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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사피엔스

4화 레벨 디자인

S반의 첫 주간 테스트 결과가 게시되었다.

서율은 게시판 앞에 서서 자기 이름을 찾았다. 밑에서부터 세는 게 빨랐다. 12명 중 12등. 꼴찌. 총점 148점. 300점 만점 기준. 1등 강민수는 267점이었다.

119점 차이. 12명 중 꼴찌라는 숫자보다, 1등과의 간극이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게임으로 치면 S급 던전에 C급 캐릭터가 매칭된 거지.'

옆에서 누군가 게시판을 힐끗 보고 지나갔다. 서율의 점수를 본 건지 안 본 건지, 표정 변화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S반에서는 남의 점수에 반응하는 것조차 에너지 낭비였다. 자기 점수만 확인하고, 자기 공부로 돌아간다. 그게 이 교실의 문법이었다.

서율은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커리큘럼표가 놓여 있었다. 주 6일, 하루 12시간. 국어 4시간, 수학 5시간, 영어 2시간, 탐구 1시간. 거기에 야간 자습 3시간. 반수반의 자율적 분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반수반이 오픈 월드였다면, S반은 리니어 게임이었다. 정해진 루트, 정해진 시간, 정해진 속도.

차도윤의 국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S반은 열두 명이니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진행되었다. 대형 강의실에서의 퍼포먼스와 달랐다. 농담이 줄었고, 밀도가 높아졌다. 한 문장을 던지면 학생들이 즉시 반응했다. 차도윤이 질문하면 3초 안에 답이 돌아왔다.

서율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노트를 적는 속도가 차도윤의 말하는 속도를 못 쫓았다. 옆자리 강민수는 펜을 놀리지 않고 화이트보드만 응시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강민수의 노트는 비어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의 노트는 비어 있고, 모르는 사람의 노트는 빼곡하다. 서율의 노트는 빼곡했다. 빼곡한 것이 자랑이 아니라 증거라는 걸, S반에 와서 알았다.

점심시간. 서율은 편의점 도시락을 책상에서 먹었다. S반 학생 대부분이 그랬다. 식당까지 내려가는 10분이 아까웠다. 옆자리 이서연은 밥을 먹으면서 영어 단어장을 보고 있었다. 뒤쪽 박준혁은 수학 문제를 한 손으로 풀면서 다른 손으로 삼각김밥을 뜯고 있었다.

'여기서 꼴찌라는 건, 반수반에서 중위권이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구나. 반수반에서 중위권은 무난한 위치였지만, S반에서 꼴찌는 존재 자체가 의문부호가 되는 위치였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10분 휴식. 서율은 복도로 나가 자판기에서 물을 뽑았다. 자판기 옆에 강민수가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서율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시선은 이미 핸드폰으로 돌아가 있었다.

서율은 물을 마시며 강민수를 관찰했다. 재수 3회차. 작년 연세대 경영 합격을 차고 서울대를 노리는 사람. S반 1등. 이 교실에서 유일하게 '실력으로' 앉아 있다고 서율이 확신할 수 있는 사람. 강민수의 얼굴에는 서율과 다른 종류의 피로가 있었다. 모자라서 지치는 피로가 아니라, 반복해서 지치는 피로. 3년째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의 눈이었다.

'저 사람은 267점이고, 나는 148점이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지만, 같은 시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시각. 4층 반수반.

하경은 서율이 앉던 자리를 봤다.

빈 책상. 스탠드가 꺼져 있었다. 포스트잇도 없고, 연필꽂이도 없었다. 서율이 S반으로 내려간 뒤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반수반의 암묵적 규칙이었다. 누군가가 올라가면 — 이 경우엔 내려간 것이지만 위계적으로는 올라간 것이므로 — 그 자리는 한동안 비워둔다. 축하인지 추모인지 모를 관습.

하경은 캔커피를 두 개 사왔다가 한 개를 가방에 도로 넣었다. 습관이었다. 서율이 옆에 있을 때는 하나를 건네고 "카페인 의존증 동맹"이라며 캔을 부딪치는 것이 아침 루틴이었다. 이제 그 루틴의 반쪽이 사라졌다.

반수반 학생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서율이 S반 갔대."

"걔 성적이 우리보다 나았어?"

"아니, 비슷한데? A반 상위권이었잖아."

"그럼 왜 올라간 거야?"

"모르지. 뭐, 상담 잘 받은 거 아니야?"

하경은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올렸다. 속삭임이 사라졌다. 대신 머릿속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서율이는 S반에서 공부하고, 나는 여기서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에어컨이 과하게 돌아가는 반수반의 공기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하경은 노트를 펼쳤다.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10분 뒤 펜을 내려놓았다. 집중이 안 됐다. 서율이 없으니 쉬는 시간에 밈을 주고받을 상대가 없었다. 밈이 없으면 자조가 안 되고, 자조가 안 되면 현실이 너무 가까이 왔다. 캔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오늘 세 번째 캔이었다. 심장이 뛰는 게 카페인인지 불안인지 모르겠다는 서율의 말이 떠올랐다.

'서율이는 S반에서 뭘 하고 있을까. 잘하고 있을까.'

그 생각 뒤에 다른 생각이 왔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밤 10시. GS25 대치점.

서율이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하경이 먼저 와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율을 보고 손을 들었다.

"꼴찌가 왔다."

서율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알아?"

"네 표정이 12등이야."

서율이 웃었다. 웃긴 건 아닌데 웃겼다. 하경의 직설은 때로 진통제처럼 작용했다. 아프지만, 아프다는 걸 인정하게 해주니까.

"S반이 어때?"

"강도가 다르다. 진짜로. 반수반이 동네 헬스장이면 S반은 군대 PT야. 쉬는 시간에도 문제 풀고, 밥 먹으면서도 단어장 보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율이 삼각김밥을 뜯다가 멈췄다.

"뭐?"

"S반이든 반수반이든, 결국 공부해서 점수 올리는 건 너잖아. 환경 탓하고 있을 시간에 문제 하나 더 풀어."

하경의 말은 단순했다. 단순해서 할 말이 없었다.

"이 학원에서 공부를 말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나도 안 해. 말만 해."

둘 다 웃었다. 편의점 형광등 아래에서 삼각김밥과 캔커피를 나누는 시간. 이 시간만은 S반도 반수반도 아니었다. 그냥 두 사람이 밤에 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시간.

하경이 캔커피를 내려놓고 말했다.

"야, 근데. 나도 A반이라도 올라갈까."

서율이 하경을 봤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네가 올라간 다음부터 계속 생각했어. 반수반에 있으면 반수반의 공기를 마시는 거잖아. '어차피 안 돼'라는 공기. 근데 그 공기를 바꾸려면 물리적으로 장소를 바꿔야 하는 건가 싶어서."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경이 위계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안 돼'를 보험으로 삼던 하경이, 그 보험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

'시스템이 사람을 바꾸는 건가, 사람이 시스템에 적응하는 건가.'

서율은 삼각김밥의 마지막 한 입을 씹으며 생각했다. 하경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나. 자신이 실력이 아니라 로비와 입결 전략으로 S반에 올라갔다는 것을. 하지만 그 말을 꺼내면, 하경의 "A반이라도 올라갈까"는 어떤 의미가 되는 걸까. 정직한 노력으로 올라가겠다는 하경에게, 노력과 무관한 방법으로 올라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

입을 다물었다.

"올라갈 수 있으면 올라가. 너 A반 성적 되잖아."

"되긴 해. 되는데."

하경이 빈 캔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S반에서 공부하는 거 보면,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거든."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7층 유튜브 스튜디오.

차도윤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 링라이트가 얼굴을 비추고, 방음 부스 안의 공기가 고요했다. "도윤쌤의 입시 돌직구" 로고가 찍힌 배경판이 뒤에 세워져 있었다.

"자, 안녕하세요~ 도윤쌤이에요! 오늘은 반수 성공 전략 TOP 5를 이야기해 볼게요."

카메라의 빨간 불이 켜졌다. 차도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튜브 모드.

"첫 번째, 환경을 바꿔라. 저희 학원 S반에 중위권 대학에서 반수한 학생이 있는데요, 이 학생이 벌써 환경이 바뀌니까 달라지고 있어요. 공부 습관, 집중력, 시간 관리. 다 바뀌거든요."

차도윤은 대본을 살짝 내려다봤다. 대본에는 '서율'이라는 이름 대신 '학생 A'라고 적혀 있었다. 익명. 하지만 S반 반수생이 한 명뿐이라는 것은,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두 번째, 멘탈을 관리해라. 반수생이 가장 힘든 건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질문이거든요. 이 질문이 올라오면 그냥 무시하세요. 질문에 답하려고 하면 끝이 없어요. 그냥 앞에 있는 문제를 풀어요."

촬영이 끝났다. 스태프가 카메라를 끄자 차도윤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2초. 다시 올라갔다.

"편집은 내일까지. 썸네일은 '반수 성공' 키워드 크게 넣어줘."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차도윤은 빈 스튜디오에서 잠시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 촬영 영상의 프리뷰가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의 차도윤은 밝고, 자신감 넘치고, 에너지가 충만했다. 화면 밖의 차도윤은 링라이트가 꺼진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열었다.

유튜브 스튜디오. 구독자 수. 25만 2천. 경쟁 강사 박현준의 채널. 32만 4천.

'7만 차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S반 학생 중 서울대에 갈 수 있는 학생은 현실적으로 다섯 명. 서율은 아직 그 다섯에 들지 못한다. 6모 표준점수 370점에서 서울대 지원 가능 라인인 396점 이상까지 올려야 한다. 26점. 수능까지 5개월.

'될까?'

차도윤은 그 질문을 3초 만에 접었다. 될까가 아니라, 되게 만들어야 했다. 되면 입결이고, 안 되면 학생 역량 부족이었다. 어느 쪽이든 학원은 남는 장사였다.


그날 밤. 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서율아, 도윤쌤 유튜브에 너 얘기 나온 것 같은데? 역시 S반이 다르다~]

서율은 핸드폰 화면을 3초간 바라봤다. 유튜브를 열었다. "도윤쌤의 입시 돌직구 — 반수 성공 전략 TOP 5." 썸네일에 차도윤이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조회수 2만 3천. 업로드 3시간 만이었다.

영상을 재생했다. "중위권 대학에서 반수한 학생이 있는데요, 벌써 달라지고 있어요." 차도윤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울렸다.

'달라지고 있다.'

서율은 오늘 주간 테스트에서 S반 꼴찌를 했다. 달라진 것은 교실과 커리큘럼이었다. 서율 자신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기 전에, 이미 '달라진 사례'로 포장되고 있었다.

'나는 콘텐츠가 되어가고 있구나.'

1화에서 차도윤의 강의를 보며 '이건 강의가 아니라 콘텐츠 촬영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관찰자였다. 지금은 콘텐츠의 재료였다.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S반 교실의 에어컨이 조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대치동의 불빛이 보였다. 학원 건물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 누군가는 공부하고, 누군가는 촬영하고, 누군가는 아이의 이름이 유튜브에 나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서율은 노트를 폈다. '내가 결정한 것 목록.' 여전히 한 줄뿐이었다.

'아직 없음. 하지만 이제 세기 시작함.'

그 아래에 볼펜을 갖다 대다가 멈췄다. 아직 적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S반에 남는 것도 내가 결정한 건지 모르겠고, 공부하는 것도 관성인지 의지인지 모르겠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대신 수학 문제집을 폈다. 오늘 수업에서 못 풀었던 문제. 처음부터 다시.

'적어도 이건 내가 펼친 거다.'

밤 11시. S반 자습실에 서율 혼자 남아 있었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