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방에 들어선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에 손바닥을 짚었다. 콘크리트 벽이 차가웠다, 손목까지 한기가 올라왔다. 옥상의 바람과 비상계단의 한기가 한 몸에 누적되어 있다가 이제야 풀려나오는 느낌이었다.
3초를 가만히 서 있었다. 숨이 어긋나 있어서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게 운동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린은 자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고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 속에 손을 넣었는데도 손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비상계단에서 시우의 손목을 잡았던 손, 시험지를 들었던 손, 적발될까 봐 벽을 짚었던 손이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 그 차가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장을 봤다.
잠이 오지 않았다.
'들킬 뻔했어.'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들킬 뻔했어, 들킬 뻔했어, 들킬 뻔했어.
그런데 그 공포 아래에 다른 감각이 있었다. 시우의 손이 팔을 잡아당겼을 때의 힘, 벽 쪽으로 끌려갈 때 코끝에 스친 시우의 냄새.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후드집업에서 나는, 섬유유연제와 가을 새벽 공기가 섞인 냄새였다.
'이러면 안 돼.'
눈을 감았다,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천장을 보다가 5시에 겨우 눈이 감겼다. 6시 30분 기상 벨이 울렸을 때 이안의 눈 밑은 전날보다 더 짙었다.
오후 2시, 자습 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청람관은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수거하지만 오후 자습 시간에는 사물함에서 꺼낼 수 있다.
화면에 '엄마'.
위장이 뒤틀렸다. 이안은 핸드폰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빈 교실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여보세요."
"이안아."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차분하고 정돈된 목소리였다. 다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이 목소리가 가장 무서운 목소리라는 걸.
"상담 선생님한테 전화 왔어."
"...네."
"점수가 떨어졌다고. 2주 연속."
"컨디션이..."
"이안아." 엄마가 말을 잘랐다. "엄마는 네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했지?"
"...네."
"근데 8점이 떨어진 건 최선이 아니잖아."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의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실망도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8점은 최선이 아니다, 1등에서 3등으로 떨어진 건 최선이 아니다.
"야간자습을 줄이래. 수면 부족이 원인이래. 네 생각은 어때?"
'야간자습을 줄이면 시우를 못 만나.'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안은 자기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점수가 떨어진 이유를 묻는 엄마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시우를 못 만난다'였다.
"줄일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한 박자 쉬었다. 그 한 박자가 평소보다 길었다.
"이안아... 장학 평균이 흔들리면 어떻게 되는지 너 알지?"
이안의 위장이 한 번 더 뒤틀렸다.
"...알아요."
"엄마는 너한테 그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어. 근데 상담 선생님이 그걸 직접 얘기해줘서. 다음 주 한 번 더 떨어지면 누적 평균이 5위권을 벗어날 거래. 그러면 행정실에서 통보가 올 거고, 한 학기 비용이 다시 산정될 거고..."
"엄마."
엄마가 멈췄다.
"알았어요. 다음 주는 안 떨어져요."
"이안아, 엄마는 너를 압박하는 게 아니야. 엄마 마음은 그게 아니야. 다만..."
"알아요."
알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은 압박이 아니라 미안함이었다. 이 통화가 끝나면 엄마는 또 통장 잔고를 들여다볼 것이다. 청람관 한 학기 비용을 정상 가격으로 부담하면 어디까지 줄여서 살 수 있는지 계산할 것이다. 그 계산을 끝낸 다음 또 한참 동안 거실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이안은 그 모든 걸 보지 않고도 봤다.
"엄마는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항상."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빈 교실 창밖을 봤다. 10월 첫째 주 오후, 하늘이 회색이었다. 학원 건물 너머로 작은 도시의 간판들이 보였다.
'항상 믿는다.'
그 말이 "실망이야"보다 더 무거웠다. 믿는다는 말 뒤에는 항상 조건이 붙어 있었다. 네가 1등이니까 믿는다, 네가 최선을 다하니까 믿는다, 네가 흔들리지 않으니까 믿는다.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물을 틀었다, 물소리가 타일 벽에 울렸다. 양손으로 세면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소리에 묻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숨소리를 냈다. 울음이 아니었다, 울지 않았다. 그냥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그것뿐이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봤다. 다크서클이 눈 밑에서 광대뼈까지 내려와 있었고, 입술이 갈라져 있고, 눈이 충혈돼 있었다.
'이게 최선을 다하는 얼굴이야?'
수도꼭지를 잠갔다. 얼굴을 닦고 교실로 돌아갔다.
그날 야간자습 1차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3층 복도 자판기 앞을 지나가는데 자판기 위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편의점 빵, 크림빵이었다. 비닐 포장 위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빵을 집어 들었다, 뒤집어봤다. 유통기한은 내일까지, 오늘 산 것이다.
'누가.'
시우.
확신은 없었다,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알았다. 이안이 점심을 반도 못 먹는 걸 본 사람, 밥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걸 아는 사람, 그런 것을 말하지 않고 빵 하나를 올려놓고 가는 사람이었다.
치우려고 했다. 받으면 안 된다, 이건 선을 넘는 일이다. 야간자습에서 15분 동안 이야기하는 것과 빵을 주고받는 것은 다르다, 눈에 보이는 흔적이 남는다.
비닐을 뜯었다. 먹었다.
크림이 달았다, 목에서 내려갔다. 오늘 하루 제대로 삼킨 첫 번째 음식이었다.
그 발소리가 누구였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감독관이 아니었다는 것만 다행이었다.
새벽 1시 4분.
야간자습실, 지하 1층. 형광등이 지이이, 울었다.
이안은 12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가 줄이라고 했다, 엄마도 줄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있었다.
31번 자리에 시우가 있었다.
감독관이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15분이었다.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13번에 앉았다, 이안의 맞은편.
"빵 먹었어?"
"...네가 놓은 거야?"
"아니."
"거짓말."
시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아?"
"아니까."
침묵이 흘렀다. 형광등 소리만 들렸다.
"우리 이거... 뭐야."
시우가 말했다,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이안을 보지 않고. 말끝이 평소보다 짧게 끊어졌다, 다음 말을 고르다 만 사람의 호흡이었다.
이안의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매일 새벽에 만나?"
"만나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에 자습하는 거야."
"그건, 아니, 그게... 그러면 같은 시간에 이야기하고 같은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고 같은 시간에 손을 잡고."
대답하지 못했다. 시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다만 인정하면, 인정하는 순간 이것은 '감정'이 되고, 감정은 '관계'가 되고, 관계는 이 학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치자."
시우가 말했다. 이안을 보지 않은 채로.
"뭘."
"아무것도 아닌 거. 그렇다고 치자."
이안은 시우의 옆얼굴을 봤다. 형광등 아래에서 시우의 표정은 무심했다. 다만 그 무심함이 예전과 달랐다. 예전의 무심함은 진짜 무관심이었다, 지금의 무심함은 참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가 거짓말이라는 걸. '그렇다고 치자'가 양보라는 걸.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지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시계를 봤다, 1시 14분.
"감독관 와."
이안이 말했다.
시우가 일어나 31번으로 돌아갔다. 평소와 같은 걸음, 느리고 무심한 걸음이었다.
문제지를 보며 펜을 잡았다. 풀리지 않았다, 15분 전에도 풀리지 않았고 15분 후에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야간자습이 끝났다, 새벽 2시.
지하 1층 계단을 올라와 1층 로비를 지나갔다, 시선이 상담실 쪽으로 갔다.
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 2시에 상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건 이상했다. 상담사 김도현의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다. 야간에 상담실을 쓰는 건 특별한 경우뿐이었다.
그냥 지나가야 했다. 다만 발이 멈췄다. 상담실 문의 유리창, 불투명 유리지만 빛은 통과하는, 그 너머로 김도현의 실루엣이 보였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문 옆에 섰다. 문이 1센티미터 열려 있었다.
모니터 화면이 보였다. 야간자습 2차 출석 기록, 날짜별 명단이었다.
'9월 24일 / 서이안, 한시우' '9월 25일 / 서이안, 한시우' '9월 26일 / 서이안, 한시우' '9월 29일 / 서이안, 한시우' '9월 30일 / 서이안, 한시우' '10월 1일 / 서이안, 한시우'
매일 같은 두 이름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들어왔다 나가고, 교대하고, 빠지기도 했다. 이 두 이름만 매일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도현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화면이 한 번 더 넘어갔다. 두 번째 폴더가 열려 있었다.
'특별장학 대상자 모니터링 / 서이안 / 누적 평균 추이'
그래프 한 줄. 7월 첫 주부터 408 라인을 따라 평평하게 가던 선이 이번 주 끝에서 한 칸 아래로 꺾여 있었다. 그 아래에 회색 점선이 하나 더 있었다, 표시 기준선. 아래 한 칸만 더 떨어지면 점선과 만난다.
소리 없이 물러났다, 심장이 목까지 뛰었다.
'알고 있어. 상담사가 알고 있어. 야간자습 패턴도, 장학 라인도, 같이 보고 있어.'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올라가 여자 층으로, 방으로.
침대에 누웠다, 하린이 뒤척이다 조용해졌다.
천장의 어둠을 봤다. 모니터에서 본 빨간 두 점이 눈을 감으면 같이 감겼다. 야자 출석 기록 옆에 작게 찍힌 좌석 표시였다, 12번과 31번. 도현이 일부러 그 자리만 빨간 점으로 표시해둔 것이었다.
'경계선이 있어.'
넘으면 돌아올 수 없는 선. 지금까지는 그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아무것도 아닌 척, 자습하는 사이인 척, 손이 닿은 적 없는 척.
다만 상담사가 기록을 보고 있다, 패턴을 읽고 있다. 이 학원에서 패턴은 곧 증거다. 그리고 장학 라인은 단순한 학원 행정 그래프가 아니라, 이안 가족이 지난 1년 동안 매일 들여다본 통장 잔고와 같은 무게의 선이었다.
'그만둬야 해. 야간자습을 줄여야 해. 시우를 만나지 말아야 해.'
그런데 눈을 감으면 크림빵의 단맛이 떠올랐다. 시우가 "우리 이거 뭐야"라고 물었던 목소리가 들렸고, "그렇다고 치자"라는 말의 무게가 가슴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아무것도 아닌 게 왜 이렇게 무거운 건데.'
잠이 오지 않았다.
형광등 소리 대신 어둠이 있었다. 송풍기 소리 대신 하린의 숨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머릿속에는 상담실 모니터 위에 나란히 찍힌 두 이름과 한 칸 아래로 꺾인 그래프가 떠나지 않았다.
서이안, 한시우. 서이안, 한시우. 서이안, 한시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이안은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았다. 한 손에는 아직 크림빵의 단맛이, 다른 손에는 비상계단에서 잡은 시우의 손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두 감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슴을 잡아당겼다.
천장을 본 채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게 어제와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는 들킬까 봐 잠이 안 왔다면 오늘은 이미 들킨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