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반은 4층 끝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율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형광등이 하나 나가 있어서 복도 끝이 약간 어두웠다. 학원 측에서 의도한 건 아닐 텐데, 반수반으로 향하는 길이 마치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RPG 2회차인데 공략본은 없고 난이도만 올라간 느낌.'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배너가 아직 눈에 밟혔다. "2025 서울대 합격자 47명 배출!" 아래 작은 글씨로 '컨설팅 포함'이 붙어 있었다. 47명. 컨설팅 포함. 뭘 포함했길래 숫자가 부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배너를 만든 사람은 폰트 크기의 위계를 알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었다.
창문이 하나였다. 정확히 하나. 학원 건물 뒤편을 향한 창 너머로 다른 학원 건물의 벽이 보였다. 책상 열두 개가 네 줄로 놓여 있었고, 절반쯤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벽에 학원 측 슬로건이 붙어 있었다.
"작년의 나를 부정하는 용기"
그 옆에 누군가 포스트잇으로 한 줄을 덧붙여놓았다.
"올해의 나도 부정당할 예정"
서율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교실에서 처음으로 공감한 문장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두 번째 줄 끝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후드집업 지퍼를 올렸다. 에어컨이 지나치게 세게 틀어져 있었다. 6월인데 교실 안은 겨울이었다.
"삼각김밥 먹을 거야?"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캔커피를 들고 있는 여자가 서율을 보고 있었다. 통통한 볼, 생머리. 눈이 약간 웃고 있었다 — 다만 완전히 웃고 있지는 않았다.
"뭐?"
"삼각김밥. 너 가방에 끼어 있어. GS에서 사 온 거지?"
서율이 가방 사이드 포켓을 봤다. 참치마요 삼각김밥이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아... 이거 아침에 사놓고 까먹었다."
"반수반의 첫 번째 규칙. 밥은 까먹어도 밥은 챙겨야 해. 안 그러면 진짜 까먹게 돼."
하경이 캔커피를 들어 올렸다.
"이름 뭐야?"
"한서율."
"임하경. 어디서 왔어?"
"중대. 경영."
하경이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한양대. 기공."
"기공?"
"기계공학. 근데 기계보다 사람이 더 복잡하더라고. 그래서 나왔어."
서율은 그제야 웃었다. 제대로 웃은 건 학원에 등록하고 처음이었다.
오후 2시. 대형 강의실.
차도윤의 6월 모의고사 분석 특강은 1층 가장 큰 강의실에서 열렸다. 200석이 꽉 찼다. 반수반 학생들도 내려와 뒤쪽에 앉았다. 서율은 하경 옆에 자리를 잡고 노트를 펼쳤다.
차도윤이 들어왔다.
슬림핏 화이트 셔츠. 소매를 한 번 접은 팔뚝. 투블록 헤어. 강의실 앞에 서자 조명이 그에게로 모였다 — 실제로 조명이 조정된 건지 분위기가 그런 건지, 서율은 구분할 수 없었다.
"자, 여러분."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목소리가 강의실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낮고, 안정적이고, 자신감이 배어 있는 톤.
"6모 국어 1등급 컷이 87점이었어요."
잠깐 뜸을 들였다. 200명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이거 무슨 뜻이냐? 여러분 7문제 틀리면 2등급이라는 거예요. 일곱 문제! 한 손으로 다 세요. 일곱 개."
강의실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경이 옆에서 속삭였다.
"저거 유튜브에서도 똑같이 하더라. 6모 때마다 손가락 드립."
서율은 차도윤을 관찰했다. 강의 내용은 좋았다. 솔직히, 꽤 좋았다. 6모 국어 지문 분석이 논리적이었고, 함정 선지를 짚어내는 방식이 명쾌했다. 이 사람이 스타강사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서율의 눈은 다른 곳으로 갔다.
강의실 뒤편에 카메라가 있었다.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녹화 중. 강의 옆에 "도윤쌤의 입시 돌직구" 로고가 붙은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차도윤은 중요한 포인트를 짚을 때마다 미세하게 카메라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학생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서율은 눈치챘다.
'이건 강의가 아니라 콘텐츠 촬영이구나.'
특강이 끝났다. 차도윤이 "다음 시간에 봐요~" 하고 밝게 마무리한 뒤, 강의실을 나서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복도에 학생이 없다고 판단한 듯, 얼굴에서 웃음이 빠졌다. 입꼬리가 내려갔다. 턱에 힘이 빠졌다. 그 표정은 2초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곧 스탭이 다가왔고, 차도윤은 다시 웃으며 무언가를 지시했다.
서율은 강의실 뒤쪽 출구로 나가면서 그 2초를 봤다.
'쇼가 끝나면 조명도 꺼지는구나.'
저녁 7시. 자습 시간.
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서율아, 오늘 강의 어땠어?"
"좋았어."
"뭐가 좋았어? 구체적으로 말해봐."
서율은 창밖을 봤다. 창 너머로 다른 학원 건물의 불빛이 보였다. 거기도 수업 중이겠지. 대치동의 밤은 학원 불빛으로 낮이 된다.
"국어 분석 잘하시더라. 6모 지문 풀이가 깔끔했어."
"그래, 그 선생님이 유명하잖아. 유튜브도 하시는 분이고. 엄마가 원장님한테 상담 잡아놨어."
"...상담?"
"S반 가려면 이번에 잘 봐야 하잖아. 미리 얼굴 도장 찍어두는 게 좋대. 엄마 친구 아들은 그렇게 해서 S반 갔거든."
서율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으로 갔다. 중앙대 입학식 때 받은 팔찌. 파란색 직물에 'CAU 2025'가 새겨진 싸구려 팔찌. 왜 아직 차고 있는지 자기도 몰랐다. 빼려고 한 적이 세 번 있었는데, 매번 그냥 다시 내렸다.
"엄마, 나 자습 시간이라."
"알았어. 근데 서율아, 이번엔 진짜 집중해야 해. 알지?"
"알아."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엎어놨다.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기 싫었다.
'이게 맞나.'
항상 드는 생각이었다. 중앙대에 갈 때도, 중앙대를 나올 때도, 학원을 등록할 때도. 단 한 번도 "이게 맞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모든 결정은 엄마가 했거나, 주변의 흐름이 했거나, "이것만 아니면 돼"라는 소거법으로 이루어졌다.
'반수도 내가 결정한 게 맞나? 아니면 엄마의 "중대는 아니지"라는 한마디에 떠밀린 건가?'
노트를 펼쳤다. 빈 페이지. 볼펜을 쥐었다. 뭔가를 적으려다 멈췄다.
적을 게 없었다.
밤 10시 15분. GS25 대치점.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서율과 하경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율은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뜯었고, 하경은 세 번째 캔커피를 따고 있었다.
"에너지드링크 세 캔째야. 심장이 뛰는 건 공부 열정인지 카페인인지 모르겠다."
하경이 캔을 들어 건배 제스처를 했다. 서율이 삼각김밥으로 받았다.
"열정이면 좋겠다."
"설마."
둘 다 웃었다. 편의점 앞 형광등 아래서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보면 그냥 수다 떠는 대학생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둘 다 대학생이었다. 다만, 휴학생과 자퇴생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뿐.
"야." 하경이 캔커피를 내려놓았다. "우리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공부하러 왔지."
"진짜? 진짜 공부하러 온 거야, 아니면 작년의 죄책감 갚으러 온 거야?"
서율이 삼각김밥을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경은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학원 건물을 바라봤다. 7층까지 불이 다 켜져 있었다. 자습실, 강의실, 조교실, 원장실. 밤 10시가 넘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들.
"나는 솔직히 모르겠어." 하경이 말했다. "작년에 한양대 붙었을 때 기뻤거든. 진짜 기뻤어. 근데 합격자 발표 보면서 의대 간 애들 보니까, 갑자기 내 합격이 합격이 아닌 것 같은 거야."
"상대적 박탈감?"
"그것보다 심한 거지. 존재 자체에 등급이 매겨지는 느낌. 한양대 기공은 몇 등급이고, 서울대 의대는 몇 등급이고. 학교가 아니라 스펙이 되는 거잖아."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도 비슷한 이유로 여기 있으니까. 중앙대 경영. 나쁘지 않은 학교. 나쁘지 않은 과. 그런데 "나쁘지 않은"이라는 수식어가 이미 답이었다. 좋은 게 아니라 나쁘지 않은 것. 그 미지근함을 견딜 수 없었던 건 서율이 아니라 엄마였지만.
"이게 맞나..." 서율이 중얼거렸다.
"뭐가?"
"아무것도. 일단 오늘 강의나 듣자... 아, 오늘 강의는 끝났다."
"그래서 우리가 편의점에 있는 거지."
하경이 씩 웃었다. 서율도 웃었다. 웃는데 웃긴 건 아니었다.
밤 10시 40분.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원 건물 1층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서율은 습관적으로 계단을 선택했다. 4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게 하루 중 유일한 운동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중 6층을 지날 때, 조교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안경을 쓴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학원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어, 학생? 반수반이지? 이 시간까지 자습했어?"
"네, 이제 가방 챙기러요."
"고생했어. 내일 봐."
조교가 웃었는데, 눈가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서율은 가볍게 목례하고 계단을 올랐다.
5층에서 멈췄다. 상담실과 행정실이 있는 층이었다.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 복도가 조용했다. 형광등 한 개만 켜져 있었다.
행정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원래는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 불빛에 글씨가 선명했다.
-[S반 차기 편성(안) — 7월 학기]-
서율은 걸음을 멈췄다.
문틈 사이로 서류를 봤다. 이름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었다. 열두 개. S반 정원이 열두 명인 모양이었다. 위에서 다섯 번째쯤.
한서율.
눈을 깜빡였다.
6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부 채점이라 해도 정식 성적 발표는 내일이었다. 그런데 S반 편성안에 이미 이름이 올라가 있다.
성적을 보고 뽑은 게 아니라면, 뭘 보고 뽑은 거지?
서율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어딘가에서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3분. 행정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이 명단을 만든 거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4층 반수반으로 돌아갔다. 가방을 챙기면서 벽의 포스트잇을 한 번 더 봤다.
"올해의 나도 부정당할 예정"
부정당하는 게 아니라, 부정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왔다. 대치동의 밤공기는 습했다. 학원 건물들의 불빛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다만 별은 스스로 빛나지만, 여기 불빛은 누군가의 전기세로 켜져 있었다.
서율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S반. 아직 성적도 안 나왔는데.'
왼쪽 손목의 팔찌가 후드 소매 밑에서 미끄러졌다.
'이게 맞나.'
언제나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질문의 무게가 약간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