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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전쟁

2화 두 개의 성적표

민재의 문자는 아침 7시 12분에 왔다.

[오늘 아침 자습 전에 A동 3층 자습실 와. 네 자리 하나 마련했다.]

서하는 교복을 갈아입으면서 잠깐 그 문자를 쳐다보았다. '네 자리.' 어제까지만 해도 자습실엔 자기 자리가 없다고 했던 애였다.

'쓸모 테스트인가.'

서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A동 3층 자습실. 한영고 학생들이 '수능방'이라고 부르는 곳.

문을 여는 순간 서하는 공기가 바뀌는 걸 느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공기가 무거웠다. 천장 형광등이 다섯 줄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아래 독서실 칸막이가 격자 모양으로 줄지어 있었다. 칸막이 상단에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1번. 2번. 3번.

왼쪽 벽에 코르크판이 있었다. 코르크판 가장 위쪽에 플라스틱 간판이 붙어 있었다.

'3월 학평 전교 TOP 20 — 한영고 정시부.'

그 아래 1번부터 20번까지 학생들의 이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1번에 -강민재-. 2번 최태호. 3번 이재현. 서하의 이름은 거기 없었다.

서하는 코르크판 아래쪽을 보았다. 작은 글씨로 '대기 번호'라고 적힌 구역이 있었다. 그 구역에 이름들이 다시 쭉 있었다. 40번대 초반쯤에 손글씨로 새로 적힌 이름 하나 — '윤서하 (전입)'.

민재가 코르크판 앞에 서 있었다.

"왔네." 민재가 자습실 중앙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9번 자리. 오늘 하루만. 9번 주인은 지금 병원 가 있어."

"나 대기 번호 아니에요?"

"대기 번호 자리는 복도 쪽 끄트머리야. 오늘은 9번에 앉아 봐. 체험판이라고 생각해." 민재가 자기 코너석을 가리켰다. 창가 가장 구석 자리. 그 자리만 유일하게 아침 햇살이 직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가 내 자리. 1번. 3월 학평 1등 자리야."

서하는 9번 칸막이에 앉아 보았다. 책상 한쪽에 '최석원'이라는 네임스티커. 서랍에 '오답노트 — 국어 / 수학 / 영어 / 탐구' 네 권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책상 위에 형광펜 네 자루, 모두 뚜껑이 맞춰져 있었다.

자습실 안의 다른 학생들은 서하를 쳐다보지 않았다. 한 명도. 그게 오히려 더 의식적으로 느껴졌다. 모두가 서하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다.

민재가 작게 말했다.

"여기 규칙 세 개."

"말해봐요."

"첫째, 숨소리 크게 내지 마. 옆 사람 집중 깬다. 둘째, 1분 이상 손을 멈추지 마. 멈추면 자리 비운 걸로 간주된다. 셋째, -내신은 금지어-야."

서하가 민재를 올려다보았다.

"내신이 왜 금지어예요?"

"여기선 내신 얘기하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수능에 안 들어가는 과목을 걱정하는 건, 수능을 포기한 거랑 같다고 봐." 민재가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지금 5월이잖아. 다음 주에 중간고사 시작하지만, 여기 앉아 있는 애들 중에 중간고사 진짜로 공부하는 애는 한 명도 없어. 다들 3월 학평 오답 정리랑 6월 모평 대비에 집중하고 있어."

"다음 주 중간고사를 아예 안 본다고요?"

"시험은 봐. 근데 성적은 상관없어." 민재가 한 박자 쉬었다가 덧붙였다. "우리한테 성적표는 딱 네 장이야. 3월 학평. 6월 모평. 9월 모평. 11월 학평. 그거 네 장이 이 자습실 서열을 결정해."

서하는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긁었다.

"그럼 수시파가 목숨 거는 중간고사는, 여기선 뭐예요?"

"수시파가 목숨 거는 거지." 민재가 짧게 말했다. "우리는 아니야. 다른 시험을 보고, 다른 등수를 세고, 다른 성적표를 받아. 같은 학교 맞나 싶을 때도 있어."

서하는 9번 자리에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책상 위로 들어오는 햇빛은 민재 쪽이 가장 강했다. 9번 자리에는 형광등 빛만 들어왔다. 백색 형광등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서하는 일어섰다.

"가봐요. 고마웠어요."

민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서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6월 모평까지 한 달 남았어. 네가 이 자리에 앉을지는 네가 결정해."

서하는 자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자습실의 백색 형광등 빛이 끊어졌다. 복도는 아직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서하는 잠시 복도 창가에 서서 숨을 골랐다.

'내가 만약 저기 앉아서 6월 모평을 준비하면, 그다음 중간고사는 아예 안 보는 사람이 되는 건가.'

서하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B동 2층.

수시파의 영역인 '생활관'은 A동과 공기가 달랐다. 복도가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부르는 소리, 학생들이 포트폴리오를 들고 뛰어다니는 소리, 면접실에서 누군가 발표 연습을 하는 소리.

서하는 B동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토론실이라고 적힌 문이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박채린의 목소리였다.

토론실 안에는 후배로 보이는 1학년 여학생 두 명과 채린이 있었다. 채린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펜을 들고 있었다.

"자, 너희 세특에 이렇게 쓰면 안 돼. '지구온난화에 대해 탐구했다.'"

채린이 화이트보드 한쪽에 그 문장을 썼다. 그 옆에 X자.

"'탐구했다'는 동사는 평가자한테 -아무것도 안 알려줘-. 탐구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탐구했는지, 뭘 발견했는지, 하나도 안 보여. 세특 한 줄당 단어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 한 단어를 '탐구했다'에 쓰는 건 사치야."

1학년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럼 어떻게 써요?"

채린이 펜을 바꿔 잡았다.

"'지구온난화의 원인 중 메탄 배출에 주목해, 한국의 축산업 데이터를 가설로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는 통계를 자체적으로 찾아 정리했다.' 이렇게."

채린이 화이트보드에 그 문장을 썼다. 다 쓰고 펜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쓰면 동사가 세 개야. 주목했고, 가설을 세웠고, 검증했다. 동사 한 개가 등급을 바꿔. 이건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야."

1학년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이 학생 하나의 노트를 들여다보다가, 다른 학생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서하는 복도에서 보고 있었다. 채린이 화이트보드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릴 때, 1학년들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채린의 얼굴이 잠깐 무너졌다.

입꼬리가 그대로였는데, 눈이 먼저 무너졌다. 0.2초 정도였다. 눈에 초점이 잠시 풀렸고, 거기에 어떤 피로 같은 것, 또는 -공허- 같은 것이 스쳤다. 그리고 채린이 다시 눈을 깜빡였고, 1학년들을 돌아보았을 땐 이미 완벽한 채린이었다.

그때 채린이 서하를 보았다.

서하와 눈이 마주쳤다. 채린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하가 뭘 봤는지 계산한 것 같았다. 그리고 조용히 토론실 문 쪽으로 걸어가서, 서하에게 작게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서하는 채린의 표정이 마지막으로 바뀌는 걸 보았다.

'아, 봤구나.'

서하는 복도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던 채린의 긴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주목했고. 가설을 세웠고. 검증했다.' 세 개의 동사가 완벽하게 들어맞은 문장이었다. 채린이 그 문장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써보고 고쳐봤을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완벽한 문장을 쓰기 위해 저 정도 연습이 필요한 사람이, 점심시간에 나한테 어떻게 접근했는지 생각해보자.'

서하는 B동 복도를 나왔다. 머릿속에 채린의 0.2초가 남아 있었다.


점심시간, 옥상.

서하는 옥상 철문을 열었다. 쇠 냄새, 오후의 햇빛, 그리고 바람. 강남 한영고의 옥상에서 보이는 건 학원가의 건물들이었다. 대치동의 수능 전문학원 간판, 도곡동의 영어학원 간판, 멀리 목동 쪽의 수시 학종 컨설팅 건물. 건물 하나하나가 이 학교 학생들의 돈과 시간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 이미 옥상에 있었다. 준혁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여기?"

"규칙 하나 더 말해줄까." 준혁이 옥상 구석 실외기 옆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있었다. "무소속은 옥상에 있어."

서하는 그 옆에 앉았다.

"무소속이 왜 옥상에 있어?"

"옥상이 복도랑 급식실이랑 자습실 말고 유일하게 남은 공간이거든." 준혁이 이어폰을 뺐다. "A동 자습실은 정시파 거. B동 면접실이랑 토론실은 수시파 거. 도서관? 지하에 하나 있긴 한데 아무도 안 가. 먼지투성이야. 체육관? 체육부가 점심시간에 농구해. 그럼 우리가 갈 데가 없어. 그래서 여기야."

서하는 옥상 바닥에 등을 기댔다.

"준혁아. 질문 하나 해도 돼?"

"해."

"너는 왜 어느 쪽에도 안 갔어?"

준혁이 잠깐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학교엔 두 개의 성적표가 있어." 준혁이 말했다. "하나는 내신. 중간고사랑 기말고사."

"응."

"다른 하나는 모의고사. 3월 학평, 6월 모평, 9월 모평, 11월 학평." 준혁이 손가락으로 네 개를 하나씩 세었다. "수시파는 앞 거 보고. 정시파는 뒷 거 봐. 서로 딴 세계 사람이야."

"너는?"

"나?" 준혁이 웃었다. 눈이 사라지는 웃음. "나는 어느 성적표에도 내 이름이 위쪽에 없어. 그래서 나는 성적표를 -아예 안 봐-. 보면 내 자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없으면 안 보는 게 덜 아파."

서하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근데 준혁아. 어느 성적표에도 이름이 위쪽에 없다고 해서 네가 없는 건 아니잖아."

준혁이 서하를 돌아보았다.

"…야. 너 첫날부터 말이 너무 서정적이다."

서하가 작게 웃었다.

"진심이야."

준혁이 잠시 말을 안 했다. 그리고 말했다.

"첫날 옥상에 올라와서 그런 말 하는 전학생은 네가 처음이야."

"그래?"

"응." 준혁이 이어폰을 다시 꽂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하나만 경고할게. 오늘 이 이야기 꺼낸 것만 해도, 너는 이미 -미정-이 아니야. 너는 이미 제3의 쪽이야. 근데 이 학교에서 제3의 쪽은 보통 제일 빨리 부러진다."

옥상 문이 바람에 한 번 덜컹거렸다. 서하는 그 문을 잠깐 쳐다보았다.


6교시가 끝나고.

서하의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왔다.

[B동 2층 토론실 옆 면접실로 와. 잠깐 얘기할 게 있어. - 박채린.]

'예상보다 빨랐네.'

서하는 B동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토론실이 아니라 그 옆 작은 면접실이었다. 면접실이라고 해 봐야 원형 테이블 하나에 의자 네 개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벽에 '면접 연습 시 녹화 동의 필요' 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채린이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A4 바인더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바인더 표지에 '윤서하'라는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하는 그 표지를 본 순간 멈췄다.

"앉아." 채린이 말했다.

서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채린이 바인더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안에는 서하의 대전 학교 시절 기록이 정리되어 있었다. 내신 등급 추이. 봉사활동 기록. 동아리 활동 목록. 그리고 수업 중 발표 주제들.

"이걸 어떻게 모았어요?"

"3시간 만에." 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영고 학생회 부회장의 권한은 꽤 넓어. 학생부 사본 조회는 담임 선생님 사인이 필요한데, 사인은 점심시간 전에 받았어."

서하는 바인더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자기가 대전 학교에서 한 활동들이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각 항목 옆에 채린의 메모가 작은 글씨로 달려 있었다.

봉사활동 20시간 옆에 '-미반영-. 삭제 권장.' 동아리 '환경탐구부' 옆에 '주제가 너무 포괄적. 세분화 필요.' 발표 '플라스틱 해양 오염' 옆에 '가설 구조로 재구성 가능. 생윤/사문 세특 연계 가능.'

서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췄다. 거기엔 하나의 기획안이 있었다.

'윤서하 2학년 1학기 세특 전략 — 초안.'

"이거 네가 쓴 거예요?"

"어젯밤에." 채린이 손가락으로 그 페이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네가 점심시간에 내 제안을 거절한 다음에 쓴 거야."

"거절한 사람한테 이걸 왜 줘요?"

채린이 진짜로 웃었다. 이번엔 아침의 화이트보드 앞 미소가 아니었다. 조금 피곤하고, 조금 솔직한 웃음이었다.

"왜냐하면 네가 한영고에서 수시로 나온 놈 중에 올해 가장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거든. 내신 1.3, 대전에서 환경 주제 발표 기록 있음, 봉사 기록은 버려도 되고, 전학이라는 변수가 세특에 '새 환경 적응'이라는 서사로 활용 가능. 퍼펙트에 가까워."

"근데 저는 아직 수시에 체크 안 했잖아요."

"알아." 채린이 한 박자 쉬었다. "그래서 조건을 낮추려고."

"낮춘다는 건?"

"입시 방향 설정 확인서 체크는 일단 -미정-에 둬. 대신, 내가 만든 이 세특 전략 초안을 네가 받아서 써. 이번 학기에만. 수시파 공식 멤버가 아니라, 개인적 협력자로. 학교 내부에선 네가 수시파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 하나야. 그럼 정시파도 너를 안 건드릴 거고, 나는 수시 내부에서 네 카드를 독점할 수 있어."

서하는 바인더를 천천히 덮었다.

"채린 씨."

"박채린이라고 불러."

"박채린." 서하가 고쳐 말했다. "조건 없는 호의는 없다고 아까 점심시간에 말했죠."

"했어."

"그럼 이 조건 안에 있는 진짜 조건이 뭐예요? 말한 조건 말고, 말 안 한 조건."

채린이 잠깐 서하를 쳐다보았다. 아침에 화이트보드 앞에서 봤던 그 0.2초의 표정이 다시 얼핏 스쳤다.

"말 안 한 조건은," 채린이 바인더를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이 초안을 준 다음, 네가 만약 6월 평가원 모평에서 상위권을 찍으면, 네 카드를 정시파한테 뺏기기 전에 -나한테 먼저 말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뭐가 조건이에요?"

"내 세특 전략은 '내신 좋은 학생'을 전제로 짠 거야. 근데 네가 6월 모평까지 잘 찍으면, 너는 -두 개의 성적표를 다 가진 카드-가 돼. 한영고에서 그런 카드는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야. 그런 카드는 양쪽 다 원해. 근데 나는 지금 너한테 초안을 먼저 줬으니까, 네가 양쪽에서 고를 수 있는 위치가 돼도 -나한테 먼저 알려줄 의리-는 있어야 한다는 거야."

서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박채린."

"응."

"나는 아직 6월 모평을 안 봤어요. 근데 당신은 이미 내가 두 개의 성적표를 다 가질 거라고 계산하고 움직이고 있네요."

채린이 무표정해졌다. 입꼬리의 그 기본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계산하는 게 내 직업이야." 채린이 말했다. "이 학교에서 수시파는 매일 매시간 계산으로 살아. 안 그러면 내가 저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었어."

"나는 계산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계산 속에 안 들어가려면," 채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 학교를 나가야 해."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인더는 두고 갈게요. 고마워요. 근데 이거 받으면, 나는 이미 박채린 씨의 계산 안에 들어간 거예요."

채린이 서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아주 희미한 피로가 스쳤다.

"윤서하."

"네."

"너, 지금 되게 멋있는 말 한 거 알지?"

서하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멋있는 말 한 게 아니라, 첫날밤에 숨 쉴 곳을 찾고 있는 거예요."

서하가 면접실에서 나왔다.


저녁 6시 반. 해가 거의 졌다.

서하는 옥상에 다시 올라갔다. 점심시간에 준혁과 앉았던 실외기 옆 자리에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루 종일 양쪽 파벌에서 두 번씩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옥상 철문 앞에 섰다.

잠겨 있었다.

서하가 몇 번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낮에 분명히 열려 있었다. 점심시간에 준혁과 서하가 앉았던 그 옥상 문이.

자물쇠가 바뀌어 있었다.

낮에 있던 오래된 자물쇠가 아니라 새 것이었다. 번호키도 아니고 열쇠 자물쇠. 광택이 있는 은색. 문틀에도 녹슨 흔적이 없는 새 경첩이 달려 있었다. 아침에는 분명히 녹슨 자물쇠였다.

서하는 한참 그 자물쇠를 쳐다보았다.

'하루 사이에 바뀌었어.'

'누구 지시야?'

서하는 옥상 문에서 계단을 한 층 내려왔다. 4층 복도. 4층 복도는 이 시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하는 계단을 한 층 더 내려오려다가, 4층 복도 끝에서 발을 멈췄다.

복도 양쪽에 사람이 서 있었다.

왼쪽 끝에 강민재. 오른쪽 끝에 박채린.

두 사람은 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복도에서, 반대 방향에서.

서하는 계단 중간쯤에 선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민재는 안경을 닦고 있었다. 채린은 바인더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옥상이 잠겼지." 민재가 먼저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오늘 아침에 교장 선생님이 시설관리실에 지시 내렸어. 무소속 학생들이 옥상에서 모이는 거, 안전 문제라고." 민재가 안경을 다시 쓰면서 말했다. "내가 교장실에 가는 길에 우연히 들었어."

"'우연히'요?"

"그래. 우연히." 민재의 입꼬리에 다시 얇은 미소가 걸렸다. "윤서하, 네가 옥상에 간 건 여러 사람이 알고 있어. 네가 점심시간에 이준혁이랑 거기서 이야기한 것도. 그리고 내가 너한테 아침에 자습실 자리를 제안한 것도 이미 여러 사람이 알아. 이 학교에선 하루 만에 한 사람의 동선이 전부 기록돼."

채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윤서하. 내가 오늘 너한테 말 안 한 조건이 하나 있어."

"뭔데요?"

"-미정-은 오래 못 가." 채린이 말했다. "6월 모평까지 방향 정할 시간을 준다는 건, 민재 쪽 조건이지 내 쪽 조건이 아니야. 내 쪽 조건은 이번 주까지야. 중간고사 1주 전에 수시 방향을 못 정하면, 이번 학기 세특 전략은 시작도 못 해. 그럼 올해 고2 1학기는 -그냥 날아가-는 거야."

민재가 반대편에서 말했다.

"정시파 쪽 조건은 다음 달까지야. 6월 모평 전에만 결정하면 돼. 여유가 있어 보이지? 근데 여유가 있는 대신, 네가 6월 모평에서 보여줘야 하는 숫자가 훨씬 커."

서하는 계단에서 두 사람 사이를 한참 보았다. 복도 양 끝에 있는 두 개의 성적표. 왼쪽은 3월 학평의 세계. 오른쪽은 중간고사의 세계. 한쪽엔 숫자가 있고, 한쪽엔 다른 숫자가 있다. 한쪽은 한 달 후에 서하를 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한쪽은 일주일 안에 서하를 자기 카드로 등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서하는 계단 맨 아래 칸으로 내려왔다. 이제 두 사람과 같은 층에 섰다.

"질문 하나만 할게요." 서하가 말했다.

"해." 민재가 말했다.

"해." 채린도 말했다.

"여기 이 복도 양쪽 끝에서 나한테 말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성적표는 본 적 있어요?"

두 사람이 잠깐 말을 멈췄다.

민재가 먼저 답했다.

"없어. 나는 채린의 내신 등수를 몰라. 알 필요도 없고."

채린이 답했다.

"나도 민재의 모의고사 전교 등수가 몇인지 몰라. 알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서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성적표를 평생 본 적 없는 거네요. 근데 나한테 동시에 뭘 선택하라고 말하는 거죠."

복도 끝에서 공기가 살짝 어긋났다. 민재의 미소가 살짝 굳었고, 채린이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나는." 서하가 계속 말했다. "두 개 다 내 것이 아닌데."

민재가 한 박자 뒤에 말했다.

"그럼 둘 다 내 것으로 만들든가. 근데 그걸 두 파벌 밖에서 혼자 하겠다고? 그건 -이 학교에서 제일 미친 짓-이야."

채린이 말했다.

"정말 두 개 다 네 것이 아니면, 너는 여기서 살 수 없어. 살기 위해 뭔가를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해."

서하는 복도의 한쪽에도 다른 한쪽에도 가지 않았다. 그냥 계단 옆 벽에 기대고 섰다.

"오늘은 미정이에요. 내일도 미정일 거고, 모레도 미정일 거예요. 적어도 내가 뭘 해야 할지 내 머리로 결정할 때까지는."

민재가 채린을 한 번 보았다. 채린이 민재를 한 번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짧은 시선 교환이 있었다. 서하는 그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은 오늘은 안 넘어온다.'

민재가 먼저 돌아섰다.

"6월 모평에서 보자."

채린이 바인더를 품에 고쳐 안았다.

"중간고사 끝나고 다시 얘기해."

두 사람이 복도 양 끝으로 각자 사라졌다. 서하는 계단 옆 벽에 오래 기대어 있었다. 옥상 문의 잠긴 자물쇠.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차가운 쇠 난간. 두 개의 성적표. 두 개의 세계.

서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옥상 자물쇠 바뀌었어.]

몇 초 후에 답장이 왔다.

[알아. 오늘 낮에 바뀌었어. 교장 지시래. 무소속 모이는 게 '안전 문제'라고.]

서하는 한참 그 문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답을 보냈다.

[내일 모일 자리는?]

준혁의 답장은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내가 생각 중이야. 근데 서하야.]

[응.]

[너, 진짜 각오해야 해. 이 학교는 -중간이 없다는 걸- 하루 만에 너한테 가르치는 중이야.]

서하는 계단 벽에 머리를 기댔다. 형광등 하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깜빡였다. 멀리 어디선가 자습실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서하는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은 아직 일렀다. 말은 아직, 아직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