상담 중입니다."

"알아, 알아. 5분만." 건우가 종이 뭉치를 펼쳤다. 손글씨로 가득한 배치표. 화이트보드에 쓰던 필체 그대로. "다은이, 잠깐만 봐봐."

다은이 종이를 내려다봤다.

"B의대. 서울. 작년 합격선이 높지? 근데 올해 수능이 어려웠어. 어려운 수능은 상위권 변별이 커져. 한 문제 차이로 순위가 확 갈리니까 눈치 싸움이 시작돼."

건우의 두꺼운 손가락이 숫자를 짚었다.

"작년에 증원했다가 올해 정원이 원복됐잖아. 3,058명. 근데 작년 증원 때 의대 준비한 N수생들이 그대로 쌓여 있어. 불안한 놈들은 아래로 내려가. 아래로 내려가면 위가 비어."

시율의 입이 열리려 했다. 건우가 먼저 말했다.

"추합까지 노리면 가능성이 있어. 내 경험상 올해 의대 추합은 3바퀴는 돈다. 내 코가 그래."

"추합은 예측이 아니라 도박입니다." 시율이 말했다.

"도박?" 건우가 시율을 봤다. "모의지원 숫자만 믿는 게 더 도박이야. 그거 누가 넣은 건데? 진짜 지원할 애들이야?"

시율이 대답하지 않았다. 데이터는 데이터다. 표본이 클수록 정확하다. 그것이 통계의 원리였다.

"다은아."

건우가 다은을 봤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부드러워졌다.

"네가 서울 의대 가고 싶은 거 알아. 재수까지 한 건 거기 가려고 한 거잖아. A의대 가면 안전하지. 근데 네가 1년을 더 투자한 이유가 '안전'이었어?"

다은의 눈이 흔들렸다.

시율은 그것을 봤다. 이번에는 봤다.

숫자가 아닌 것이 다은의 눈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건우 선생님의 의견은 참고하시되." 시율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종 결정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선생님."

다은이 말을 끊었다.

"두 분 다… 시간 좀 주세요."

다은이 일어났다. 회색 후드 속에 손을 찔러 넣고, 상담실을 나갔다.

시율과 건우가 남았다.

건우가 먼저 일어났다. 종이 뭉치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배치표가 다가 아니야. 그 숫자 뒤에 애가 있어, 애가."

건우가 나갔다.

시율은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여전히 배치안이 떠 있었다.

``` A의대 (충남) — 합격 확률 94.7% ```

94.7%.

완벽한 숫자였다. 틈이 없었다.

그런데.

시율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멈춰 있었다. 키보드를 향해야 할 손가락이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배치표가 다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숫자가 전부야.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다은이 나가면서 보여준 그 눈빛이, 94.7%라는 숫자 위에 미세한 금을 내고 있었다.

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 다은이 그냥 가버렸어요. 어떡해요?"

시율은 태블릿을 껐다.

"돌아와. 숫자를 이길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시율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