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첫날 아침, 학교의 공기가 달랐다.
서하가 정문을 지나는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평소보다 20분 빨랐다. 그래도 정문 앞에는 이미 학생들이 줄지어 있었다. 복도에 들어섰을 때 서하는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복도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침 복도는 작게라도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가 깔려 있었다. 오늘은 발소리만 들렸다. 신발이 바닥을 찍는 소리, 가방 지퍼 소리, 그리고 아주 가끔 누군가 교복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중얼거리며 외우는 소리. 누구도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수시파의 심판의 날이구나.'
수시파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면서 마지막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는 학생도 보였다. 한 여학생은 화장실 앞에 앉아서 필기노트를 무릎에 올린 채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다. 서하는 그 학생을 잠깐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맞추면 방해가 될 것 같았다.
C동 7반 교실 앞에서 서하가 멈췄다. 교실 안에서 준혁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혁이 서하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왔네."
"응."
"어제 밤에 잘 잤어?"
"전혀."
준혁이 작게 웃었다.
"그래도 와줘서 고마워." 서하가 앉으면서 말했다.
"뭐가."
"어제 아침에 나 혼자 중앙 복도 간다고 했는데, 너가 같이 와준 거."
"아." 준혁이 이어폰을 한쪽 귀에서 빼면서 말했다. "그거 별 거 아니야. 나도 너 옆에 있으면 오늘 내 자리가 생길 거 같아서 간 거야."
"이기적이네."
"서로가 서로한테 이기적인 이유로 옆에 있는 게, 의리보다 더 오래 가."
2교시는 국어였다.
중간고사 첫 과목. 교실 앞 칠판에 '1학기 중간고사 국어 50분 / OMR / 서술형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감독 선생님이 들어와서 시험지를 뒤집어 돌렸다.
"시작."
서하는 시험지를 펴고 첫 페이지를 읽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시험 범위 내용은 서하가 전학 오기 전에 이미 공부한 내용이었는데, 한영고 내신 시험에는 '학교 자체 출제 지문'이 섞여 있었다. 그 자체 출제 지문은 수업 중에 선생님이 짚어준 자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서하는 그 자료를 본 적이 없었다.
서하는 잠깐 연필을 멈췄다.
'족보가 있는 시험이구나.'
한영고 학생들 사이에는 암암리에 내신 족보가 돌고 있다는 걸 서하는 어제 알았다. 수시파 학생회 내부에서 족보를 공유하고, 정시파는 내신 족보를 무시하는 대신 모의고사 기출을 공유한다고. 서하는 어느 족보도 받지 못했다.
'모르는 건 찍지 말고 풀 수 있는 문제부터.'
서하는 첫 페이지의 익숙한 문학 작품 문제부터 풀었다. 황석영 단편. 서하가 대전에서 이미 한 번 다룬 작품이었다. 익숙한 질문이 나왔고, 익숙한 답이 나왔다. 다음 문제, 다음 문제.
그러다 중반쯤에서 손이 멈췄다.
'사제 출제 비문학 지문 — 한국 전통 건축의 공간 구성.'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문학 지문은 모의고사에서 수없이 풀어본 유형이었다. 서하는 지문을 두 번 읽고, 질문을 세 번 읽었다. 답을 골랐다. 확신은 80퍼센트였다.
'이게 이번 시험의 진짜 킬러네.'
옆 줄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그 문제에서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서하의 앞 학생이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드는 게 보였다. 수시파 학생들이었다. 족보에는 있는데 답이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족보에 없는 자체 출제라 당황한 건지, 서하는 알 수 없었다.
서하의 왼쪽 두 줄 건너에 시우가 앉아 있었다. 2학년 5반이 아니라 왜 7반에 앉아 있는지 서하는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 기억이 났다. 중간고사는 학급 단위가 아니라 고사실 단위로 재편성됐다. 출석 번호 순서로. 시우는 2학년 5반이지만 서하와 같은 고사실이었다.
시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연필이 OMR에서 위치를 못 찾는 것 같았다. 시우가 한 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가 다시 시험지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서하는 자기 시험지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애는 오늘이 마지막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서하는 그 생각을 잠깐 하고 다시 문제에 집중했다. 종이 울렸을 때 서하는 마지막 문제까지 답을 마친 상태였다. 확신 80퍼센트인 문제가 세 개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 있었다.
"연필 놓고, 시험지 뒤집어."
쉬는 시간에 서하가 복도에 나가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수시파 학생 대여섯 명이 복도 구석에 모여 있었다. 한 명이 종이를 흔들면서 나머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서하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잠깐 귀로 들었다.
"3번 문제, 답이 2번 아니라 4번 맞지? 족보에는 2번으로 나와 있는데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이건 함정 많은 유형'이라고 세 번이나 말했잖아. 그때 필기한 사람들은 4번 맞춘 거야."
다른 학생이 말했다.
"씨발, 나 2번 찍었어."
"나도."
"2번이면 두 개나 날아간다고. 내신 1등급 컷이 여기서 결정되는 거 아냐?"
서하는 그 소리를 등 뒤로 지나쳤다.
'족보에 답이 잘못 나와 있는 문제가 있었네. 족보 없는 게 오히려 나았던 건가.'
복도 반대편에는 정시파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중간고사 시험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들끼리 모의고사 문제집을 펴놓고 이번 주말에 풀 6월 평가원 대비 기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2022학년도 6월 기출 풀어볼래?"
"어. 근데 나 지금 독서 지문이 계속 막혀. 한 지문당 15분씩 걸려."
"15분이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나는 한 지문 17분 걸릴 때도 있어."
정시파 학생들에게는 오늘이 중간고사 첫날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달력에는 다른 날짜가 찍혀 있었다. 6월 첫째 주, 평가원 6월 모평.
서하는 복도 한가운데 서서 잠깐 양쪽을 번갈아 봤다.
'정말 두 개의 학교야.'
3교시는 수학이었다.
수학 시간에 일이 터졌다.
시험지를 받고 10분쯤 지났을 때, 감독 선생님이 자리를 일어섰다. 선생님이 서하 쪽 줄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 학생 앞에서 멈췄다.
서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감독 선생님이 자리 앞에서 멈추는 건 두 가지 이유였다. 컨닝 의심이거나, 학생이 이상 증상을 보이거나. 서하의 자리에서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눈만 살짝 돌려 대각선 뒤쪽을 흘깃 봤다.
시우였다.
시우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손이 축 늘어져 있었고, 연필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감독 선생님이 시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얬다.
"선생님."
시우의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화장실 가도 돼요?"
"한 번 허락하면 다시 들어올 수 없어요. 시험 시간이잖아요."
"그럼…"
시우가 연필을 주웠다.
"괜찮아요. 계속 할게요."
감독 선생님이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하는 다시 자기 시험지를 보았다. 수학 문제 하나가 눈앞에 있었는데 글자가 읽히지 않았다. 서하는 한 호흡 깊게 쉬고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호흡. 읽혔다. 풀었다.
시험 종료 5분 전, 서하는 마지막 문제를 마쳤다. 답지에 OMR 표시를 할 때, 대각선 뒤에서 작은 소리가 또 들렸다. 시우가 책상에 다시 엎드리는 소리였다. 이번엔 감독 선생님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이 울렸다.
"시험지 뒤집어."
서하는 연필을 내려놓고 자기 시험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우는 아직 엎드려 있었다. 감독 선생님이 시우 옆에 가서 조용히 말했다.
"한시우 학생, 일어나. 시험 끝났어."
시우가 일어섰다. 얼굴이 흰색을 넘어서 푸른색 가까이 갔다. 시우는 자기 시험지도 뒤집지 않은 채 그냥 교실 뒤쪽 문으로 걸어 나갔다. OMR 카드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갔다.
감독 선생님이 한숨을 쉬면서 시우의 OMR을 거둬 갔다.
서하는 그 OMR 카드를 잠시 쳐다보았다. 거기엔 답이 다섯 개 정도밖에 체크되어 있지 않았다. 30문제 중에 다섯 개.
점심시간. 급식실.
서하는 급식실에 가지 않았다. 준혁과 함께 C동 1층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다. 두 사람은 편의점 옆 작은 야외 벤치에 앉았다.
"시우 봤어?" 준혁이 물었다.
"봤어. 수학 시험 중간에 엎드려 있었어. 다섯 문제 정도밖에 못 풀었을 거야."
"아."
준혁이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
"시우 걔, 이번 시험 망하면 수시는 완전히 끝나. 3월 학평 120등이라 모의고사 등수도 이미 낮아서 정시파 내부에서도 위치가 없고, 이번 중간고사로 내신마저 무너지면 수시파도 못 가."
"양쪽 다 문이 닫히는 거네."
"응." 준혁이 잠시 씹으면서 말했다. "한영고에선 두 개의 문이 닫힌 학생한테 세 번째 문은 없어."
서하는 자기 삼각김밥을 반쯤 먹다가 내려놓았다.
"준혁아."
"응."
"이 학교에 지하 공간 있어?"
"지하?"
"응. 평소에 아무도 안 가는 지하 공간."
준혁이 잠깐 생각했다.
"지하 1층에 도서관 있긴 해."
"도서관?"
"응, 옛날엔 한영고 열람실이었는데, 10년 전쯤 A동 자습실 생기면서 정시파가 그쪽으로 다 옮겨갔고, 수시파도 B동 토론실이 생기면서 다 옮겨 갔어. 지하 도서관은 그 이후로 거의 비어 있어. 청소 아주머니도 1주일에 두 번만 가고, 선생님들도 거기 안 가. 사서 선생님은 한 분 계시긴 하는데 점심시간엔 매점 쪽에 계시고."
"한번 가보자."
"점심시간에?"
"지금."
준혁이 조금 놀라 서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따라와."
지하 1층.
계단을 두 층 내려가자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위층보다 조금 시원했고, 공기에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복도 끝에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에서 사람 기척이 없었다.
서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형광등이 천장에서 네 개 정도 깜빡이고 있었다. 가장 안쪽 하나는 아예 꺼져 있었다. 공간이 넓지는 않았다. 교실 두 개 합친 크기 정도. 책장이 벽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고, 가운데에 긴 책상이 네 개 있었다. 책상마다 의자가 여섯 개씩. 의자 몇 개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창문이 있었다. 지하지만 반지하처럼 천장 가까이에 작은 창이 나 있었고, 창밖으로 학교 뒤뜰의 담쟁이덩굴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 5월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서 책상 한쪽에 얼룩처럼 떨어졌다.
"생각보다 안 쓸쓸해." 서하가 말했다.
"안 쓸쓸한 게 아니라, 햇빛이 들어와서 그나마 낫다는 거야." 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서하는 책상 하나에 손을 올렸다. 먼지가 살짝 묻어났다. 책상 위에는 '도서관 이용 규칙'이라는 코팅된 A4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규칙을 읽었다.
1. 도서 대출은 사서 선생님께. 2. 음식물 반입 금지. 3. 도서관 이용 시 학번과 이름을 '이용 기록부'에 기재할 것.
서하는 '이용 기록부'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책장 옆 작은 책상 위에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이용 기록부'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하는 그 공책을 펴보았다.
마지막 기록이 한 달 전이었다. 한 학생이 혼자 이름을 적고 들어왔다 나갔다. 그 전 기록은 두 달 전. 그 전은 석 달 전.
서하는 펜을 들고 오늘 날짜와 자기 이름을 적었다.
'2학년 7반 윤서하 (점심시간).'
그리고 준혁에게 펜을 넘겼다. 준혁이 잠시 망설이다가 자기 이름을 적었다.
'2학년 7반 이준혁.'
두 사람은 책상에 마주 앉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테이블 한쪽에 네모나게 떨어졌다. 빛이 떨어진 자리에 손을 올리자 따뜻했다. 지하인데도 따뜻했다.
"서하야." 준혁이 말했다.
"응."
"너 이 공간을 뭐로 쓰려고?"
서하는 잠깐 창문 쪽 빛을 쳐다보았다.
"숨을 곳."
"숨을 곳?"
"옥상이 잠겼잖아. 그럼 여기가 대체 공간이 될 수 있어. 근데 옥상보다 나은 점이 있어."
"뭐?"
"여기는 문이 열려 있어. 공식적으로 출입 금지가 아니야. 누가 들어와도, 우리가 와도, 이용 기록부에 이름만 적으면 돼. 교장이 여기 자물쇠를 걸려면 '도서관을 폐쇄한다'는 명분이 있어야 해. 그건 옥상보다 훨씬 어려워."
"아."
준혁이 잠깐 말을 멈췄다.
"-야. 너 머리 좋다-."
"머리 좋은 게 아니라 필요해서 그래. 몰린 사람은 생각이 빨라지거든."
서하는 이용 기록부를 다시 덮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오래된 것들이었다. 학교가 예전에 단체 구매한 세계문학전집, 청소년 과학 시리즈, 그리고 문학 잡지 과월호. 책장 가장 아래 칸에 먼지가 쌓인 수능 기출문제집도 한두 권 보였다. 2015학년도, 2016학년도 같은.
"여기서 중간고사 남은 시간 동안 나는 공부할 거야." 서하가 말했다. "족보 없는 공부."
"족보 없이 공부하면 한영고 내신은 어렵지 않아?"
"어려워. 근데 나는 어차피 족보 못 받아. 받아도 오늘 보니까 답이 틀린 문제도 있더라. 그럼 모르는 채로 풀어보는 게 덜 위험해."
준혁이 한참 서하를 쳐다보았다.
"너, 오늘 학교에서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뭐라고?"
"-중간고사 망할 각오로 복도에 섰던 놈-이래."
서하가 작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5교시는 과학탐구. 생윤이었다.
생윤 시험은 수학보다 더 수시파의 전장이었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앞자리 여학생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를 한번 훑은 서하는 이상한 점을 찾았다. 생윤 시험지에 '자체 출제 단원 통합 사례 문항'이 세 문제 섞여 있었다. 시험 범위에 명시되지 않은 방식이었다.
서하는 세 문제를 풀었다. 한 문제는 확신이 있었고, 두 문제는 70퍼센트였다.
시험 종료 5분 전, 서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시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수학 시험 끝난 뒤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시우의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과 후.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중간고사는 금요일까지 있었지만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오늘 본 건 국어, 수학, 생윤. 아직 네 과목이 남아 있었다.
서하는 교실에서 가방을 챙기고 준혁과 지하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도서관 문을 열자 이번엔 안쪽에 사람이 있었다.
긴 책상 중 하나에 한 학생이 앉아 있었다.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하가 천천히 다가갔다.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시우였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콧물이 코 밑에 남아 있었고, 뺨에 눈물이 말라 있었다. 서하가 문 앞에서 멈춘 걸 보자 시우는 눈을 빠르게 닦고 일어서려고 했다.
"…죄송해요. 나갈게요."
"안 나가도 돼." 서하가 말했다.
시우가 멈칫했다.
"내 자리가 아니에요. 여기는."
"여기 아무의 자리도 아니야. 그래서 아무나 와도 돼."
시우가 한참 서하를 쳐다보았다.
"아무나요?"
"응." 서하가 맞은편 의자를 살짝 끌어내고 앉았다. "앉아. 여기."
준혁은 말없이 두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우가 천천히 다시 앉았다. 세 사람이 긴 책상에 삼각형으로 앉게 됐다. 창문 위쪽으로 5월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복도 위쪽에서 희미하게 종이 울렸지만 소리가 먼 동네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맞죠? 어제 중앙 복도에서 그 말 한 사람."
"봤어?"
"아니요. 못 봤어요. 근데 오늘 아침에 학교 와서 복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애들이 '전학생 윤서하가 어제 미쳤더라'라는 얘기만 해요. 선생님들도요."
시우의 목소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말은 또박또박했다.
"형." 시우가 물었다. "저는 어제 형 말을 들었으면, 저도 복도에 같이 섰을 거예요. 근데 저는 어제 아침 조회에 안 갔어요."
"왜?"
"안 가고 싶어서요." 시우가 어깨를 힘없이 올렸다. "저는 2학년 5반인데, 우리 반 담임이 저한테 '한시우, 너는 이번 중간고사 1등급 하나라도 못 잡으면 이번 학기 내에 담임 자리에서 너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서하가 눈을 들었다.
"…-담임이 그렇게 말했어-?"
"네. 지난 주 금요일에요." 시우가 책상 위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제가 저희 반의 '미정'에 가까운 애라는 뜻이에요. 저는 3월 학평 120등이라 정시파 기준으론 자리가 없고, 내신이 평균 3등급이라 수시파 기준으로도 위가 아니에요. 저 같은 애는 담임 평가에 좋지 않아요."
준혁이 서하를 잠깐 쳐다보았다. 서하는 주머니에서 어제 준혁이 준 A4 한 장을 꺼냈다. '2학년 담임 배정 검토 기준 (초안).'
"시우야."
"네."
"너, 이거 봐."
서하가 종이를 펴서 시우 앞에 놓았다. 시우가 그 종이를 읽었다. 4번 항목에서 시우의 눈이 멈췄다.
'학급 내 '미정' 학생 비율 (낮을수록 우대).'
시우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뭐예요?"
"학교 문서." 준혁이 말했다. "교장이 만들고 있는 거야. 아직 초안이래. 근데 우리 아는 선생님 중 몇 명은 이미 이 기준으로 학급 관리하고 있는 거 같아."
"그럼 제가 저희 반 담임한테 그 말 들은 게," 시우가 종이를 눈으로 다시 훑었다. "제가 이상한 애라서 들은 게 아니라, -선생님이 이 기준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거라는 거예요-?"
"그래." 서하가 말했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시스템이 선생님한테 너를 이상한 애라고 부르게 만든 거야."
시우가 종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울었다. 이번엔 소리 내서 울었다. 처음엔 작게, 그러다 점점 크게. 시우가 자기 입을 한 손으로 막았지만 소리를 다 막지는 못했다. 서하는 시우의 울음을 말리지 않았다.
'오늘 이 울음을 여기서 안 울면, 다른 곳에선 못 울어.'
준혁이 책장 쪽으로 일어서서 휴지통 옆에 있는 티슈 한 통을 들고 와 시우 앞에 놓아줬다. 시우가 티슈를 꺼내 코를 풀었다.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어." 서하가 말했다. "시우야,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너 오늘 수학 시험, 다섯 문제만 풀었지?"
"…네."
"왜?"
시우가 한참 말을 못했다.
"손이 안 움직였어요." 시우가 마침내 말했다. "문제를 읽었는데, 다 아는 문제인데, 손이 안 움직였어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이 시험을 백 점 맞아도, 제가 영 점을 맞아도, 아무도 저를 봐주지 않을 거 같았어요. 그러니까 손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어요."
서하는 그 말을 한참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우야, 내일도 시험 있지?"
"네. 영어, 한국사, 지구과학, 사회문화."
"영어는 할 수 있어?"
시우가 잠깐 생각했다.
"영어는 할 수 있어요. 영어는 제가 좋아해요."
"그럼 내일은 영어 하나만 제대로 풀어. 다른 과목은 못 풀어도 돼. 일단 영어만 제대로 풀자. 그 다음 날 한국사, 지구과학. 하루에 한 과목씩."
"그건… 포기하는 거잖아요."
"포기하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포기는 '안 한다'는 거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걸 고르는 건 '뭘 할지 정한다'는 거야. 단어가 달라."
시우가 티슈로 눈을 닦았다.
"형, 저는 형이 누군지도 잘 몰라요."
"몰라도 돼. 그냥 여기 같이 앉아 있는 사람이야."
"여기 매일 와도 돼요?"
"매일 와도 돼."
시우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너무 약하게 웃어서 웃음이라기보단 숨을 길게 내쉰 것처럼 보였다. 서하는 시우의 그 약한 웃음에서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이 지하 도서관이 오늘부터 숨을 곳이구나.'
옥상이 잠긴 다음 날, 지하 도서관이 열렸다. 옥상은 하늘에 가까웠고 지하는 땅에 가까웠다. 하늘에 가까운 공간에선 멀리 학원가의 불빛이 보였고, 땅에 가까운 공간에선 창문 너머 담쟁이덩굴이 보였다. 같은 학교에서 빼앗기고 얻은 두 개의 공간은,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저녁 6시 반.
서하는 지하 도서관에서 교과서를 펴놓고 내일 영어 시험 범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준혁은 맞은편에서 자기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시우는 한 시간 전에 집에 갔다. 떠나기 전에 시우가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다고 했다.
창문 위로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도서관 안은 형광등 네 개 중 세 개만 켜져 있었다. 나가 있는 한 개는 책장 뒤쪽이었다. 서하는 그 꺼진 형광등을 잠시 올려다봤다.
'내일은 저 형광등도 고쳐달라고 사서 선생님한테 말해볼까.'
그때 도서관 문이 열렸다.
서하와 준혁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지원 담임이었다.
담임은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 앞에 그대로 서서 안쪽의 서하와 준혁을 잠시 보았다.
"…서하야."
"네."
"여기 있었구나."
담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서하는 일어섰다.
"선생님."
"앉아. 선생님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서하는 다시 앉았다. 담임은 문 앞에서 한 발짝 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 이용 기록부 있지?" 담임이 물었다.
서하는 책상 위에 올려둔 이용 기록부를 들었다.
"네. 여기요."
"거기 오늘 이름 적었니?"
"적었어요. 저랑 이준혁이랑, 그리고 한시우요."
담임이 잠시 말을 멈췄다.
"서하야."
"네."
"오늘 중에 교장 선생님이 '지하 도서관 이용 기록부 사본'을 요청하실 수 있어. 학교 공식 경로로. 그걸 거절할 권한이 나한테 없어."
서하의 손에 있던 이용 기록부가 잠깐 무거워졌다.
"선생님."
"응."
"선생님이 지금 저한테 이 말을 해주시는 건, 경고예요, 아니면—"
"-아니면 신호야-." 담임이 말했다. "경고는 '조심해'라는 뜻이고, 신호는 '내가 너를 포기 안 했다'는 뜻이야. 오늘 선생님은 두 번째를 하고 있는 거야."
담임이 문을 닫았다. 도서관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서하는 이용 기록부를 한참 쳐다봤다.
오늘 새로 적힌 세 개의 이름. 윤서하, 이준혁, 한시우.
서하는 그 세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찢어냈다. 찢어낸 페이지를 접어서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새 페이지에 같은 날짜로 다시 이름을 적었다. 이번엔 다르게 적었다.
'윤 / 준 / 시 / (중간고사 대비 이용)'
이름은 이니셜로, 용도는 평범한 문구로. 그걸 본 다른 사람은 이 도서관에 세 명의 학생이 중간고사 대비 때문에 왔다고만 해석할 수 있었다. 교장이 이 기록부를 요청해도, 세 명이 누구인지를 여기서는 알 수 없었다.
준혁이 서하가 하는 걸 조용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너 진짜 빠르다."
"빠른 게 아니라, -급해서 그래-."
"-바뀌는 거 있어-."
"뭐?"
"네가 어제 복도에서 섰던 거 말이야. 그거 이후에 너 말투가 바뀌었어."
"어떻게?"
"어제까진 네가 생각하는 걸 말하는 말투였어. 오늘은 네가 행동할 걸 설계하는 말투야."
서하는 잠시 준혁을 보았다.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둘 다일 수 있어. 둘 다 빠르니까."
서하는 찢어낸 페이지를 다시 한 번 만졌다.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바뀌는 거, 이런 느낌이구나.'
밤 9시 반. 집.
서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일 영어 시험 준비를 하려고 교과서를 펴긴 했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의 장면이 반복해서 돌았다. 시우의 떨리는 손. 지하 도서관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5월 햇빛. 담임의 '신호야'라는 목소리. 이용 기록부의 이니셜.
서하는 교과서를 덮고 가방에서 교복 안주머니의 그 찢어낸 페이지를 꺼냈다. 세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서하, 이준혁, 한시우.
서하는 그 세 이름을 한참 쳐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인정했다.
'이건 중간이 아니라, -세 번째-야.'
정시파와 수시파 사이의 중간이 아니라, 정시파와 수시파 바깥의 다른 자리. 중간은 두 점 사이의 어딘가였지만, 세 번째는 선이 아예 달랐다. 서하는 그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완전히 알진 못했다. 다만, 그 차이가 앞으로 이 학교에서 서하와 준혁과 시우가 살아남는 방식을 결정할 거라는 건 알았다.
서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였다.
[발신: 한시우] [형, 내일 아침에 지하 도서관 문 여는 시간이 언제예요? 사서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7시 반부터 연대요. 내일 7시 반에 가도 돼요?]
서하는 한참 그 문자를 보다가 답장을 썼다.
[가도 돼. 나도 7시 반에 갈게. 영어 같이 훑자.]
시우의 답장은 빨랐다.
[네. 고마워요, 형.]
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문 밖 서울의 밤은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것 같았다. 서하는 교과서를 다시 펴고, 내일 아침에 시우한테 같이 훑어줄 영어 범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 시계가 10시를 지났다. 서하는 그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