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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사피엔스

3화 시그니처

서율은 밤새 잠을 못 잤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천장을 봤다. 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도윤의 목소리만 반복 재생되었다. "입결 프레젠테이션에 반수 성공 사례가 필요해." "중대에서 서울대, 스토리가 되잖아."

스토리. 내가 스토리래.

새벽 4시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닫았다. 유튜브를 열었다. 추천 영상 첫 번째가 "도윤쌤의 입시 돌직구 — 반수,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였다. 썸네일에 차도윤이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서율은 유튜브도 닫았다.

'S반을 거부하면?'

엄마가 난리를 칠 것이다. "미쳤어? S반인데?" 하경은 "당연히 거부해"라고 할 것이다. 차도윤은 — 그냥 다른 학생을 찾겠지. 서율이 아니어도 스토리를 만들 재료는 있으니까.

'S반을 받아들이면?'

실력이 아닌 자리에 앉게 된다. 하지만 S반의 환경은 확실히 좋을 것이다. 좋은 강의, 소수 정원, 1:1 관리. 거기서 진짜 실력을 올리면? 과정이 부정해도 결과가 정당하면 괜찮은 건가?

'괜찮은 건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다크서클이 진했다. 후드집업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침 6시 반. 대치동은 이미 깨어 있었다.


아침 8시. 반수반 자습실.

서율은 평소보다 일찍 왔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의 포스트잇이 서율을 맞이했다.

"올해의 나도 부정당할 예정"

어제까지 이 문장은 밈이었다. 자조적인 유머. 반수생의 세계관을 한 줄로 요약한 위트.

오늘은 달랐다. 이 문장이 예언처럼 느껴졌다.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정되어 있다. 서율의 S반 입성은 서율의 실력을 부정한 자리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거부하면 끝나는 거잖아. 그냥 "안 가겠습니다" 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서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중앙대에 갈 때도 "가겠습니다"를 스스로 말하지 못했고, 자퇴할 때도 "그만두겠습니다"를 스스로 말하지 못했다. 모든 결정의 주어는 항상 서율이 아니었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어제 펼쳤던 빈 페이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볼펜을 들고 한 줄을 적었다.

'내가 결정한 것 목록'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오전 10시. 학원 6층 조교실.

유진은 차도윤의 문자를 세 번째 읽고 있었다.

[차도윤: S반 내부 평가 자료 수정본 오늘 중으로 올려줘. 서율이 포함 버전.]

수정본. 유진은 그 단어의 무게를 느꼈다. 서율의 내부 평가 점수는 87점. S반 커트라인은 92점. "수정본"이라는 건, 87을 92 이상으로 만들라는 뜻인가. 아니면 커트라인을 87 이하로 내리라는 뜻인가.

어떤 쪽이든 조작이었다.

유진은 엑셀 파일을 열었다. 커서가 서율의 점수 칸 위에서 깜빡였다. 87. 이 숫자를 바꾸면 간단했다. 92로. 아니, 93쯤으로 하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바꾸는 데 1초. 저장하는 데 1초. 합계 2초면 서율은 S반 학생이 된다.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을 어제 차도윤에게 하려다 삼켰다. 삼킨 말은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말 위로 새로운 지시가 쌓이고 있었다.

유진은 자기 책상 구석을 봤다. 임용고시 교재. "2025 교육학 기출분석." 책등이 여전히 깨끗했다. 학원에 들어온 지 2년, 이 교재를 제대로 편 날이 며칠이나 될까. 학생들의 질문에 새벽까지 답하고, 차도윤의 행정 지시를 처리하고, 학부모 민원을 받고. 그 사이에 자기 공부를 끼워 넣을 틈은 매번 사라졌다.

'나도 누군가의 부속품이 아닌 주체가 되고 싶다.'

그 생각이 떠올랐다가 바로 가라앉았다. 주체가 되려면 먼저 이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임용 준비는 돈이 필요했고, 돈은 이 학원에서 나왔다. 차도윤의 지시를 거부하면 이 자리도 위태로웠다.

유진은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올렸다.

87을 지우고 93을 쳤다.

저장 버튼을 누르기 직전, 잠시 멈췄다. 모니터에 반사된 자기 얼굴이 보였다. 안경 너머의 눈이 피곤해 보였다.

저장.

파일이 저장되었다. 유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임용 교재 위에 S반 편성 서류가 한 장 더 쌓였다. 교재의 표지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고 있었다.


점심시간. 학원 1층 로비.

서율이 편의점에 가려고 1층을 지나가다 멈췄다. 엘리베이터 옆에 새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2025 반수 성공 프로젝트 — 당신의 재도전을 응원합니다."-

디자인이 깔끔했다. 파란색 배경에 흰 글씨. 아래쪽에 차도윤의 얼굴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엄지를 치켜든 포즈. 유튜브 썸네일과 같은 사진이었다.

서율은 현수막을 올려다봤다. "응원합니다." 응원. 이 단어가 어제까지는 마케팅 카피에 불과했다.

'응원이 아니라 투자잖아.'

엘리베이터 옆의 배너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서울대 합격자 47명 배출!" 그리고 그 작은 글씨. "컨설팅 포함."

서율은 이제 이 배너를 다른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47명 중 몇 명이 진짜 이 학원에서 공부해서 간 것일까. 몇 명이 이미 갈 수 있는 실력인데 학원에 이름만 올린 것일까. 그리고 몇 명이 — 서율처럼 — '스토리'로 선별된 것일까.

'입결이라는 화폐. 내 액면가는 '중대에서 서울대'라는 서사.'

현수막에서 눈을 떼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삼각김밥을 두 개 집어 들었다. 참치마요와 불고기. 하경 것도 하나 사야 했다.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는데,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학원 건물이 보였다. 7층 꼭대기. 원장실. 차도윤의 영역. 거기서 내려다보면 이 학원가 전체가 보일 것이다. 학생들은 점처럼 보이겠지.

'점. 그래, 나는 점이야. 엑셀 파일 안의 한 줄. 입결 프레젠테이션의 한 슬라이드. 유튜브 썸네일의 한 사례.'

"삼천이백 원입니다."

"아, 네."

카드를 찍고 나왔다.


오후 3시. 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서율아! S반 확정이래!"

오정민의 목소리는 높고 밝았다. 기쁨이 전화기 너머로 쏟아졌다.

"원장님한테 오전에 연락 왔어. 7월 학기부터 S반이래. 시그니처반!"

서율은 자습실 창가에 서 있었다. 창 너머로 다른 학원 건물의 벽이 보였다. 그 벽에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2025 서울대 합격자 52명!" 이쪽보다 5명 많았다. 이 현수막 전쟁에서 서율은 탄환이 될 예정이었다.

"엄마, 그거 내 실력으로 간 거 아닐 수도 있어."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2초. 그 2초가 길었다.

"무슨 소리야?"

"내 내부 평가 점수가 S반 커트에 안 닿아. 그런데 올라간 거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잖아."

"서율아." 오정민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밝음에서 단호함으로. "S반이면 S반이지. 이유가 중요해?"

서율은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원장님한테 부탁한 거 아니냐고? 그래, 엄마가 상담은 했어. 근데 그게 뭐가 잘못이야? 다른 엄마들도 다 그렇게 해.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기회가 온 게 아니라 만들어진 거잖아."

"만들어진 기회도 기회야. 서율아, 너 중대 다닐 때도 그랬잖아. '이게 맞나, 이게 맞나' 맨날. 그러다 1학기 버리고 나온 거잖아. 이번에는 그러지 마. 앞에 길이 있으면 가. 고민하지 말고."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엄마의 세계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기회가 오면 잡는 것. 환경이 결과를 만드는 것. 과정의 정당성보다 결과의 효용이 중요한 것.

하지만 서율의 세계에서는 뭔가가 걸렸다. 목구멍에 삼각김밥 밥풀이 걸리듯, 작지만 빠지지 않는 것.

"...알겠어, 엄마."

"잘 생각한 거야. 서율아, 이번엔 진짜 해보자. 응?"

전화가 끊겼다. 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습실을 둘러봤다. 반수반 교실. 창문 하나. 포스트잇. 곧 이 교실을 떠나게 될 것이다. S반은 2층이었다. 물리적으로 두 층을 내려가는 것인데, 위계적으로는 올라가는 것이었다.

'올라가는 건가, 끌려가는 건가.'

하경이 들어왔다. 캔커피를 들고. 서율의 표정을 보더니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S반 확정됐대."

하경이 캔커피를 잠시 멈췄다.

"가는 거야?"

"...응."

"네가 결정한 거야?"

서율은 하경을 봤다. 하경은 서율을 봤다. 두 사람 다 답을 알고 있었다.

"모르겠어." 서율이 말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캔커피를 마시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앉는 순간, 하경의 눈에 서율과는 다른 종류의 흔들림이 스쳤다. 서율은 그것을 봤지만 붙잡지 않았다. 지금은 자기 것도 감당이 안 됐으니까.

하경의 자리 옆에 곧 빈자리가 생길 것이다. 서율이 앉던 자리.

반수반에서 한 명이 빠지면 남은 사람들은 뭘 느낄까. 축하? 시샘? 아니면 — 버림받은 느낌?


오후 5시. S반 교실. 2층 첫 번째 강의실.

서율은 S반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는 열두 개의 책상이 정렬되어 있었다. 반수반보다 넓었다. 창문이 세 개. 학원 앞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시스템 에어컨이 가동 중이었고, 각 책상에 개인 콘센트와 스탠드가 있었다.

이미 열 명쯤 앉아 있었다. 대부분 서율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율보다 어려 보이는 재수생들. 한 명은 이미 모의고사 문제집을 펴놓고 풀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완벽한 집중 상태인 학생도 있었다. 공기가 달랐다. 반수반의 자조적 무기력과는 정반대의 — 팽팽한 긴장감.

서율은 빈자리를 찾아 세 번째 줄 끝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서율을 보지 않았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

5시 10분. 차도윤이 들어왔다.

슬림핏 셔츠에 소매를 한 번 접은 팔뚝.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말했다. S반은 열두 명이니 마이크가 필요 없었다.

"자, 다들 앉았지?"

열두 개의 시선이 차도윤에게 모였다. 서율의 시선도.

차도윤은 교실 앞에 서서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서율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선. 차도윤의 눈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지만, 그의 표정은 완벽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이번 학기 S반은 특별합니다."

차도윤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대형 강의실에서의 퍼포먼스와는 달랐다. 낮고, 단정하고, 확신에 찬 톤.

"여기 있는 모든 학생이 서울대에 갑니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서율은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믿는 표정이었다. 아니, 믿고 싶은 표정. 수능까지 남은 날들, 밤샘 자습, 모의고사 스트레스 — 이 모든 것을 견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주는 것. 그것이 차도윤의 능력이었다.

"서울대에 갑니다."

서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서울대에 가는 학생을 모은 건지, 서울대에 보낼 학생을 모은 건지.'

전자라면 이 자리는 실력의 증명이다. 후자라면 이 자리는 투자의 결과다. 서율의 경우, 답은 명확했다.

차도윤이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7월 학기 커리큘럼. 주 6일, 하루 12시간. 국어/수학/영어 집중 관리. 격주 모의고사. 1:1 면담.

"S반은 시그니처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이 학원의 시그니처가 됩니다."

'시그니처. 서명. 학원이 자기 이름으로 내세우는 작품.'

서율은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왼쪽 손목의 팔찌가 소매 밑에서 살짝 보였다. CAU 2025. 중앙대. 자기가 성적으로 간 학교. 미지근하지만 자기 것이었던 곳.

핸드폰이 진동했다.

카카오톡. 엄마.

[엄마: 서율아, S반이라며? 엄마 친구들한테 다 얘기했어 ㅎㅎ]

서율은 화면을 봤다. "다 얘기했어." 이미 퍼졌다. 맘카페에서 학부모 네트워크로, 거기서 다시 다른 학부모들에게. 서율의 S반 입성은 이제 서율만의 일이 아니었다. 엄마의 체면이고, 학원의 마케팅이고, 입결 프레젠테이션의 한 줄이었다.

거부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나갔다.

핸드폰을 엎어놓고 왼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팔찌. 파란 직물. CAU 2025. 이 팔찌를 처음 받던 날, 입학식에서 총장이 "여러분은 중앙대의 자랑입니다"라고 했다. 그때도 자랑이라고 했고, 지금 차도윤도 시그니처라고 한다. 자랑. 시그니처. 전부 누군가의 것이 되라는 말이었다.

'내가 나의 것인 적이 있었나?'

차도윤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서율은 노트를 펴고 볼펜을 들었다. 적어야 할 것을 적었다. 국어 비문학 접근법. 화법과 작문 출제 경향. 차도윤의 강의는 역시 좋았다. 내용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서율의 머릿속에는 강의 내용 대신 다른 것이 맴돌았다.

'나는 왜 여기 앉아 있지?'

'내가 앉고 싶어서? 엄마가 앉히고 싶어서? 차도윤이 앉혀놓고 싶어서?'

'이게 맞나?'

강의가 끝났다. 차도윤이 "수고했어요" 하고 나갔다. 학생들이 하나둘 자습 모드로 전환했다. 서율은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대치동 학원가가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건물들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학원, 학원, 편의점, 학원. 이 거리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서율은 그 시스템의 새로운 부품으로 설치되었다.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하경에게 카톡.

[서율: 하경아, 나 S반 첫 수업 들었어.] [하경: 어땠어?]

서율은 잠시 생각했다.

[서율: 강의는 좋더라.] [하경: 그래서?] [서율: 근데 강의 말고 다른 건 모르겠어.] [하경: ...] [서율: 여기서 공부하면 진짜 서울대 갈 수 있을까?] [하경: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 아니야?]

네가 결정하는 거. 결정. 서율이 가장 못하는 것.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손목을 봤다. 팔찌. 이 팔찌를 빼면 중앙대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 같아서 못 뺀 건지, 아니면 자기가 마지막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의 증거라서 못 뺀 건지.

서율은 팔찌를 만졌다. 직물의 결이 손끝에 닿았다.

S반 교실의 에어컨이 조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대치동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학원 건물들의 불빛이, 서율에게는 거대한 스코어보드처럼 보였다. 모든 불빛 아래 누군가가 앉아 있고, 모든 책상 위에 성적이 있고, 모든 성적 뒤에 누군가의 계산이 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서율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되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자각이 — 아주 작지만 — 무언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

서율은 노트를 폈다. 아까 적었던 한 줄.

'내가 결정한 것 목록'

빈칸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아직 없음. 하지만 이제 세기 시작함.'

볼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대치동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학원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서율도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