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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전쟁

5화 내신 성적표

중간고사 성적 발표일, 교실 복도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채린이었다.

서하는 그걸 창문 너머로 봤다. 7시 45분. 교실에 학생은 아직 다섯 명. 채린이 교무실 쪽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복도 유리를 통해 보였다. 손에 A4 한 장. 얼굴은 평소처럼 미소로 관리되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1초 반 박자 빨랐다.

'이미 받았구나.'

한영고의 내신 성적 발표는 오전 9시에 공식 공개되었지만, 학생회 간부에게는 오전 8시에 사본이 먼저 내려왔다. 채린은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채린이 지금 자기 성적을 알고 있었다.

서하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그 모습을 오래 쳐다보았다. 채린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는 각도였지만, 채린의 손이 그 A4 종이의 한 구석을 너무 세게 쥐고 있어서 종이가 살짝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미소와 어긋나는 손.


조회 시간.

오 담임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학생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오늘 아침은 다른 아침과 달랐다. 담임이 교탁에 서류철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 서류철에는 반 학생 전원의 중간고사 성적표가 들어 있었다.

"종례 때 개별로 받아가. 지금은 공지 몇 가지만 할게."

담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용했다. 교실 안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수시파 학생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정시파 학생들은 비교적 평온했다. 성적표가 자기들의 전쟁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험 기간 중 감독 선생님한테 이상 행동으로 적발된 학생 이야기는 오늘 따로 하지 않을 거야. 둘째, 6월 평가원 모평 대비 일정은 다음 주부터 시작할 거고, 셋째—"

담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교실 안의 시선이 담임에게 모였다.

"셋째, 한시우 학생. 오늘부터 2학년 5반이 아니라 2학년 7반으로 반 이동이 되었어."

교실이 조용해졌다.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준혁도 옆에서 서하를 살짝 보았다.

"한시우 학생은 오늘 1교시 전에 7반 교실로 올 거야. 원래 5반이었는데, 5반 담임 선생님이 한 학생의 상담 부담 때문에 담임 배정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학생부 결정이 내려왔어. 우리 반에 자리 하나 남아 있던 거 알지? 뒷줄 창가 쪽 빈 책상. 거기가 시우 자리야."

서하가 옆의 준혁을 쳐다보았다. 준혁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5반 담임이 시우를 쫓아낸 거야.-'

5반 담임은 지난 주에 시우에게 '이번 중간고사 1등급 하나라도 못 잡으면 담임 자리에서 너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우는 결국 그 문장을 실현당했다. 5반에서 쫓겨났고, 7반으로 넘어왔다. '학급 내 미정 학생 비율 낮을수록 우대'라는 담임 평가 기준 초안이 이미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하는 천천히 주먹을 책상 아래에서 쥐었다가 폈다.

"시우 학생한테 다들 자연스럽게 대해줬으면 해. 특별히 뭘 해줄 필요도 없고, 특별히 묻지도 마. 그냥 옆자리 친구처럼." 담임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걸 선생님도 알아. 근데 그게 지금 우리 반이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거야."

담임이 서류철을 집어 들고 교실을 나갔다.


1교시 수업 시작 5분 전.

교실 뒷문으로 시우가 들어왔다. 2학년 5반 교복 명찰 그대로. 가방 하나만 메고 있었다. 시우는 교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눈이 어디를 볼지 모르고 있었다.

서하가 조용히 일어섰다.

"시우야. 여기."

서하가 뒷줄 창가 쪽 빈 책상을 가리켰다. 시우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교실 안의 몇몇 학생들이 시우를 흘깃 보았지만, 대부분은 금방 고개를 돌렸다. 담임이 말한 대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시우가 자리에 앉았다. 서하의 자리에서 두 줄 떨어진 대각선 뒤쪽 자리였다. 서하는 잠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우와 눈을 맞췄다. 시우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서하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거 보통 일 아니야."

"알아."

"-담임이 바뀐다는 건 이 학교에서 추방이랑 거의 같은 의미-야. 시우가 5반에서 완전히 거부당한 거잖아. 근데 우리 반 담임이 받아줬어. 이건 우리 반 담임이 자기 평가 손해 감수하고 시우를 받은 거야."

서하는 교무실 쪽을 잠시 생각했다. 오 담임이 교장실에서 나오던 첫날의 어두운 표정. 어제 지하 도서관 문 앞에서 '신호야'라고 말했던 목소리. 그리고 오늘 시우를 자기 반으로 받은 결정.

'-담임도 자기 자리를 잃을 각오를 하고 있는 거야.-'


2교시 후 쉬는 시간, 교실 앞 복도에 종이 한 장이 붙었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성적 요약 — 반별 평균 및 1등급 비율.'

학생들이 우르르 몰렸다. 서하도 천천히 복도로 나갔다. 종이에는 각 반별 평균 점수와 주요 과목별 1등급 비율이 적혀 있었다. 7반은 반 평균이 중간 정도였다. 그러나 1등급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수시파가 많은 반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몇몇 학생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7반 1등급 비율 왜 이래?"

"시우 때문 아니야? 걔 수학 거의 다 못 풀었다며."

"시우 하나로 1등급 비율이 이렇게 내려갈 리가 없지."

"그러게. 이상하네."

서하는 그 종이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종이 내용보다 그 종이가 걸린 위치가 더 중요했다. 교실 앞 복도 벽, 학생들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 학생들이 매일 지나다니며 '우리 반이 몇 등급 비율이냐'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하게 만드는 위치.

'반별 1등급 비율을 복도에 붙이는 것부터가 시스템이야.'


3교시가 끝나고.

서하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발신: 박채린] [점심시간에 잠깐 볼 수 있어? B동이 아니라 중앙 복도 쪽 계단실에서.]

서하는 한참 그 문자를 쳐다보았다.

'B동이 아니라 계단실이라는 건, 수시파 시선이 없는 곳에서 보자는 뜻이야.'

서하는 답을 보냈다.

[12시 20분.]


점심시간, 중앙 복도 옆 2층 계단실.

계단실은 비상 계단 공간이었다. 평소엔 사용 빈도가 낮고, 점심시간엔 특히 조용했다. 서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채린이 이미 계단참에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에 몇 명이 점심시간 농구를 하고 있었다.

채린이 서하의 발소리에 돌아섰다.

"왔네."

"네."

채린의 얼굴은 오늘 아침에 복도에서 본 것과 같았다. 미소는 관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소의 각도가 평소보다 반 도 정도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 반 도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하는 알아보았다.

"성적 받았어요?" 서하가 먼저 물었다.

"받았어." 채린이 답했다.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도 돼. 어차피 오후 종례 때 다 공개돼."

"…그럼 물어볼게요. 어떻게 나왔어요?"

채린이 한 박자 멈췄다가 말했다.

"전 과목 1등급. 생윤만 2등급."

서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채린의 얼굴을 다시 봤다. 전 과목 1등급에 한 과목만 2등급. 수시파 학생회 부회장에게는 그 숫자가 얼마나 무거운지 서하도 이제는 알았다. 고2 1학기 1등급 비율은 내신 평균의 출발선이었다. 여기서 한 과목이 2등급이면 평균 1.1이 아니라 1.2, 1.3으로 올라간다. 평균 0.1의 차이는 한영고 기준에선 대학 한 단계 차이였다.

"생윤이었다고요."

"생윤이었어." 채린이 자기 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생윤 1컷에서 한 문제 차이로 밀렸어. 이번 중간고사 자체 출제 단원 통합 문항 세 문제 중에 하나를 틀렸어. 그 한 문제야."

"2등급이면 되게 나쁘진 않잖아요."

"-2등급은 내 기준에선 낙제야-." 채린이 창밖을 다시 봤다. "엄마한테 1등급 컷 한 문제 차이라고 말하니까 엄마가 15초 동안 아무 말도 안 했어. 15초가 길지? 엄마랑 나 사이에서 15초 침묵이면 그건 실망 넘어서 분노야. 근데 엄마가 결국 한 말은 '그럼 기말고사에서는 1등급 받아야지'였어. 엄마 말투가 차분해서 더 무섭더라."

서하는 조용히 들었다.

"근데 내가 서하 너 불러낸 건 내 성적 얘기하러 부른 게 아니야." 채린이 다시 서하를 돌아봤다. "오늘 8시에 학생회로 내려온 사본에 네 성적도 있었어. 내가 봤어."

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내 성적 아직 못 받았어요."

"내가 먼저 말해줄게." 채린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윤서하, 전 과목 평균 2등급. 1등급 두 개, 2등급 네 개. 생윤은 너도 2등급이야. 너도 자체 출제 문항 중에 하나 틀렸어."

서하는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전학 첫날부터 일주일 만에, 족보 없이, 자습실 없이, 오늘 아침까지 시우 걱정하면서 공부한 결과가 '평균 2등급'이었다. 한영고 기준으로는 눈에 띄는 숫자였다. 특히 1학기 중간고사에 전학생이 낸 숫자로는.

"채린 씨."

"박채린."

"박채린. 이 숫자는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채린이 웃었다. 이번엔 관리된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음에 가까웠다. 조금 피곤한 웃음.

"그 질문 자체가 -네가 아직 이 학교 언어를 모른다는 증거-야."

"그럼 가르쳐줘요."

"좋다 나쁘다는 맥락에 달렸어. 네가 만약 수시파 공식 멤버였으면, 평균 2등급은 '재앙'이야. 수시파 내부 상위권은 평균 1.0에서 1.2 사이야. 2등급은 경쟁력이 없어."

"그런데요."

"그런데 네가 전학생이고, 족보를 못 받았고, 자습실 자리가 없었고, 한영고 시험 유형을 처음 본 거잖아. 그 조건에서 평균 2등급이면, 네 실력은 -이 학교 상위 5퍼센트-에 드는 거야."

채린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창밖의 햇빛이 채린의 얼굴 옆면에 닿았다.

"그리고 네가 전 과목 평균 2등급인 전학생이고, 동시에 정시파가 너 3월 학평 성적표를 가져와서 자습실에 자리 주려고 했다는 건, 너는 -한영고에서 이 학기에 가장 위험한 카드-야."

"위험한?"

"-양쪽 성적표를 다 잡을 수 있는 카드-는 한영고에서 정말 드물어. 내가 기억하는 한 최근 3년에 한 명이었어. 그 선배는 결국 수시로 갔고, 서울대 의대 학종이야. 그 선배는 스스로 선택했지. 그런데 너는 선택을 안 하고 있잖아. 선택 안 하는 카드는 -모두에게 위협-이야."

서하는 잠시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누군가가 농구공을 던졌고, 공이 림에 맞고 튕겨 나왔다.

"박채린."

"응."

"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해."

"어제 민재가 나한테 '자습실 만석이다, 네 자리 없다'는 문자 보냈어요. 그리고 당신도 '한영고 내신 1등급은 정원 정해져 있어, 네 자리 없다'는 문자 보냈잖아요.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어조로 나한테 거절 문자를 보냈는데."

"…어."

"그거 둘이 의논한 거예요?"

채린이 한 박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의논한 거 아니야. 근데 -의논한 것처럼 움직였어-."

"그게 무슨 차이예요?"

"-시스템이 우리한테 같은 문자를 쓰게 만들었다-는 차이야. 민재랑 나는 서로 적이야. 정시파랑 수시파는 서로 멸시해. 근데 네가 '무소속'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간 순간, 민재랑 나는 자동으로 같은 반응을 했어. 왜냐하면 너는 우리 두 쪽 모두에게 위협이니까. 교장이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약속한 것도 아니야. 그냥 -반사적으로- 그렇게 된 거야."

"그럼 우리 둘 다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 채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서하는 숨을 천천히 쉬었다.

"박채린, 그럼 오늘 나를 왜 불렀어요?"

"경고하려고." 채린이 말했다. "너 지금 2등급 성적 공개되면 정시파 내부에서 네 위치가 다시 흔들릴 거야. 민재는 네 성적을 오늘 8시 이후에 확인했을 거야. 민재가 '내신은 의미 없다'고 어제 말했지만, 2등급 성적이 전학생한테서 나오면 -민재 내부 서열 감각에도 금이 가-."

"무슨 금?"

"민재는 내신은 무의미하다고 믿어. 근데 네가 내신도 잘 보면, 그건 민재가 믿는 세계관의 반례가 되잖아. 반례가 되는 카드는 민재에겐 참을 수 없어. 민재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채린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나도 가만있을 수 없어." 채린이 말했다. "내가 너를 가만두면, 수시파 내부 애들이 나한테 '왜 이 카드를 안 잡았냐'고 물을 거야. 그럼 내 리더십에 금이 가. 그래서 내가 오늘부터 너를 공격하게 될 수도 있어. 나는 그걸 미리 너한테 말하러 온 거야."

"-공격한다고 미리 말하는 공격-은 공격이 아닌데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나한테도 -반칙-이야." 채린이 웃었다. "나는 지금 내 파벌 규칙을 어기고 여기 온 거야."

서하는 한참 채린을 쳐다보았다. 채린의 얼굴에서 오늘 아침의 0.1초 균열이 다시 비쳐 지나갔다. 완벽하게 관리된 미소 뒤에 있는, 피곤한 진짜 표정.

"박채린. 하나만 물어볼게요."

"해."

"당신은 지금 한영고 수시파 부회장이고, 이번 중간고사 전 과목 1등급 중에 생윤 2등급 하나만 놓쳤고, 앞으로도 이 학교의 수시 라인을 쭉 이끌어갈 사람이에요. 근데 -왜 지금 여기 계단실에서 나한테 반칙을 하고 있어요-?"

채린이 오래 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점심시간 종료 종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내가 너한테 질투하는 거 같아서." 채린이 말했다. "네가 어제 복도에서 '두 개의 성적표 중 하나를 왜 골라야 하냐'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났어. 그 말이 너무 틀린 말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맞는 말-이라서."

서하는 조용히 들었다.

"나는 고2까지 살면서 그 질문을 나한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어. 나는 엄마가 짜준 수시 일정에 맞춰서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까지 왔고, 내가 선택해본 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정도야. 근데 전학 이틀 차에 그 질문을 학교 복도 한가운데에서 크게 한 너를 보고, 나는 -내가 안 던진 질문-을 네가 대신 던지는 거 같아서 분했어. 분노보다 더 나쁜 건, 그 분노가 너한테 향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한테 향한다는 거였어."

서하는 채린이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긴 말을 했다는 걸 느꼈다.

"박채린."

"응."

"오늘 반칙한 거,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 할 여유 있어?" 채린이 옅게 웃었다. "내일부터 나 너 공격할 수도 있어."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니까요."

채린이 잠시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계단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멈췄다.

"윤서하."

"네."

"네가 '세 번째 자리'를 만들 거면, 나도 그 세 번째 자리가 뭔지 보고 싶어. 멀리서라도."

채린이 나갔다. 계단실 문이 닫혔다.


5교시 종례 시간.

담임이 학생들에게 개별로 성적표를 나눠 주었다. 서하의 자리에 담임이 마지막으로 왔다.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놓았다. 서하가 봉투를 열었다.

국어 1등급. 수학 1등급. 영어 2등급. 한국사 2등급. 생윤 2등급. 지구과학 2등급.

평균 1.8등급.

채린이 계단실에서 말해준 숫자와 거의 같았다. 채린은 평균 2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1.8이었다. 채린이 학생회 사본에서 본 건 소수점 아래까지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8은 한영고 기준으로 상위 10퍼센트 근처였다. 수시파 부회장 채린의 전 과목 1등급(생윤 제외)보다는 낮지만, 한영고 내신 평균의 상위권이었다.

서하는 그 성적표를 한참 쳐다보았다. 종이에 찍힌 숫자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1.8'이라는 숫자가 서하의 존재를 대표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오늘 저녁부터 서하의 학교 내 위치를 결정할 거였다.

담임이 서하 자리 옆에서 멈춰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하야. 축하해."

"축하할 숫자인가요?"

"한영고 기준으론 축하할 숫자야. 근데 너한테 이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네가 결정해."

담임이 다른 학생 자리로 걸어갔다. 서하는 봉투를 다시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방과 후. 지하 도서관.

서하, 준혁, 시우. 세 사람이 어제와 같은 긴 책상에 둘러앉았다. 창문 위쪽으로 5월의 오후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우가 가장 먼저 자기 성적표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렸다.

"형. 저도 받았어요."

서하와 준혁이 그 종이를 쳐다봤다. 시우가 설명했다.

"수학 5등급. 생윤 5등급. 지구과학 5등급. 한국사 4등급. 국어 5등급. 영어 3등급." 시우가 담담하게 읽었다. "전 과목 평균 4.5등급. 5등급제 바닥 근처예요."

서하는 그 숫자들을 봤다. 숫자 하나하나가 시우가 어제와 그제 교실에서 겪은 일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었다.

"영어는 3등급이네."

"네." 시우가 작게 웃었다. "영어 하나는 제대로 풀었어요. 형이 어제 '내일은 영어 하나만 제대로 풀어'라고 해서, 그 말만 지켰어요."

"그럼 영어 3등급은 네가 혼자 만든 숫자야. 어제 상태에서 영어 하나라도 3등급 받은 건 쉽지 않아."

"…네."

준혁이 자기 성적표를 꺼냈다. 준혁의 평균은 3.0쯤이었다. 그는 무던하게 올려놓았다. 서하가 자기 봉투에서 성적표를 꺼내 책상 가운데에 놓았다.

세 장의 성적표가 가지런히 놓였다.

1.8. 3.0. 5.33.

세 사람은 한참 자기들의 숫자를 쳐다보았다.

"이상하지." 준혁이 먼저 말했다. "이 세 개의 숫자가 원래는 우리를 완전히 다른 방에 나눠 넣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셋은 같은 책상에 앉아 있어."

"왜 이상해?" 서하가 물었다.

"-이 학교에선 원래 이런 책상이 없거든-." 준혁이 말했다. "1.8짜리는 수시파 상위 스터디 가고, 3.0짜리는 수시파 중간 그룹 가고, 5.33짜리는… 거의 어디에도 못 가. 가는 길이 다르고, 앉는 자리가 다르고, 밥 먹는 테이블도 달라. 세 명이 같은 책상에 앉는 건 이 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조합-이야."

"지금 있는데?"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준혁이 작게 웃었다.

시우가 자기 성적표를 조심스럽게 봉투에 다시 넣었다.

"형. 저는 이 성적표 받으면 저희 엄마한테 보여줘야 해요. 근데 저는 엄마 얼굴 볼 자신이 없어요."

"…어려운 일이지."

"엄마가 화를 안 낼 거예요. 엄마는 저한테 화를 안 내요. 엄마는 저한테 그냥 -포기한 얼굴-을 해요. 그게 더 무서워요."

서하는 시우의 얼굴을 잠시 봤다. 시우는 울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울지 않는 게 시우한테 더 나은 상태라는 걸 서하가 알아차렸다.

"시우야."

"네."

"하나 부탁해도 돼?"

"네."

"이번 주말에 엄마한테 이 성적표 보여드릴 때, 네 옆에 내가 같이 있어도 돼? 같이 설명해드리는 거 말고, 그냥 네 옆에 서 있는 거. 엄마가 너한테 포기한 얼굴을 하실 때, 네 옆에 아직 포기 안 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걸 네가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시우가 서하를 한참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준혁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진짜로 머리 좋은 게 이런 거구나-."

"뭐가."

"네가 지금 시우한테 한 말. '엄마가 너한테 포기한 얼굴 할 때 네 옆에 아직 포기 안 한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걸 네가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 문장, 이 학교의 모든 성적표가 해결 못 하는 걸 한 번에 해결하는 문장이야."

서하는 부끄러워서 잠깐 눈을 돌렸다.


저녁 6시 20분.

도서관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오 담임이 아니었다.

모르는 여학생이었다. 서하는 얼굴을 알아보았다. 2학년 수시파 내부에서 본 적 있는 얼굴. 중앙 복도 첫날에 채린이 '학생회 학종 라인 넣어줄게'라고 말했던 그 학생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 단정한 단발머리, 평범한 교복, 얼굴에 피로가 가라앉아 있었다.

"…들어와도 돼요?"

서하가 일어섰다.

"누구야?"

"2학년 3반 정유진이에요. 박채린 부회장 밑에서 학생회 학종 기획 보조 중이었어요."

"보조-었-다?" 서하가 그 과거형을 바로 잡았다.

"네." 정유진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잘렸어요."

서하가 잠깐 채린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점심시간에 채린이 '내일부터 나 너 공격할 수 있어'라고 했다. 그 말이 나온 지 여섯 시간 만에 채린이 움직였다. 채린이 직접 서하를 공격한 게 아니라, 채린이 자기 내부에서 '-비효율적인 카드-'를 잘라낸 거였다. 그 첫 번째 타겟이 정유진이었던 것 같았다.

"앉아." 서하가 긴 책상의 빈 자리를 가리켰다.

정유진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 아무나 와도 돼요?"

"그래." 서하가 말했다. "여기 규칙은 딱 하나야."

"뭔데요?"

"-남의 성적 묻지 않는다-." 서하가 말했다. "네가 몇 등급이든, 모의고사 전교 몇 등이든, 여기서는 아무도 너한테 묻지 않아. 네가 가진 성적표가 몇 장이든 상관없어. 그게 이 도서관 규칙이야."

정유진의 어깨가 약간 내려갔다. 긴장이 풀리는 움직임이었다.

"…저 진짜로 이 자리에 앉아도 돼요?"

"응."

"고마워요."

정유진이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손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시우가 자기 자리에서 그걸 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어제 여기 처음 왔어요. 앉아도 돼요."

"…어제요?"

"네. 어제랑 오늘이요. 어제 수학 시험 망쳐서 울면서 들어왔어요."

정유진이 시우를 보고 조금 웃었다. 두 사람은 아직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여기 처음 온 사람'끼리의 미소가 통했다.

서하는 책상 위의 세 장의 성적표를 보면서, 그리고 방금 앉은 정유진을 보면서, 갑자기 이 책상의 모양이 달라 보였다.

'세 개에서 네 개가 됐네.'

어제까진 서하와 준혁 둘이었다. 오늘 오전에 시우가 합류해서 셋이 됐다. 오후에 정유진이 앉으면서 넷이 됐다. 같은 책상에, 서로 다른 성적표를 가진 사람들이, 성적표를 묻지 않는다는 한 개의 규칙으로 앉아 있었다.

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말했다.

'이게 세 번째 자리구나.'


밤.

지하 도서관 문이 닫히기 직전.

사서 선생님이 도서관 복도 끝에서 서하 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가방을 들고 퇴근했다. 서하와 준혁, 시우, 정유진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책을 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이었지만 아까처럼 쓸쓸하지는 않았다.

서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저녁 8시 30분쯤. 시우의 자리에 한 번 더 확인하려고 했는데, 시우가 먼저 서하를 봤다.

"형."

"응."

"저 오늘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그 전에 여기서 잠깐 더 있어도 돼요?"

"더 있어도 돼."

"고마워요."

서하는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 생각난 듯이 한 번 열었다.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확인해보니 아까 저녁에 온 거였는데 서하가 못 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발신: 강민재] [오늘 성적 확인했어. 내신 평균 1.8. -재미있어졌네-. 6월 모평까지 4주 남았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서하는 그 문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제까지의 민재는 '네 자리는 없어'라고 말했다. 오늘의 민재는 '재미있어졌어'라고 말했다. 같은 학생에게 24시간 만에 말투가 바뀐 이유는 분명했다. 서하의 내신 평균 1.8이 민재 세계관의 반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하는 휴대폰을 가방에 다시 넣었다.

'6월 모평까지 4주.'

지하 도서관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이 어두운 저녁 빛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서하는 책을 다시 펴고, 이번엔 국어 문제집이 아니라 수학 기출문제집을 꺼냈다. 6월 평가원 기출 1회분. 서하는 첫 페이지를 넘겼다.

책상 맞은편에서 준혁이 서하가 고른 책을 슬쩍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4주, 짧아."

"알아."

"근데 4주면, 한 사람의 삶이 바뀌기도 해."

"누가 그래?"

"방금 내가."

서하는 작게 웃었다. 4주 뒤의 시험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의 일곱 시간이 서하의 머릿속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우의 교실 이동. 채린의 계단실 반칙. 정유진의 첫 방문. 그리고 네 개로 늘어난 책상의 그림.

서하는 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