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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사피엔스

2화 입결이라는 이름의 화폐

차도윤은 상담실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했다.

학부모보다 5센티미터 높게. 이건 습관이었다. 상대가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대화가 시작되면,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온다. 심리학인지 경험인지 모르지만, 12년째 통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오정민이 들어왔다. 단정한 베이지색 원피스, 샤넬 클래식 가방,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는 동작. 상담실에 들어서며 선글라스를 벗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데, 오정민은 매번 그랬다. 퍼포먼스인지 습관인지.

"원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방금 전 상담이 끝난 참이에요."

사실 10분 전에 끝났다. 하지만 차도윤은 학부모를 기다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바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법을 안다. 이것도 12년의 기술이었다.

오정민이 의자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차도윤을 정면으로 봤다.

"서율이 이야기를 하려고요."

"네, 서율 학생. 반수반에서 잘 적응하고 있어요. 출석도 좋고, 수업 태도도 괜찮습니다."

"그건 기본이고요."

오정민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차도윤은 이 톤을 알고 있었다. '본론으로 가겠다'는 신호.

"서율이를 S반에 넣어주세요."

직구였다. 차도윤은 살짝 놀랐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어머님, S반은 성적 기준이 있어서요. 6모 성적이 나와봐야..."

"성적은 올릴 수 있어요. 환경이 중요한 거잖아요. S반에 가면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유튜브에서."

'유튜브를 보고 왔구나.' 차도윤은 속으로 메모했다. 유튜브 콘텐츠의 ROI가 이런 데서 나온다. 시청에서 신뢰로, 신뢰에서 등록으로, 등록에서 상담으로, 상담에서 업셀링으로. 퍼널이 깔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서율 학생의 현재 내부 평가 점수가 A반 상위권이긴 합니다. S반 커트라인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약간이면 가능하다는 거잖아요."

차도윤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실제로는 이미 답이 있었다.

서율. 중앙대 경영 자퇴. 반수. 만약 이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면? "중대 자퇴 → 반수 → 서울대 합격." 유튜브 썸네일이 눈앞에 그려졌다. 조회수가 보였다. 학원 홈페이지 입결 페이지에 올릴 스토리가 보였다. 학부모 설명회에서 쓸 슬라이드가 보였다.

입결은 화폐였다. 그리고 서율은 잠재적으로 높은 액면가를 가진 화폐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차도윤이 말했다. "다만, 서율 학생의 의지가 중요해요. S반은 강도가 다르거든요."

"서율이 의지는 제가 관리합니다."

차도윤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의지를 관리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네, 어머님. 한번 검토해 보죠."

오정민이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다시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 보였다. 차도윤은 상담실 문이 닫히자 의자 높이를 원래대로 내렸다.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 스튜디오 앱을 열었다. 구독자 수. 24만 7천. 어제보다 80명 늘었다. 그런데 경쟁 강사의 채널은 지난달에 30만을 찍었다.

입꼬리가 내려갔다. 아무도 안 보는 상담실에서, 그 표정은 3초쯤 유지되었다.


같은 날 오후. 6층 조교실.

오전 상담을 마친 차도윤이 지시를 내린 뒤였다. 박유진은 모니터 앞에 앉아 엑셀 파일을 열고 있었다. "7월 학기 반배치 기초 데이터." 학생별 내부 평가 점수, 모의고사 성적, 출석률, 상담 기록이 빼곡했다.

유진은 차도윤의 지시대로 S반 편성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커트라인은 내부 평가 합산 92점 이상. 서율의 점수는 87점이었다.

'5점 차이.'

5점이면 적지 않다. S반 커트라인은 항상 엄격했다. 작년에도 91점인 학생이 탈락한 적이 있었다.

유진은 파일을 저장하고 차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 원장님, S반 편성안 정리했는데요. 한서율 학생 내부 평가가 87점이라 커트에 5점 모자랍니다.]

답이 바로 왔다.

[차도윤: 알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명단에 넣어둬.]

유진은 화면을 바라봤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가. 반배치, 성적 처리, 학부모 민원. 항상 "내가 알아서 해"로 끝나는 지시들. 그 "알아서"의 구체적 내용을 유진은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 규칙이었다.

명단에 '한서율'을 추가했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눌렀다.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학생 질문.

[반수반 김도현: 유진쌤 비문학 25번 풀이 다시 봐도 모르겠어요 ㅠㅠ]

유진은 임용고시 교재를 한쪽으로 밀고 답변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교재 표지에 "2025 교육학 기출분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책등이 깨끗했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것처럼.

답변을 보내고 나니 11시 42분이었다. 임용 시험 원서접수가 10월이었다.

'나 올해도 못 내는 거 아니야?'

모니터 옆에 놓인 머그컵의 커피는 식어 있었다. 유진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학생 질문 목록을 열었다. 세 건이 더 남아 있었다.

임용 교재 위에 S반 편성 서류가 한 장 올려져 있었다. 서류의 무게는 종이 한 장이었지만, 유진에게는 그보다 무거웠다.


다음 날 점심. 반수반 자습실.

서율은 하경 옆 자리에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이상한 거 봤어."

"뭐?"

"5층 행정실에 S반 편성안이 있었는데. 거기 내 이름이 있었어."

하경이 캔커피를 내려놓았다. 서율의 얼굴을 봤다.

"네 이름? 근데 6모 성적 아직 안 나왔잖아."

"그러니까."

"내부 채점으로 올린 거 아니야?"

"내부 채점이어도 커트라인이 있을 거 아니야. 나 솔직히 S반 성적 안 돼."

하경이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천장을 봤다.

"입결 파밍이라는 거 들어봤어?"

"입결 파밍?"

"학원이 이미 잘하는 애들 빼와서 자기네 합격자 수에 넣는 거. 다른 학원 S반 애를 스카우트하거나, 이미 합격권인 학생을 영입해서 실적을 부풀리는 시스템."

"아... 들어는 봤는데."

"근데 너는 잘하는 애가 아니잖아." 하경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경의 장점이자 때로는 칼날인 직설. "미안,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아니, 맞아. 나도 알아. 나 A반 상위권이지 S반 급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입결 파밍이면 이미 잘하는 애를 넣어야 하는데, 너를 넣은 이유가 뭐냐는 거야."

서율은 팔짱을 꼈다. 왼쪽 손목의 팔찌가 소매 밖으로 삐져나왔다.

"혹시... 반수 스토리 때문에?"

하경이 서율을 봤다.

"무슨 뜻이야?"

"중대 자퇴하고 반수해서 서울대 간다? 이거 스토리잖아. 학원 입장에서 마케팅 소재가 되는 거지. 입결이 아니라 스토리를 파는 거라면."

하경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캔커피를 다시 들었다.

"야, 너 생각보다 머리 잘 돌아간다."

"그 머리를 공부에 안 써서 문제지."

"그것도 맞아."

둘 다 웃었지만, 이번에는 웃음 뒤에 무언가가 남았다. 서율은 자기가 학생이 아니라 상품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농담처럼 꺼냈지만,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공기처럼 두 사람 사이에 깔렸다.

"확인해 봐." 하경이 말했다.

"어떻게?"

"모르지. 근데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아?"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말은 쉬웠다.


오후 4시. '대치 맘스 프리미엄' 카카오톡 단톡방.

오정민이 메시지를 올렸다.

[오정민: 혹시 S반 편성 기준 아시는 분? 저희 서율이가 이번에 이야기가 나와서요~ 반수인데 S반이면 괜찮은 거죠?]

겉으로는 질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랑이었다. 대치동 맘카페에서 질문의 형태를 띤 자랑은 하나의 문법이었다. 모두가 그 문법을 알고 있었고, 모두가 그 문법을 사용했다.

답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현주: 축하드려요~ 반수에서 S반이면 대단한 거예요!] [김선영: 와 부럽다... 저희 애는 A반에서 못 올라가고 있는데 ㅠ] [박미라: S반 기준이 이번에 좀 내려간 거 아니에요? 저도 얼핏 들었는데.]

오정민의 손가락이 멈췄다. "S반 기준이 내려갔다"는 말. 이건 축하가 아니라 견제였다. 맘카페의 또 다른 문법 — 축하인 척 하는 깎아내리기.

[오정민: 아, 기준은 모르겠어요~ 원장님이 검토해 주신다고 하셔서요. 저희 서율이가 원래 기본기가 있는 편이라.]

'기본기가 있다'는 것은 '중대라도 갔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오정민은 서율의 중앙대를 자랑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대치동에서 중앙대는 인서울이지만 상위권은 아닌, 묘한 지점에 놓인 학교였다.

[박미라: 아 중대요? 경영이셨죠? 중대 경영이면 나쁘지 않은데, 반수까지 하신다니 의지가 대단하시네요.]

'나쁘지 않은'이라는 수식어. 서율이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것과 정확히 같은 단어를 학부모가 쓰고 있었다. 오정민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정민: 감사해요~ 서율이가 목표가 확실해서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ㅎㅎ]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울을 봤다. 네일이 한 곳 벗겨져 있었다. 오늘 안에 네일샵에 다시 가야 했다. 벗겨진 네일을 보는 것이, 맘카페에서 견제를 받는 것만큼 신경 쓰였다.

'서율이가 S반에 가면 달라져. 달라져야 해.'

그것은 서율을 향한 기대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주문이었다.


밤 9시. 학원 6층 조교실 앞 복도.

서율은 자습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다 6층에서 멈췄다. 조교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차도윤의 목소리였다.

"유진아, 서율이 이번에 S반 올려."

서율은 걸음을 멈췄다. 숨을 참았다.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장님, 서율이 내부 평가가 87점인데요. 커트가 92점이라..."

"커트는 내가 조정할 수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잠시 침묵.

"입결 프레젠테이션에 반수 성공 사례가 필요해. 중대에서 서울대, 스토리가 되잖아. 학부모 설명회에서 이것만 한 콘텐츠가 없어."

유진의 목소리. "근데 서율이가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요? 현재 성적으로는..."

"갈 수 있게 만드는 거지. S반 환경, 집중 관리, 1:1 컨설팅. 투자를 하는 거야. 그리고 못 가면? 그건 학생 역량 부족이지 학원 탓은 아니잖아. 우리는 최선의 환경을 제공한 거고."

차도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계산된 평온. 서율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입결 프레젠테이션. 반수 성공 사례. 스토리가 되잖아.'

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신이 '학생'이 아니라 '콘텐츠'로 불리는 순간을 직접 듣고 있었다.

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 "알겠습니다"에는 동의가 아니라 체념이 묻어 있었다. 서율은 그 뉘앙스를 읽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율은 재빨리 계단으로 이동했다. 가슴이 뛰었다.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4층. 반수반. 문을 열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하경은 이미 집에 간 뒤였다. 교실에는 두세 명만 남아 자습 중이었다.

서율은 가방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입결 프레젠테이션에 필요해.'

'중대에서 서울대, 스토리가 되잖아.'

천천히 왼쪽 손목을 봤다. CAU 2025. 중앙대 팔찌. 이 팔찌를 빼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게 마지막으로 스스로 가진 것이니까. 중앙대 합격은 — 비록 미지근했어도 — 자기 성적으로 간 것이었다. 엄마의 로비가 아니라. 학원의 전략이 아니라.

그런데 지금은?

S반은 자기 실력이 아니었다. 차도윤의 계산이었고, 엄마의 로비였다. 서율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하경에게 카톡을 보냈다.

[서율: 하경아] [서율: 네 말이 맞았어] [서율: 나 입결 파밍 당하는 거 맞는 것 같아]

잠시 후 답이 왔다.

[하경: 뭐?? 어떻게 알았는데?]

서율은 답을 치다가 멈췄다. 차도윤의 말을 그대로 전하기엔 아직 소화가 안 된 말들이었다.

[서율: 내일 얘기할게. 긴 얘기야.]

핸드폰을 엎어놓고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학생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을.

아직 성적표도 나오기 전에, 자신의 가치가 '스토리'로 매겨졌다는 것을.

서율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엘리베이터 배너가 다시 보였다.

"2025 서울대 합격자 47명 배출!"

'컨설팅 포함.'

그 작은 글씨가 이제는 가장 큰 글씨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