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서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왼쪽에는 민재가 놓고 간 봉투 안의 3월 학평 답안 복사본. 오른쪽에는 채린이 보여줬던 바인더 첫 장을 서하가 외워서 다시 그린 '세특 전략 초안'의 뼈대.
두 종이는 완전히 다른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하나는 마크시트 기계인쇄, 하나는 서하 본인의 서툰 펜글씨. 그리고 두 종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서로 겉돌고 있었다.
'한쪽을 잡으면 다른 쪽이 사라진다.'
서하는 두 종이를 겹쳐놓지 않았다. 그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벌려 놓았다. 두 종이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이 빈 공간이 내 자리인 것 같은데.'
그 빈 공간은 종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책상의 어느 곳에도 그 자리는 없었다. 서하는 그걸 알면서도 한참 그 빈 공간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미정이라고 말했어. 내일도 미정이라고 말해야 해. 근데 그 말이 점점 무거워지네.'
서하는 책상 위의 종이를 둘 다 가방에 넣었다. 알람을 맞췄다. 창밖은 아직 새까맸다. 서울의 새벽은 지평선이 없었다. 대치동 쪽 어느 건물의 24시간 스터디카페 불빛 하나가 멀리서 깜빡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7시 50분. 중앙 복도.
서하가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민재와 채린이 복도 양쪽에서 다시 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4층 복도 끝의 재연이었다. 이번엔 장소가 달랐다. 중앙 복도, 유리 통로, 양쪽이 A동과 B동으로 갈라지는 바로 그 지점.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이었다. 복도는 가장 번잡했다. 그리고 그 번잡함 한가운데에 민재와 채린이 서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서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서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윤서하." 민재가 먼저.
"서하야." 채린이 뒤이어.
서하가 멈췄다.
민재가 말했다.
"어젯밤에 생각해봤어. 네가 한 말, '두 개 다 내 것이 아닌데.' 그 말이 걸리더라."
"그래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민재가 안경을 닦으면서 말했다. "6월 모평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네가 이번 주 중간고사에서 상위권 찍으면, 정시파 부수장 자리 하나 줄게. 어차피 중간고사는 우리한테 의미 없는 시험이지만, 네 실력을 빠르게 확인할 샘플로는 쓸 만해. 이게 파격 제안이야."
"내신을 의미 없다면서 샘플로 쓴다고요?"
"샘플로만 쓴다고." 민재가 말했다. "진짜 시험은 6월 모평이야. 근데 너한테 -믿음의 표시-가 필요한 거 같아서. 정시파 부수장은 2학년 내부에서 강력한 자리야. 네가 앉으면, 정시파 내부는 너를 보호할 수밖에 없어."
채린이 반대편에서 말했다.
"나도 조건 바꿨어."
"어떻게요?"
"이번 중간고사 전 과목 1등급이면, 수시파 내부에서 학생회 기획 라인 넣어줄게." 채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가진 자원 중에 제일 큰 거야. 학생회 기획 라인은 교장 직속이야. 거기에 네 이름이 들어가면, 세특에 '자율동아리 기획 참여'가 자동으로 한 줄 붙어. 그게 한영고 내부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급 세특 소재야."
"그건 누가 한 일을 나한테 주는 거잖아요."
"그게 수시의 구조야." 채린이 말했다. "이미 있는 활동에 네 이름을 얹는 거. 나쁜 게 아니라, 이 학교 전체가 그렇게 돌아가. 나도 내가 만든 활동이 아닌 곳에 이름 올린 거 많아."
서하는 두 사람을 차례로 봤다.
"민재 씨. 이번 중간고사는 정시파한테 의미 없다며 샘플이라고 부르는 거. 저는 그 말이 이상해요. 정말 의미 없으면 샘플로도 쓰지 마세요. 그냥 6월까지 기다리든가. 6월까지 못 기다리는 건, 내가 6월에 어떤 숫자를 찍을지 당신도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민재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린 씨. 이미 있는 활동에 제 이름을 얹는 거는, 그게 정상인 줄 아는 사람들한텐 정상이겠죠. 저한텐 정상이 아니에요."
채린의 눈 밑이 살짝 굳었다.
서하는 두 사람 사이를 걸어서 통과했다. A동으로도, B동으로도 가지 않았다. 서하 교실은 가운데 복도 너머 C동이었다. C동은 공부 공간이 아니라 1학년과 일부 2학년 교실만 있는 건물이었다. 원래 이름은 '학습관'이지만 학생들은 그냥 '교실동'이라고 불렀다. 파벌이 없는 건물이었다.
서하는 C동으로 들어가면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심장이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1교시 쉬는 시간.
오 담임이 복도에서 서하를 불렀다.
"윤서하, 잠깐 교무실."
서하는 따라갔다. 교무실은 아침 쉬는 시간답게 선생님들로 붐볐다. 담임 자리는 교무실 가장 안쪽이었다. 담임이 의자를 하나 내밀었다.
"앉아."
서하가 앉았다. 담임 책상 위에 '입시 방향 설정 확인서'가 다시 올라와 있었다. 어제 서하에게 준 것과 같은 양식이었다.
"서하야." 담임이 얇은 테 안경을 한 번 올렸다. "어제 네가 '나중에 내도 돼요?'라고 물었잖아. 기억나지?"
"네."
"선생님이 솔직하게 말할게. 그 말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말이야."
"무거운 말?"
"응." 담임이 숨을 한 번 천천히 쉬었다. "이 학교는 방향 설정 확인서를 2학년 1학기 초에 받아. 3월에 한 번 받고, 5월에 한 번 더 받아. 5월에 '미정'에 체크한 학생은 내가 아는 한 지난 3년 동안 다섯 명이 안 돼. 그리고 그 다섯 명 중에 세 명은 2학년 여름방학 전에 전학을 갔어. 한 명은 유학 갔고, 한 명은 자퇴했어."
서하는 조용히 들었다.
"왜 그런 줄 아니?" 담임이 물었다.
"…학교가 지원을 안 해줘서요?"
"그것도 있어. 근데 더 깊은 이유가 있어." 담임이 목소리를 낮췄다. "-2학년 1학기에 방향을 못 정하면, 2학년 내내 자원이 분산돼-. 정시 공부에 시간을 쓰면 수시 세특이 부실해지고, 수시 세특에 시간을 쓰면 모의고사 등급이 떨어져. 둘 다 잡으려는 학생은 둘 다 놓치기 쉬워. 근데 한영고는 그 '둘 다'가 가장 안 통하는 학교 중 하나야."
"왜요?"
"한영고에선 내신도 모의고사도 상위권 싸움이 치열하거든. 강남구의 고등학교는 어디나 비슷하지만, 한영고는 특히 더 그래. 평범한 학교에선 2등급도 잘 나오지만 여기선 2등급도 '아쉬운 등급'이야. 그 환경에서 -둘 다 잡겠다-는 건, 둘 다 놓치는 거랑 비슷한 의미가 돼."
서하는 담임의 책상 위 확인서를 잠시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한테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응."
"선생님은 어느 쪽이에요?"
담임이 잠깐 말을 못했다. 서하는 그 잠깐의 공백에서 담임이 이 질문을 처음 받은 건 아닐 거라는 걸 느꼈다. 다만 이 공백은, 대답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대답을 찾은 적 있는 사람이 그 대답을 다시 숨기는 공백이었다.
"선생님은," 담임이 천천히 말했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어느 쪽이든 학교의 자원 배분 안에 들어가 있어."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담임이 처음으로 서하를 오래 쳐다보았다. 안경알 너머로 담임의 눈이 잠깐 붉어졌다. 그리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담임이 확인서를 서하 쪽으로 밀었다.
"체크해. 그냥 네가 생각하는 대로."
서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미정'에 동그라미를 쳤다. 펜 끝이 깨끗하게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갔다. 서하는 그 동그라미를 두 번 덧그렸다. 두 번째 덧그림이 조금 더 진했다.
담임은 그 종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하에게 말했다.
"가봐."
"네."
"그리고 서하야."
"네?"
"오늘 점심시간, 급식실 가지 마."
"왜요?"
담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자리의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하는 일어서서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서하는 담임이 마지막에 한 말을 곱씹었다. '급식실 가지 마.' 담임도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서하는 아직 몰랐다.
3교시 쉬는 시간.
준혁이 서하의 자리로 와서 조용히 옆에 앉았다. 준혁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야."
"응."
"옥상 자물쇠." 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밤에 시설관리실에 가서 확인했어."
"어떻게 들어갔어?"
"청소 아주머니한테 이어폰 하나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고 따라 들어갔어." 준혁이 이어폰 한쪽을 귀에서 빼면서 말했다. "시설관리실 안쪽 보드에 어제 날짜로 교체 작업 기록이 붙어 있었어. 교체 사유 칸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뭐라고?"
"-무소속 학생 집합 방지. 교장 지시-."
서하의 손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
"이름까지 찍어서?"
"이름 찍어서." 준혁의 목소리가 낮았다. "웃기지? 정시파가 새벽 3시까지 자습실 돌리는 건 '학업 의지'고, 우리가 점심시간에 옥상에 있는 건 '집합'이야. 같은 학교 학생인데 단어가 달라."
서하는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숨을 곳도 없는 거야?"
"없어." 준혁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몰랐던 걸 하나 더 알아냈어. 시설관리실 옆 교장실 바로 옆에 문서 보관실이 있는데, 거기 문 틈으로 A4 한 장이 삐져나와 있더라고. 주워왔어."
준혁이 교복 안쪽에서 반으로 접힌 A4 한 장을 꺼냈다. 책상 밑에서 서하에게 살짝 내밀었다. 서하가 펴보았다.
종이 위에는 '2학기 2학년 담임 배정 검토 기준 (초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네 개의 항목이 있었다.
1. 학급 내 3월 학평 상위권 유지율 2. 학급 내 1학기 중간고사 1등급 비율 3. 학급 내 '정시/수시 방향 설정률' 4. 학급 내 '미정' 학생 비율 (낮을수록 우대)
서하는 항목 4번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거…"
"응." 준혁이 말했다. "선생님들의 평가에 -우리 반에 미정이 몇 명인지-가 들어간대. 그게 낮을수록 담임이 좋은 평가 받는 거야."
서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언제 거야?"
"날짜는 안 찍혀 있어. 근데 초안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지금 작성 중이거나 곧 시행될 거야."
"이건 우리가 뭘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들이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거네."
"응. -우리가 싸우는 이유가 선생님들 성과급 경쟁이었던 거야-."
서하는 어제 담임이 교장실에서 나오면서 보였던 어두운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담임이 서하에게 '급식실 가지 마'라고 했던 말. 담임은 알고 있었다. 자기 반의 '미정' 학생 수가 자기 담임 평가에 들어간다는 것을.
서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준혁아. 이 종이, 당분간 우리 둘만 아는 거야."
"알아." 준혁이 말했다. "나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한 가지 더. 교실 뒷자리에 맨날 혼자 앉는 그 애. 어제 급식실에서 정시파한테 모욕당한 애."
"한시우." 준혁이 말했다. "2학년 5반."
"이름이 시우구나. 오늘 점심 때, 걔가 어디 가는지 좀 봐줘."
"왜?"
"담임이 나한테 급식실 가지 말라고 했어."
준혁이 서하를 잠깐 쳐다보았다.
"…알았어."
점심시간.
서하는 급식실에 가지 않았다. 준혁도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C동 1층 빈 복도 벤치에 앉아서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을 먹었다.
12시 23분쯤, 준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준혁이 메시지를 열어 보고 표정이 굳었다.
"서하야."
"응."
"시우가 지금 A동 급식실에서 -또- 모욕당하고 있대."
서하의 손이 삼각김밥을 쥔 채 멈췄다.
"지금?"
"지금." 준혁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친구 하나가 문자로 보냈어. 시우가 정시파 테이블 끝에 실수로 빈 자리라고 생각해서 앉았는데, 민재 쪽 라인 애들이 시우한테 큰 소리로 '3월 학평 120등이 여기 앉을 자격 있냐'고 하고 있대. 세 번째야. 이번 주에."
서하가 일어섰다.
"가자."
준혁이 서하의 팔을 잡았다.
"야."
"왜."
"-끼어들면 너도 끝이야-." 준혁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너 어제 복도에서 민재랑 채린이랑 동시에 마주친 거 알잖아. 너 이미 표적이야. 여기서 시우 편에 서면, 너는 무소속 리더가 돼. 무소속 리더는 이 학교 역사상 가장 빨리 부러진 자리야. 2년 전에 한 명 있었는데, 한 달 만에 전학 갔어."
서하는 준혁의 손을 잠깐 쳐다보았다. 준혁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서하는 그 떨림에서, 준혁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너도 부러진 자리에 가지 마. 여기 가만히 있어.'
서하는 천천히 앉았다.
"준혁아."
"응."
"내가 지금 안 움직이는 건, 용기가 없어서야, 아니면 전략이 있어서야?"
준혁이 잠깐 말을 못했다.
"-모르겠어-." 준혁이 말했다. "그게 구별이 안 되는 순간이 제일 무서운 거야."
서하는 삼각김밥의 남은 절반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사라졌다.
5교시는 영어였다. 서하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5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 시우가 복도에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지나가는 걸 서하는 보았다. 시우는 서하를 보지 않았다. 서하도 시우를 부르지 못했다.
6교시 종이 치기 직전, 준혁이 다시 서하에게 속삭였다.
"서하야."
"응."
"시우가 오늘 학교에 안 나올 수도 있어."
"왜?"
"내가 아는 애가 시우랑 같은 반인데, 시우가 오늘 5교시 끝나고 울면서 사물함 정리했대. 담임한테 조퇴 신청 넣었다고."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6교시 종이 울렸다. 국어 선생님이 들어와서 판서를 시작했다. 칠판에 '비문학 독해 요령 — 지문 유형 분석' 같은 제목이 적히고 있었다. 칠판 위쪽에 '중간고사 D-5'라고 큼직하게 써 있었다.
서하는 칠판의 글자를 한 번 보았다가, 자기 책상의 문제집을 한 번 보았다가, 창밖을 보았다. 5월의 햇빛이 학교 운동장 쪽 느티나무 잎에 닿아 있었다.
'관찰자로 있을 거냐, 움직일 거냐.'
오 담임이 아침에 한 말이 떠올랐다. '-2학년 1학기에 방향을 못 정하면, 2학년 내내 자원이 분산돼.-'
준혁이 교실 밖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끼어들면 너도 끝이야.-'
민재가 어제 한 말이 떠올랐다. '-내신은 등수가 아니야.-'
채린이 한 말이 떠올랐다. '-계산 속에 안 들어가려면 학교를 나가야 해.-'
그리고 준혁이 점심 때 한 마지막 말. '-모르겠어. 그게 구별이 안 되는 순간이 제일 무서운 거야.-'
서하는 책상에 연필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힘이 빠졌다. 그 순간 서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를 인정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관찰자로 남는 게 아니라 동조자로 남는 거야.'
관찰자와 동조자는 다른 말이었다. 관찰자는 방향을 안 정한 사람이었고, 동조자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한쪽 편을 드는 사람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시파와 수시파 양쪽을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미 한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서하는 6교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7교시는 체육이었다. 체육 복장으로 갈아입는 시간에 서하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교실에 혼자 남아서 주머니에 종이 한 장을 접어 넣었다. 준혁이 아까 준 문서였다. '2학년 담임 배정 검토 기준 (초안).'
'복도로 가자.'
종례 후. 방과 후.
중앙 복도, 유리 통로.
한영고의 국경선.
서하는 복도 한가운데에 섰다. 학생들이 방과 후에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시간이었다. A동 자습실로 가는 정시파 학생들. B동 면접실로 가는 수시파 학생들. 체육관으로 가는 운동부. 학원 셔틀버스를 타러 정문으로 가는 학생들.
모두가 서하 옆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준혁이 10미터 떨어진 기둥 뒤에서 서하를 보고 있었다. 준혁의 표정이 '야, 너 진심이야?'라고 묻고 있었다. 서하는 준혁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몇 초 후,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서하를 알아봤다.
"윤서하?"
수시파 2학년 한 명이었다. 채린 쪽 라인. 그 학생이 걸음을 멈추자, 옆에 가던 학생 한 명도 같이 멈췄다. 두 명이 멈추자 그 뒤에 가던 학생도 멈췄다. 30초 안에 중앙 복도에 10명 가까운 학생들이 서하를 중심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정시파 학생 세 명이 걸어오다 멈췄다.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물었다.
"뭐야, 저 전학생?"
"그 '미정' 걸어 다니는 애."
"아."
서하는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복도 유리 너머로 5월의 오후 햇빛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서하는 그 햇빛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들어줄 사람 없어도 괜찮아. 그냥 나 혼자 하려고 하는 말이야."
몇 명의 고개가 서하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정시파도 수시파도 아니야." 서하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으려고 애쓴 게 아니라, 떨릴 여유가 없었다. "중간고사 성적표로도, 모의고사 성적표로도, 내 자리를 정하지 않을 거야."
한 여학생이 조용히 말했다.
"미친 거 아니야?"
"미쳤을 수도 있어." 서하가 그 여학생을 한 번 보고 말했다. "근데 나는 이 학교에 3월 학평으로 42등을 찍고 온 학생이야. 수도권 기준이면 더 낮아질 거고, 한영고 정시파 기준으론 대기번호야. 그리고 나는 대전 학교 내신 1.3짜리 학생이야. 여기 기준으론 수시 상위권 카드야."
정시파 학생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수시로 가면 되잖아."
"그러게." 서하가 답했다. "근데 나는 왜 두 개의 성적표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아직 못 들었어-."
복도가 잠깐 조용해졌다. 서하는 이어서 말했다.
"너희도 두 개의 성적표가 있는 사람들이야. 정시파 쪽에 있다고 해서 내신 성적표가 없는 건 아니고, 수시파 쪽에 있다고 해서 모의고사를 안 보는 건 아니지. 근데 한영고는 너희한테 말해. '한 쪽 성적표만 너의 것이라고 생각해라. 다른 성적표는 없는 셈 쳐라.'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
누군가 핸드폰을 들어 서하를 찍기 시작했다. 서하는 그걸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는 오늘부터 이 복도 한가운데를 걸을 거야. A동으로도 B동으로도 빠지지 않을 거야. 그게 미정이든, 무소속이든,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내 자리는 내가 찾을 거야."
서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오늘 점심시간에 한시우가 급식실에서 또 모욕당했어. 3월 학평 120등이라는 이유로. 120등이면 급식실 자리도 없다는 규칙이 이 학교 어디에 써 있어? 교칙에 써 있어? 급훈에 써 있어? 아니면 선생님들 평가 기준 초안에 써 있어?"
서하는 주머니에서 A4 한 장을 꺼냈다. 준혁이 아침에 준 문서였다. 서하는 그걸 펴서 복도의 학생들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손에 들고, 말했다.
"-선생님들도 우리 성적으로 평가받고 있어-. 우리 반에 미정이 몇 명인지, 그게 담임 선생님 평가에 들어가. 우리가 서로 싸우는 이유가,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성과급이랑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 이건 내가 만든 말이 아니야. 이건 종이에 써 있는 말이야."
한 학생이 서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려고 다가왔다. 서하는 종이를 다시 접었다.
"오늘은 이것까지만 말할게. 이 종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더 확인해야 해.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가 정시파와 수시파로 나눠져서 서로를 미워하는 건,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 학교의 구조가 우리한테 그렇게 만들어준 거야."
복도 양쪽 끝에서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누가 오는지는 안 봐도 알았다. 민재와 채린이었다. 두 사람은 복도 양쪽에서 동시에 걸어왔다. 서하는 그 두 사람이 자기 뒤쪽에 멈추는 걸 느꼈다.
그때 복도 세 번째 방향에서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느리고, 아주 정확한, 가죽 구두 소리.
교장이었다.
복도의 모든 학생이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한영고 교장 선생님은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복도 공기를 다 끌어당기는 종류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교장이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서하와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교장이 멈췄다.
"윤서하."
교장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그러나 복도 전체에 들렸다. 교장이 이어서 말했다.
"네가 지금 말한 그 선택이—"
교장이 한 걸음 더 앞으로 왔다.
"—이 학교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이란다."
서하는 교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등 뒤에서 민재와 채린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기둥 뒤에서 준혁이 서하를 보고 있었다. 복도 바닥에 5월 오후의 햇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왜요?" 서하가 물었다.
교장이 서하 앞에 섰다.
"고2에 미정인 학생은, 학교의 시간표상 존재하지 않는 학생이야." 교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무서웠다. "우리 학교는 2학년 1학기부터 모든 자원 배분이 정시/수시 방향을 기준으로 돌아가. 미정은 자원 배분 대상이 아니야. 지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 인식이 없다-는 뜻이야. 고3 올라가면 그게 더 심해져. 고3에 미정이면, 말 그대로 이 학교에 네 책상이 없어."
"책상은 제가 지금도 있는데요. C동 2학년 7반에."
"그 책상은 시스템이 준 게 아니야. 담임 선생님이 너를 위해 잠시 내어 준 자리지. 시스템 밖의 호의야."
"그럼 시스템 안의 자리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잖아요."
교장이 처음으로 서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 흥미로움은 호의가 아니었다. 어떤 종류의 계산이었다.
"너는 처음 만난 학생인데 벌써 시스템을 의심하는구나."
"아뇨." 서하가 말했다. "제가 의심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저를 의심하라고 가르친 거예요. 제가 그냥 시스템 안에 들어갔으면, 저는 아무것도 의심 안 했을 거예요."
복도가 조용해졌다.
교장이 한참 동안 서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윤서하. 너한테 오늘 밤 안에 두 개의 문자가 올 거야."
"어디서요?"
"한 개는 A동에서. 한 개는 B동에서. 그 두 개의 문자를 받고 나서도 네가 오늘 한 말을 유지할 수 있는지,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
교장이 돌아섰다. 가죽 구두 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재와 채린은 서하의 뒤쪽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갔다. 준혁만 기둥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하는 한참 동안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떨림이 올라왔다.
'했다.'
'내가 한 말이, 내가 하려던 말이 맞았던 거지? 맞은 거지?'
서하는 스스로에게 확인했다.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저녁 9시 14분.
서하의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왔다.
[발신: 강민재] [내일부터 자습실은 만석이다. 대기 번호도 없어. 이 학교에서 네 자습실 자리는 없는 거야.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면 연락해.]
서하는 그 문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저녁 9시 47분.
또 한 통이 왔다.
[발신: 박채린] [한영고 내신 1등급은 정원이 정해져 있어. 상대평가니까. 네가 한 자리 먹으면 다른 애가 한 자리 잃어. 수시파 내부에서 네 자리는 없다고 방금 정리됐어. 나한테도 개인적으로 아쉬워. 근데 네가 복도에서 한 말 이후로 내가 너를 도울 방법이 없어졌어.]
서하는 두 개의 문자를 나란히 두고 한참 쳐다보았다. 두 개의 문자가 오기 전부터, 교장은 이 두 통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장이 예언한 게 아니라, 교장이 그렇게 만든 거였다. 민재와 채린이 독립적으로 보낸 문자가 아니라, -교장의 시스템이 두 사람에게 그 문자를 쓰게 한 거였다-.
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새벽에 앉았던 그 자리였다. 책상 위에 이번엔 종이 세 장이 있었다.
민재가 준 3월 학평 성적표 복사본. 채린의 세특 전략 초안을 서하가 옮겨 그린 뼈대. 그리고 준혁이 준 '2학년 담임 배정 검토 기준 (초안).'
세 장의 종이 위에서 서하는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이 세 장은 같은 시스템이 만든 세 개의 얼굴이야.'
한쪽은 숫자로 서열을 매겨서 상위 20명만 자리를 주는 얼굴. 다른 한쪽은 세특과 내신으로 카드를 만들어서 이미 있는 활동에 이름을 얹는 얼굴. 세 번째는 그 두 얼굴을 관리하는 선생님들의 성과급 평가 기준. 셋은 같은 시스템의 다른 얼굴이었다.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몸에 붙어 있었다.
서하는 세 장의 종이를 차곡차곡 겹쳤다. 세 장이 겹치자 한 장의 두께가 됐다.
'내일 아침에 복도에 다시 서야지.'
서하는 휴대폰을 꺼내 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아침 7시 50분, 중앙 복도.]
준혁의 답장이 바로 왔다.
[나도 갈게.]
서하는 잠시 답이 없었다. 준혁의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서하야.]
[응.]
[-이 학교에 너 말고 또 한 명이 복도 한가운데 설 수 있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너한테 빚졌다고 생각해-.]
서하는 그 문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창밖에서 서울의 5월 밤공기가 약간 서늘하게 불고 있었다. 멀리 대치동 쪽 학원 건물 하나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서하는 책상 위의 세 장의 종이를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잠들지 못했다.
내일이 오기까지 여섯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