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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전쟁

6화 6월 모평

6월 첫째 주 화요일, 새벽 5시 40분.

서하는 잠에서 깼다. 알람을 맞춘 시간보다 20분 빨랐다.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낯설어 보였고,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늘이 6월 평가원 모의평가였다. 고2로 올라와서 처음 보는 평가원 모평. 3월 학평과는 다른 시험이었다. 3월 학평은 시도교육청 주관이었지만, 6월 모평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출제했다. 수능을 만드는 바로 그 기관이 만든 시험이었다.

평가원이 낸 문제를 푸는 건 처음이었다.

'수능의 축소판.'

서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어제 저녁 정리해둔 필기구 세트가 그대로 있었다. 연필 두 자루, 샤프 하나, 지우개 두 개, OMR용 컴퓨터 사인펜 두 개. 평가원 모평에서는 수능과 동일한 필기구 규정이 적용됐다.

서하는 씻고, 교복을 입고, 어머니가 차려놓은 조금 가벼운 아침을 먹었다. 밥 반 공기, 계란프라이, 그리고 국물. 많이 먹으면 시험 중에 속이 불편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탁 맞은편에서 서하를 보고 있다가, 서하가 다 먹고 일어날 때 조용히 한 마디만 했다.

"다녀와. 너 하던 대로 해."

"네."


7시 30분, 한영고 정문.

학교 공기가 중간고사 때와 또 달랐다.

중간고사 날의 공기가 수시파의 긴장이었다면, 오늘의 공기는 정시파의 긴장이었다. 복도로 들어서는 정시파 학생들의 표정이 어제와 달랐다. 평소에 무표정한 민재 쪽 라인 학생들도 오늘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안경을 낀 학생들은 렌즈를 여러 번 닦았고, 안경을 안 낀 학생들은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봤다.

수시파 학생들도 아주 평온한 얼굴은 아니었다. 6월 모평은 수시파도 피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수시파 일부는 '이 시험 어차피 내신이랑 상관없는데 뭐'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하는 학생의 눈이 평소보다 흔들렸다. 모평 성적표에 자기 이름이 전국 몇 퍼센트에 찍히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에 서하가 들어설 때, 양쪽 무리에서 시선이 잠깐씩 서하 쪽으로 왔다가 갔다.

'오늘은 누구한테도 내 성적을 설명할 필요가 없네.'

서하는 그 생각을 하면서 2학년 7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은 이미 대부분 차 있었다. 학생들이 자기 자리에 앉아 필기구를 정렬하고 있었다. 준혁이 가장 먼저 서하를 봤다. 시우도 서하 쪽을 한 번 봤다가 다시 자기 시험지 봉투를 쳐다봤다.

"왔네." 준혁이 말했다.

"응."

"잤어?"

"다섯 시간. 너는?"

"네 시간." 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서하는 자리에 앉으면서 책상 위에 필기구를 가지런히 놓았다. 책상 옆에는 개인 물병 하나. 시험 중에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


시험 시작 10분 전.

감독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수능과 같은 절차로 진행했다. 주의사항 낭독. 시계 설정 확인. 신분 확인. 시험지 봉투 뜯는 시각 고지.

"국어 시험 시작 8시 40분. 시험 시간 80분. 답안지 회수 10시 00분. 화장실은 중간에 갈 수 없습니다. 시험 중 이상 신호는 손을 들고 알리세요."

서하는 연필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손에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닦아낼 종이는 없었다. 교복 바지에 슬쩍 비볐다.

민재가 지금 어느 고사실에 있을지 잠시 생각했다. 민재는 3월 학평 전교 1등이었으니까, 아마 1번 고사실의 1번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채린은 학생회 부회장이니까 별도 공간에서 시험을 볼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마 일반 고사실에 있을 것이었다. 정유진은 어디에 있을지 서하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정시파도 수시파도 무소속도, 같은 책상에 앉아서 같은 시험지를 기다리고 있구나.'

감독 선생님이 시험지 봉투를 뜯기 시작했다.

"시험지 배부합니다. 받은 즉시 시험지 위에 인쇄된 과목명과 자기 자리가 맞는지 확인하세요."

서하가 시험지를 받았다. 시험지 맨 위에 '2026학년도 6월 모의평가 국어'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출제'라는 문구도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서하는 그 작은 글씨를 한 번 쓰다듬듯 봤다.

'이게 내가 처음 보는 평가원 문제구나.'

시험 시작 종이 울렸다.

"시작."


서하의 국어 시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화법과 작문 파트가 먼저 나왔다. 지문이 평이했다. 서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빠르게 풀었다. 화법과 작문은 11분 안에 마쳤다. 문법으로 넘어갔다. 문법은 1등급이 출제자 의도를 읽을 수 있는지 여부로 갈린다는 게 서하의 감이었다. 서하는 한 문제에서 5초 정도 멈췄다가 답을 골랐다.

독서. 가장 긴 지문이었다. '경제학에서의 정보 비대칭과 역선택 문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문이었지만 유형은 익숙했다. 지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시간 관리가 어려운 종류였다. 서하는 지문을 한 번에 집중해서 읽었다. 문단 사이 관계를 기호로 표시하면서.

독서를 마쳤을 때 시계를 확인했다. 40분 경과. 남은 시간 40분. 문학과 남은 문제들이 약 17문제 있었다. 평소 속도라면 여유 있었다.

문학 현대시. 처음 본 시였다. 지문 안에 '관점의 이중성'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서하는 그 구절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구절 자체가 아니라, 그 구절이 오늘의 자기 상황과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느낌을 넘기고 문제에 집중했다.

고전 소설. 『춘향전』 계열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후기 한문 단편이었다. 서하는 한문 번역본 지문을 두 번 읽고 인물 관계를 정리했다.

마지막 문제 — 비문학 파트 '자연과학' 융합 지문. 빅뱅 우주론과 암흑물질에 관한 지문. 여기서 서하가 처음으로 손이 멈췄다.

질문 하나가 특이했다. 지문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은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지 묻는 문제였다. 보기 다섯 개 중에 세 개가 매력적이었다. 서하는 1번 보기에 연필을 댔다가 뗐다. 3번 보기에 연필을 댔다가 뗐다. 4번 보기도 일리가 있었다.

'시간이 없어.'

서하는 시계를 봤다. 남은 시간 7분. OMR 마킹 시간을 3분 잡으면, 이 문제에 쓸 수 있는 시간은 4분.

서하는 지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한 구절에 집중했다. '우주의 95퍼센트는 관측되지 않는다.' 이 한 구절이 문제의 키였다. 관측되지 않는 것에 대한 추론은 '부재의 증거'로 이루어진다는 게 지문의 논리였다.

서하는 4번 보기를 골랐다.

OMR 마킹. 1번부터 45번까지. 서하는 마킹하는 동안 혹시 뭔가를 잘못 밀려 썼는지 두 번 확인했다. 마지막 확인을 마쳤을 때 종이 울렸다.

"연필 놓고, OMR 확인 후 왼쪽 상단에 올려놓으세요."


국어 시험 후 쉬는 시간.

서하는 교실 밖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다음 시험 — 수학 — 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준혁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독서 4번 지문 괜찮았어?"

"괜찮았어. 마지막 비문학 추론 문제가 어려웠어."

"어. 나는 거기서 막혔어. 시간 다 써서 찍었어."

"뭐 찍었어?"

"3번."

서하는 잠깐 생각했다가 말했다.

"나는 4번 골랐어. 나도 확신은 아니었어."

서하는 다른 과목 학생들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시험 사이에 다른 과목 애들의 자가채점 소리를 들으면 집중이 흔들렸다.


수학 시험.

수학은 서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과목이었다. 그러나 6월 모평의 수학은 3월 학평과 다르다는 게 민재의 말이었다. 수능과 동일한 난이도로 출제된다고 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서하는 평소 페이스로 1번부터 순서대로 풀었다. 21번까지가 객관식, 22번부터 30번까지가 주관식.

13번 문제에서 서하가 처음 멈췄다. 함수의 연속과 미분가능성을 동시에 묻는 문제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3분 안에 풀리는 유형이었는데, 오늘 것은 조건이 두 개 더 붙어 있었다. 서하는 5분을 썼다. 풀렸다.

15번 — 수열의 합. 표준 유형. 2분.

21번 — 킬러급. 기하와 대수의 교차. 서하는 이 문제를 건너뛰고 22번 주관식으로 먼저 넘어갔다.

주관식을 빠르게 마치고 다시 21번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시간 23분. 서하는 21번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보조선을 그렸다. 어떤 보조선은 틀렸고 어떤 보조선은 맞았다. 서하는 맞는 보조선 하나를 찾고 난 뒤 7분 만에 답을 구했다. 답을 OMR에 표시했을 때 남은 시간 13분.

29번, 30번 주관식 킬러.

29번은 함수 그래프의 개형 문제였다. 서하는 그래프의 변곡점을 두 번 계산했다. 답이 나왔다. 확신 90퍼센트.

30번은 6월 모평의 진짜 킬러였다. 수열의 귀납적 정의와 경우의 수를 융합한 문제. 서하는 문제를 두 번 읽었다. 글자가 머릿속에서 다시 배열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5분. 이거 못 풀면 다음 킬러는 9월 모평.'

서하의 손이 연필을 잡은 채로 한 번 떨렸다. 떨림을 참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냥 풀이를 시작했다. 첫 항, 둘째 항, 셋째 항. 규칙을 찾는 데 2분. 경우의 수 계산 2분. 마지막 1분에 답을 구했다. 답을 OMR에 표시한 직후 종이 울렸다.

"연필 놓고, OMR 확인 후 왼쪽 상단에 올려놓으세요."

서하는 연필을 내려놓고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번엔 시험 중의 떨림이 아니라, 끝난 뒤의 떨림이었다.


점심시간.

서하는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세 개와 계란말이. 학교 급식은 먹지 않는 날이었다. 6월 모평일엔 학교가 자체 급식을 제공했지만, 시험 중간에 속이 불편해질 수 있어서 도시락을 가져오는 학생이 많았다.

준혁도 도시락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시우는 오늘 시험장이 같은 복도의 다른 고사실이었다. 준혁이 시우에게 괜찮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답장이 늦게 왔다.

[영어까진 잘하고 있어요. 수학은 다섯 문제 풀었어요.]

준혁이 그 답장을 서하에게 보여줬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문제면, 어제보다 세 문제 더 풀었네."

"어제요?"

"중간고사 수학 때 다섯 문제였어."

"아."

시우는 어제보다 오늘 세 문제를 더 푼 게 아니라, 지난 번 중간고사와 똑같이 다섯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서하는 그걸 '세 문제 더 푼 거'라고 말했다. 준혁은 그 의도를 알아들었다. 시우가 같은 다섯이어도, 오늘은 정유진과 함께 있다는 것과, 형에게 문자로 먼저 '영어 잘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은 다섯이 아니었다.


오후 시험 — 영어와 탐구 — 은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됐다.

영어는 서하가 듣기 평가에서 초반 세 문제를 빠르게 잡고, 중반부 긴 지문에서 시간을 아꼈다. 마지막 빈칸추론과 어휘 문제에서 한 번 막혔지만, 확신 없는 답을 내려놓고 마킹했다.

탐구는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를 선택한 서하에게 생윤에서 두 문제가 어려웠다. 사문은 상대적으로 평이했다.

모든 시험이 끝난 건 오후 5시 조금 전이었다.

감독 선생님이 마지막 종례를 하고 교실에서 나갔다. 학생들이 긴장한 손으로 시험지를 가방에 넣었다. 교실 안에 침묵이 짧게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진 건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야, 수학 21번 답 3번이지?"

교실 안이 갑자기 술렁였다. 자가채점 배틀이 시작된 것이었다. 학생들이 휴대폰을 꺼내 네이버에 올라온 문제 해설을 찾거나, 서로의 답을 맞춰 보기 시작했다. 자가채점 기준의 원점수가 돌기 시작했다.

'빠르다.'

시험 종료 5분 만에 교실 안에서 대강의 '원점수 표'가 돌고 있었다. 누가 만점에 가까운지, 누가 어느 과목에서 밀렸는지, 대략적인 분위기가 잡혔다.

서하는 자가채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 하면 집에 가서 다시 봐야 하고, 다시 보면 흔들릴 수 있었다. 서하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누군가 서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혁이 복도에서 서하를 따라왔다.

"서하야. 잠깐."

"왜."

"교실에서 이미 네 얘기 돌아."

"내 얘기?"

"응. 수학 확인하고 있던 애가 말했어. '전학생 윤서하 원점수 봤다. 수학 거의 만점인데?' 그 애가 너 자가채점 하는 거 본 게 아니고, 네 옆자리에서 네가 마킹한 OMR 번호 중 몇 개를 외웠대. 30번 답이 네가 마킹한 것과 같대."

"30번 답이 뭐였는데."

"인터넷에 방금 올라온 해설이 네가 마킹한 숫자랑 같아."

서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자가채점은 집에 가서 할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

"안 물어봐도 돼. 근데 한 가지만 말할게. -네 원점수가 지금 이 학교 6월 모평 상위권에 있어-."


서하가 교실 옆 복도를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민재가 걸어왔다.

민재의 얼굴은 시험 전과 달라 보였다. 표정은 같았지만, 안경을 쓰고 있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평소 민재는 안경 다리를 귀에 정확히 고정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민재의 안경은 평소보다 반 밀리미터 정도 내려와 있었다. 눈이 흔들리는 걸 숨기려 안경을 여러 번 만진 흔적이었다.

민재가 서하 앞에서 멈췄다.

"윤서하."

"응."

"네 수학 30번, 답이 뭐였어?"

서하는 잠깐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의 질문은 공격이 아니었다. 그냥 질문이었다. 같은 시험을 친 수험생이 같은 시험을 친 수험생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질문이었다.

"…말해도 돼요?"

"말해줘."

서하가 숫자를 말했다. 민재가 안경을 한 번 올렸다가 내렸다.

"나도 그거였어."

"아."

"그리고 29번은?"

서하가 숫자를 말했다. 민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도 그거였어."

"…"

민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서하를 다시 쳐다보면서 말했다.

"윤서하. 오늘 네가 수학 몇 점인지는 네가 집에 가서 자가채점하면 알겠지. 근데 내가 지금 확실하게 아는 건, 너는 오늘 6월 모평에서 정시파 부수장 자리에 앉을 숫자를 찍었다는 거야. 내 옆에 앉을 수 있어. 네가 원하면."

민재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근데 하나만 알아둬. 네가 그 자리에 앉으면, 그건 -내 자리 옆에 앉는 게 아니라, 내 자리를 위협하는 자리-야.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오늘부터 내가 너한테 가지는 감정은 회유가 아니라 경쟁이야-."

"경쟁이 뭐가 달라요?"

"회유는 '네 편이 되고 싶어'고, 경쟁은 '네가 너의 편이 되어도 나는 너를 이기고 싶어.'" 민재가 짧게 말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오늘부터 너를 -정시파 1등 경쟁자-로 봐."

"저는 정시파 멤버도 아닌데요."

"멤버가 아니어도 경쟁은 돼. 사람이 혼자 시험을 쳐도 옆 수험장 애를 이기고 싶은 게 사람이야. 멤버십은 이 감정을 관리하는 형식이지, 감정 자체를 만드는 게 아니야."

서하는 민재의 그 말을 잠깐 곱씹었다. 민재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기 방어를 벗어내야 했는지 느껴졌다. 민재에게 '나도 내가 이기고 싶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어제까지의 민재에겐 허락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강민재."

"응."

"오늘 나한테 이 말 한 거, 고마워요."

"고마워할 건 아니야. 내일부터 너는 -이 학교의 모든 시선을 받는 위치-가 돼. 오늘 너는 그걸 각오해야 해."

민재가 먼저 돌아서서 걸어갔다. 서하는 민재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민재의 어깨가 평소보다 약간 내려가 있었다. 쓰러진 어깨가 아니라, -짐이 조금 달라진 어깨-였다.


복도 반대편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다가왔다.

박채린이었다.

"서하야."

"…예상했어요. 오늘 당신이 여기 올 거라는 거."

"예상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

"예상해도 할 말은 달라지지 않아요."

채린이 옆으로 서서 창밖을 봤다. 중앙 복도의 유리창 밖으로 5월 말의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6월 초였지만 날은 아직 덜 더웠다.

"서하야. 너 오늘 6월 모평에서 정시파 상위권 원점수를 받았다는 소문이 이미 수시파 쪽에도 돌아. 내가 학생회 부회장이라 제일 먼저 들어."

"소문은 틀린 소문이에요. 아직 자가채점도 안 했어요."

"소문의 숫자가 정확하든 아니든, 소문의 무게는 실재해." 채린이 여전히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네가 내신 1.8에 6월 모평 원점수 상위권이면, 너는 -이 학교의 가장 비싼 카드-가 돼. 학종으로 서울대 자유전공 라인 가능하고, 정시로도 서울대 상위 학과 가능한 위치. 이런 카드는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야."

"아까 민재도 비슷한 말 했어요."

"알아. 민재는 널 경쟁자로 정의할 거고, 나는 널 -자원-으로 정의할 거야."

"자원이라고요?"

"자원." 채린이 마침내 서하를 돌아봤다. "나는 오늘부터 수시파 내부에서 너를 공식 '타겟 카드'로 공지할 거야. 수시파 전원이 너를 영입하기 위해 움직일 거야. 선생님들까지 동원해서."

"아까 점심시간 계단실에서 '반칙해서 너한테 경고했다'고 했잖아요."

"어제까지는 반칙이었고, 오늘부터는 공식이야." 채린이 말했다. "네가 어젯밤 지하 도서관에서 세 번째 자리를 만들고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아침에 알았어. 정유진이 네 쪽으로 간 거. 그리고 너는 이미 파벌 구조 밖에서 대안을 만들고 있어. 그게 이 학교에 -실제로 위험한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카드라는 걸, 나도 오늘 인정했어."

"그래서요?"

"그래서 나는 너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끌어당길 거야-." 채린이 말했다. "파벌 밖에서 네가 만드는 세 번째 자리를, 수시파 내부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너를 수시파 무소속 '포용 사례'로 포장하는 거지. 홍보용 카드로."

"그건 제가 아니에요."

"당연히 네가 아니지." 채린이 처음으로 미소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근데 이 학교에선 '진짜 너'가 뭔지보다 '포장된 너'가 뭔지가 더 힘이 세. 나는 너를 포장할 준비가 되어 있어. 너를 아낀다는 말은 아니야. 근데 너를 이 학교 수시파의 전략적 카드로 쓸 준비는 되어 있어."

"박채린."

"응."

"당신, 왜 나한테 이걸 전부 설명해주는 거예요? 공격할 거면 그냥 공격하면 되잖아요."

채린이 한참 말이 없었다.

"…어제 계단실에서 내가 한 말, 기억나?"

"'내가 너한테 질투하는 거 같아서' 그 말요?"

"응.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해. 나는 지금도 너한테 질투해. 근데 내 질투는 내 일이고, 내 움직임은 이 학교의 수시파 부회장으로서의 일이야. 오늘 네가 6월 모평 상위권이라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두 사람이 됐어. 하나는 너한테 질투하는 박채린, 하나는 너를 공격해야 하는 박채린. -두 번째 박채린이 첫 번째 박채린한테 '그 애한테 예의는 지키자'라고 말한 거야-."

서하는 한참 채린을 쳐다보았다.

"그 예의 때문에 지금 당신이 여기 있는 거예요?"

"응."

"고마워요. 오늘의 예의."

채린이 아주 짧게 웃었다.

"내일부터는 예의 없어."

"알아요."

채린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서하는 복도에 한참 혼자 서 있었다.


서하는 지하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저녁 6시 30분. 도서관 안에는 준혁과 시우, 그리고 정유진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우는 오늘 시험 끝나고 한 번도 교실 벙커에 가지 않고 바로 여기로 왔다고 했다. 정유진은 책상에 영어 듣기 문제집을 펴두고 있었다. 서하가 들어오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형." 시우가 먼저 말했다. "왔어요?"

"응."

"자가채점 했어요?"

"아직."

"왜 안 했어요?"

"하면 무너질 거 같아서."

시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형이 왜 무너져요? 형 잘 봤다고 민재 선배가 그랬다는데요."

"잘 본 것도 무서워. 잘 본 숫자가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순간이 있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알 필요 없어." 서하가 시우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자가채점 안 할 거야. 오늘은 너희들이랑 여기 앉아 있는 게 제일 큰 일이야."

정유진이 노트북을 덮으면서 물었다.

"형. 오늘 아까 제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뭐?"

"수시파 학생회 내부 긴급 공지. '전학생 윤서하에 대한 내부 방침은 오늘 저녁 부회장 박채린의 결정에 따른다'는 문자가 30분 전에 돌았어요. 수시파 간부 전원에게요."

서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박채린이 방금 복도에서 나한테 직접 말했어. 내일부터 나를 '타겟 카드'로 공지한대."

"타겟 카드요?" 정유진이 되물었다.

"수시파 전원이 나를 영입하러 움직인다는 뜻이야. 선생님까지 동원해서."

정유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 저는 그 움직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요. 제가 어제까지 학생회 학종 보조였으니까요."

"어떻게 진행돼?"

"첫째, 교사 라인 압박. 수시파에 연결된 교과 선생님들이 형한테 '학종 가능한 주제 탐구 해보겠냐'고 제안할 거예요. 거절하면 그 선생님 수업 시간에 세특 기재가 점점 짧아져요. 둘째, 선배 라인 접근. 수시로 서울대 간 3학년 선배가 형한테 '경험담 공유해주겠다'면서 접근할 거예요. 셋째, 학부모 라인. -형 부모님한테 학교 측에서 '학생이 전학생이라 학종 설계가 필요하다'고 연락할 거예요-. 이건 형이 막을 수 없어요."

서하는 잠시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부모님까지?"

"네. 부모님을 통해서 학생을 움직이는 게 이 학교 수시파의 가장 강한 무기예요. 박채린 부회장이 쓰는 방식이기도 해요."

서하는 책상 위 손등을 한 번 만졌다. 땀이 식어 차가웠다.


밤 9시.

서하가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거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야. 잠깐."

거실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앞 탁자 위에는 휴대폰이 한 개 있었다. 액정에 통화 종료 시간이 찍혀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

"…어디서요?"

"2학년 학년부장 선생님이라고 하셨어. 다음 주 토요일에 학교에서 '학종 설계 학부모 설명회'가 있는데, 전학생 부모님들 대상으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셔. 너도 학생 신분으로 참석해야 한다고."

서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 설명회에 저는 안 가도 돼요."

"왜?"

"제가 아직 학종을 준비할지 안 할지 정하지 않았어요. 학교는 저한테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준비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잠시 탁자 위의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서하야. 네 선생님이 오늘 나한테 한 가지를 더 말했어. '이번 6월 모평에서 서하 원점수가 아주 좋을 것 같다'고. '이 정도 실력이면 수시 학종 서울대 자유전공 라인 가능하다'고. '부모님이 옆에서 방향을 잡아주시는 게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학년부장님이 그 말을 했다고요?"

"응."

서하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아버지. 정유진이라는 애가 저한테 오늘 말했어요. 수시파는 학생이 아니라 부모님을 통해서 움직인다고. 오늘 저녁 6시 30분쯤에요."

"…학년부장 전화 온 게 몇 시였는데." 아버지가 확인 해봤다. "8시 12분이었네."

"수시파 부회장이 저한테 '내일부터 타겟 카드로 공지한다'고 한 시간은 5시 30분쯤이에요. 세 시간 만에 학교에서 아버지한테 전화 왔어요."

아버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서하야. 네가 오늘 학교에서 뭘 겪었는지 선생님이 완전히 투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느꼈어. 근데 나는 네 아버지이기 전에 어른이고, 어른은 아이가 겪는 일을 추정하는 게 직업 중 하나야. 지금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은 이거야."

"뭔데요."

"네가 선택해."

"네?"

"학교가 나한테 전화했을 때, 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어. 하나는 '네, 서하 방향 잡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 하나는 '서하한테 먼저 물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 나는 두 번째를 선택했어. 그게 아빠로서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서하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울 여유는 없었지만 눈물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고마워요."

"고마워할 것 없어. 네 선택을 네가 한다는 건, 네가 결과도 책임진다는 거야. 책임은 부모가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부모가 덜어주는 거야. 오늘 내가 너한테 덜어준 건 '선택권 하나'야. 그 하나를 내가 너한테 넘겼어."

서하는 소파 앞에 잠시 앉았다.

"아버지. 저 그 설명회 안 갈 거예요."

"왜?"

"제가 설명회에 가면, 저는 수시 방향 설정에 이미 동의한 사람으로 기록돼요. 그건 지금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방향을 원해?"

"-아직 모르는 방향-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월요일에 학년부장한테 전화해서, '서하는 아직 방향을 선택 중입니다. 설명회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전할게."

"네. 고마워요."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네."

"네가 오늘 모의고사 잘 본 건 맞지?"

서하는 자가채점을 아직 안 했지만, 오늘의 느낌은 알고 있었다.

"잘 본 것 같아요."

"그럼 너 본인이 그 숫자를 어떻게 쓸지는 네가 정해. 근데 아빠는 이거 하나만 말할게. -네가 잘 본 시험이, 다른 사람이 정한 길의 증거로 쓰이게 하지 마-. 그 시험은 네 시험이니까."

서하는 숨을 한 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 11시. 서하의 방.

서하는 책상 앞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밤은 자가채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얘기한 뒤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서하는 네이버에 올라온 해설을 열었다. 국어, 수학, 영어, 탐구. 한 과목씩 자가채점을 했다. 채점을 마치는 데 40분이 걸렸다.

국어 원점수 96. 수학 원점수 96. 영어 1등급 예상. 탐구 평균 80대 후반.

서하는 원점수를 적어놓은 종이를 한참 쳐다봤다. 이 원점수가 표준점수나 백분위로 변환되면 어떤 숫자가 될지, 서하는 아직 예측할 수 없었다. 평가원 성적표는 시험 후 약 4주 후에 공식 발표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가채점 단계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원점수는 한영고 기준으로 상위권이었다. 민재가 말한 '정시파 부수장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숫자였고, 채린이 말한 '서울대 학종 자유전공 가능선' 숫자였다.

서하는 그 종이를 접어서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다른 것을 썼다.

'두 개의 성적표 = 두 개의 자리 = 두 개의 조명' '나는 그 두 개의 조명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조명이 없는 자리를 만든다.' '조명이 없는 자리는 어둡지만, 내 자리다.' '시우, 준혁, 정유진. 그리고 나.' '세 번째 자리는 지하 도서관. 창문 위로 담쟁이덩굴.'

서하는 메모지를 접어서 그 원점수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밤 11시 40분.

서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 한 통.

[발신: 박채린] [오늘 저녁 복도에서 한 말, 내일부터 공식이야. 예의 없음. 그리고 하나 더. 네 아버지한테 오늘 학년부장님이 전화드렸을 거야. 그거 나야. 내가 부탁드린 거.]

서하는 그 문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채린이 자기가 한 일을 서하한테 알려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공격자는 보통 자기 움직임을 숨긴다. 채린은 숨기지 않았다.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예요?] 서하가 답장을 보냈다.

답장이 왔다.

[내가 내일부터 예의 없이 움직일 거라는 걸 너한테 한 번 더 확인시켜주려고. 그리고—]

[그리고?]

[네가 이걸 피할 방법을 오늘 밤 안에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

서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한참 쳐다보았다.

'내가 이걸 피할 방법?'

오늘 아버지가 말한 '서하 본인이 그 숫자를 어떻게 쓸지는 네가 정해.' 그 말이 답이 될 것 같았다. 서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했다.

'두 개의 성적표를 다 가진 카드는 두 개의 세력에 다 팔릴 수 있어. 근데 팔리지 않는 카드가 되는 방법은 하나야. -카드를 공개하는 거야-. 공개된 카드는 독점할 수 없거든.'

서하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한 가지를 생각했다.

'내일 아침 복도에서, 다시 한 번 서야겠다.'

이번엔 지난 번처럼 '선언'을 위해 서는 게 아니었다. 이번엔 '공개'를 위해 서는 거였다. 6월 모평의 원점수가 아직 소문 단계일 때, 서하가 직접 그 소문을 공개해버리면, 수시파도 정시파도 그 카드를 독점할 수 없게 되는 거였다.

서하는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6월 첫째 주 밤공기가 창틀 아래로 가볍게 들어왔다. 대치동 쪽 학원 건물 하나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 다른 학교의 고2 학생들이 지금도 평가원 모평의 자가채점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고2들이 오늘 같은 시험지를 받았다. 그중 한 명이 서하였다.

'오늘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서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