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는 형광등이 없었다.
다른 곳은 전부 백색의 형광등인데 이 방만 천장에서 간접 조명이 노랗게 벽을 비추고 있었다. 빛의 색이 다르니 공기의 결도 다르게 느껴졌다. 벽에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이안은 그 문구가 절반의 약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듣긴 듣는다, 다만 들은 이야기가 그 방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서 한 이야기는 상담 기록에 남고, 상담 기록은 학부모에게 간다.
상담사 김도현이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종이컵에 따뜻한 보리차를 내밀었다. 이안은 받지 않았다.
"편하게 앉아. 딱딱한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아닌 척하면서 할 거잖아요.'
이안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허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흔들리지 않게 꽉 쥐었다.
"지난주 금요일 모의고사, 좀 아쉬웠지?"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그럴 수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흔들리니까."
도현이 모니터를 돌려 화면을 보여줬다. 이안의 야간자습 신청 기록이었다.
"근데 내가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이안이 야간자습 2차를 입소 이후 하루도 안 빠졌더라, 매일 새벽 두 시까지."
"효율이 좋아서요."
"그게 정말 효율이 좋은 건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수면 시간이 다섯 시간 이하면 인지 능력이 15퍼센트까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거든. 이번 점수 하락도 수면 부족이 원인일 수 있어."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맞는 것도 아니었다. 수면 부족은 원인의 일부일 뿐이다. 진짜 원인은, 새벽 1시에서 1시 15분 사이의 15분, 그 15분이 24시간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도현이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 다음 화면은 다른 폴더였다.
'특별장학 대상자 모니터링 / 서이안'
"이안아, 누적 표준점수 평균 봤어? 3주 전에는 408 라인이었는데, 지금은 405 근처로 내려와 있어. 다음 주 한 번 더 떨어지면 5위권 평균이 위태해. 우리 둘 다 알지, 그게 무슨 뜻인지."
이안의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도현은 직접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게 더 차가웠다.
"이안아, 내가 한 가지 제안할게. 이번 주부터 야간자습 2차를 줄여보자. 일주일에 세 번만, 나머지 날은 11시에 취침하는 걸로."
'세 번.'
'그러면 나머지 나흘은 시우를...'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이안은 손톱을 더 깊이 박았다. '아니, 그게 왜 중요하지.'
"...생각해볼게요."
"생각이 아니라 실행이 중요해. 학부모님께도 한 번 더 말씀드려야 하거든, 성적 관리 차원에서. 어머님께도 장학 라인은 미리 공유해드리고."
이안의 어깨가 한 번 움찔했다. '미리 공유'라는 말의 무게가 따뜻한 톤에 감춰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도현이 웃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처럼 보였다. 이안은 그 미소가 상담실 벽의 간접 조명 같다고 느꼈다, 따뜻한 척하는 빛.
상담실을 나왔다. 복도가 형광등으로 돌아왔다, 차갑고 하얀 빛이었다. 오히려 이쪽이 편했다.
'야간자습을 줄여야 해. 점수를 올려야 해, 집중해야 해.'
'그러면 15분은 사라져.'
'사라져야 하는 거야.'
교실로 향했다, 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점심시간. 이안은 식당에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오답 노트를 정리했다. 밥을 먹어야 했지만 위장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 아침도 반이나 남겼다.
"언니."
하린이 매점 봉지를 들고 교실로 왔다. 삼각김밥 두 개와 캔커피 하나, 비닐 포장 위에 결제 영수증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하린이 그것들을 이안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안 먹으면 쓰러져."
"괜찮아."
"괜찮지 않잖아." 하린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평소의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언니, 요즘 왜 그래? 얼굴도 안 좋고, 밥도 안 먹고, 새벽에 자습 갔다 들어오면 바로 기절하듯 자고 말이야."
"원래 그래."
"아니, 원래 안 그래. 나 두 달 좀 넘게 같이 살았는데 알아." 하린이 삼각김밥의 비닐을 뜯어 이안 앞으로 밀었다. "뭐 숨기는 거 있지?"
이안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숟가락을 집어 감췄다.
"숨길 게 뭐가 있어."
"모르겠는데, 근데 뭔가 있는 건 알아. 나 바보 아니거든."
이안은 하린을 봤다. 하린의 눈은 단순하지 않았다. 밝고 사교적인 사람이 가진 관찰력이 있었다, 이안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마운데,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진짜."
하린이 2초 동안 이안을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 게 아니라, 더 밀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먹어. 그것만."
이안이 삼각김밥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밥알이 목에서 잘 내려가지 않아 캔커피를 한 모금 곁들였다. 차가운 단맛이 위장 안쪽을 한 번 흔들어 놓고 가라앉았다.
삼켰다.
오후 자습 시간, 복도 자판기 앞.
커피를 뽑으러 나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블랙커피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윙윙거리며 작동했다.
"아메리카노? 설탕도 없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온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공기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한시우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손에 이미 캔커피를 들고 있었다, 마시다 만 것이었다.
"설탕 넣으면 졸려."
"안 넣어도 졸릴 텐데."
"...쓸데없는 말 많다."
"원래 말이 없는데. 너한테만 많아지나 봐."
이안이 시우를 봤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말투에 무언가가 달랐다. 평소의 건조함에 한 방울, 이안을 향한 방향성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오늘 자습 나와?"
시우가 물었다.
이안의 가슴이 조여왔다.
'나가면 안 돼. 상담사가 줄이라고 했어. 점수가 떨어졌어, 집중해야 해.'
"...몰라."
"몰라가 뭐야, 나오든지 말든지지."
"그러니까 몰라."
시우가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안의 커피가 나왔다,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안 나오면 나도 안 나갈 건데."
이안이 멈췄다, 시우를 봤다.
"왜."
"여기서 그래야 되는 거 아냐. '왜냐면 네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이런 거."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시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난이 아닌 톤, 이안은 그 톤을 알았다. 새벽 1시의 톤, 형광등 아래에서만 나오는 목소리였다.
"나도 잠이 안 오는 이유가 바뀐 것 같아서."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컵을 들고 돌아갔다. 복도를 걸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태웠다, 그 열기가 가슴에서 멈추지 않고 번졌다.
'가면 안 돼.'
그날 밤 11시, 이안은 야간자습 신청서를 냈다.
새벽 1시 2분.
감독관이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15분이었다.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13번으로 오지 않았다. 이안의 자리 앞에 서서 말했다.
"나와."
"...뭐?"
"보여줄 데가 있어."
이안은 거부해야 했다. 야간자습 시간에 자습실을 이탈하면 규정 위반이다. 감독관이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없으면 끝이다. 다만 지금은 15분이 있었다.
"어디."
"옥상."
"잠겨 있잖아."
시우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낡은 은색 열쇠였다. "전에 여기 있던 형이 줬어, 비상키."
이안은 시우의 눈을 봤다. 시우의 눈은 처음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를 말하지 않으면서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안이 일어났다.
지하 1층에서 5층까지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심장이 뛰었다, 운동 때문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우의 등이 보였다. 검정 후드, 목덜미. 비상등 불빛 아래에서 시우의 윤곽이 붉게 물들었다.
시우가 옥상 문을 열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비상계단에 울렸다.
문이 열렸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원한 공기가 밀려왔다. 10월의 첫 새벽, 영하는 아니었지만 학원 안의 정체된 공기에 익숙해진 코에는 한기에 가까웠다. 폐가 한 번 차게 식었다. 다만 숨을 쉴 수 있었다, 청람관에 온 이후 처음으로 진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마른 채였다. 난간 너머로 서울 방향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멀리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 새벽인데도 꺼지지 않은 불.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아직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시우가 난간에 기대섰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는 꺼내지 않았다.
"안 피워?"
"피우는 척만 해. 입에 뭔가 물고 있으면 좀 나아."
"뭐가."
"뭔지 모르겠는 게."
이안은 시우에게서 2미터 떨어진 곳에 섰다. 난간을 잡았다, 금속이 차가워서 손이 얼얼했지만 놓지 않았다.
"여기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데야."
시우가 먼 불빛을 보며 말했다.
"저 밑에서는 다 공부하는 척, 괜찮은 척, 의미 있는 척 해야 하잖아. 여기는 안 해도 돼, 좀 시린 대신."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1등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성적 게시판도 없고 상담사도 없고 엄마의 전화도 없었다.
"...나 1등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안이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그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시우가 이안을 봤다.
"그건 네가 정한 게 아니잖아."
"...뭐?"
"1등이 네 전부라는 거. 네가 정한 게 아니잖아. 네 엄마가 정했거나, 이 학원이 정했거나. 네가 정한 적 있어?"
대답하지 못했다. 손이 흔들렸다. 한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시우에게 말하지 않은 것, 1등이 아니라 '5위 안'이어야 하는 진짜 이유. 그걸 말하면 시우는 이해해줄 거다, 동시에 이안의 자존심의 마지막 한 줄이 풀려버린다. 가난을 말하는 것은 이안에게 가장 큰 통제 상실이었다.
"넌?" 이안이 물었다. "넌 뭔데. 2등을 하면서 왜 아무것도 아닌 척해?"
시우가 담배를 입에서 뗐다. 불 안 붙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벽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안은 시우의 옆얼굴을 봤다. 새벽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왼쪽 귀의 흉터가 보였다, 하얗게 아문 작은 자국이었다.
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이안이 피하지 않았다.
"들어가자, 시려."
시우가 먼저 돌아섰다.
비상계단을 내려가는데 시우의 후드집업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접힌 종이였다. 시우는 알아채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안이 주웠다, 펼쳤다.
시험지였다. 이번 주가 아니라 이전, 지난주 금요일 모의고사의 수학 영역. 구겨졌다가 펴진 자국이 있었다.
이안의 눈이 답안에 멈췄다.
22번. 공통 단답형 자리, 가장 정답률이 낮은 칸. 정답 9, 시우의 답 1. 답안지 위에 지우개로 지운 자국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처음에 '9'를 적었던 흔적, 그걸 지우고 '1'을 다시 적은 자국이었다. 지워진 9의 곡선이 1의 직선 옆에 흐릿하게 살아 있었다.
이건 전에 의아했던 것이었다. 다만 다른 문항들도 있었다.
21번. 공통 단답형. 정답 4, 시우의 답 11. 한 자릿수 정답을 두 자릿수로 바꿔놓은 답. 옆 여백에 풀이 흔적이 잠깐 있다가 지워져 있었다. 정답 4로 가는 풀이의 마지막 줄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30번. 선택 단답형. 정답 7, 시우의 답 12. 답란 위에 처음에는 7로 적혀 있었다가 지우고 12로 바꾼 자국. 너무 가까운 거리라 펜 자국이 살짝 겹쳐 있었다.
수요일 새벽에 시우가 짚어준 그 분기점. '식을 너무 깔끔하게 세우면 함정에 들어간다'고 했던 그 줄. 그때 시우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친 함정 답이 정확히 12였다.
답을 알면서, 지우고, 다른 답을 적었다.
이안의 손이 흔들렸다.
"시우."
앞서 가던 시우가 멈췄다. 돌아봤다. 이안이 시험지를 들고 있는 걸 보고 표정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무심함이 벗겨지고 그 아래에 있던 것이 스쳤다, 당황이 아니라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거... 답 알면서 틀린 거야?"
시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을 한 칸 올라와 시험지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이안이 시험지를 뒤로 감췄다.
"대답해."
"돌려줘."
"대답하면."
시우의 턱이 굳었다. 비상등의 붉은 빛 아래에서 시우의 얼굴이 날카로워 보였다. 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 봐. 22번 답란. 9를 적었다가 지우고 1을 적었어. 30번도, 21번도. 정답을 한 번 적었다가 지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
"왜 일부러 틀린 답을 적었어."
이안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는 자연수가 아니었다. 답란이 아니라 그 옆, 지우개가 종이 위에 남긴 자국이었다. 그 흔적이 시우 안쪽 어딘가의 결정이었다는 걸 이안은 알아챘다. 자기가 묻고 싶은 것은 답이 아니라 그 결정이라는 것도.
시우가 벽에 기댔다. 비상계단의 좁은 공간, 두 사람 사이에 한 계단의 거리. 천장을 올려다봤다, 비상등이 깜빡였다.
"넌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게 무슨..."
"나는 1등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놈이야."
이안이 멈췄다.
"의대 가는 거 아버지 뜻이야. 형이 서울대 경영 가니까 나도 의대 가라고. 형이 못 가본 학부로 한 칸 더 올려놓으래. 내 인생은 아버지 프로젝트의 2단계야." 시우의 목소리는 평소의 건조한 톤이었지만 그 밑에서 무언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안 해. 일부러 망쳐, 그러면 아버지가 포기하겠지. 나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시험을 망쳐?"
"삼수째야. 처음 해엔 진짜 공부 안 했어, 두 번째 해엔 시험만 망쳤어. 올해는, 몰라, 적당히. 2등이면 아버지가 포기는 안 하는데 만족도 안 하잖아, 애매한 자리. 견딜 만한 자리."
이안은 시우의 옆에서 한 박자 멈췄다. 시우의 가족, 변호사 아버지, 서울대 경영 형. 그게 시우가 처음 입에 올린 신상의 전부였다. 어디 로펌인지, 어느 학원에 다녔는지, 형 이름이 뭔지, 그런 건 시우가 말하지 않았다. 이안도 묻지 않았다.
이안이 알고 싶은 건 시우의 가족도 아니고 시우의 학교도 아니었다. 이안이 본 건 답란 옆에 살아 있는 9의 곡선이었다, 그것 하나로 이미 충분했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
시우의 손가락이 자기 왼쪽 귀, 흉터 자리를 한 번 눌렀다. 무심히 매만지는 게 아니라 아픈 자리를 일부러 누르는 손짓이었다. 손이 내려가자 시우가 이안을 봤다. 직선으로.
"1등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놈, 제 인생 제가 망치는 놈. 네가 끌리면 안 되는 사람."
시우의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웃은 게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매기는 점수표를 한 칸씩 깎아 내리는 표정이었다.
이안의 손이 흔들렸다, 시험지가 바스락거렸다.
'맞아, 이 사람에게 끌리면 안 돼.'
'자기를 파괴하는 사람이야. 점수를 일부러 망치는 사람이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점수의 추락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야.'
'이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무너져.'
'이미 무너지고 있잖아.'
이안은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비상계단 난간 위에 접지 않고 구기지 않고 그냥 올려놓았다.
그리고 시우의 손을 잡았다.
시우의 손은 차가웠다, 옥상의 바람보다 더. 이안의 손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우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이안이 잡은 순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아. 그래도."
이안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우가 이안을 봤다. 표정이 없던 얼굴에 금이 갔다. 무심함의 껍데기에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것, 간절함과 두려움, 오랫동안 원하지 않으려 했던 것에 대한 항복 같은 것이었다.
"넌 바보야."
시우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한테 끌리면 점수 떨어져."
"이미 떨어졌어."
"더 떨어져."
"...알아."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아 있었다, 비상계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비상등이 붉게 깜빡이고 어디선가 송풍기 소리가 울었다.
15분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때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비상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감독관 교대가 끝난 시간이었다. 누군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3층을 지나고 있었다, 4층, 가까워졌다.
이안이 시우의 손을 놓으려 했다. 시우가 놓지 않았다.
"가야 돼."
이안이 속삭였다.
"알아."
다만 손을 놓지 않았다. 1초, 2초, 발소리가 4층과 5층 사이 계단참에 도달했다.
시우가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옥상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시우가 문을 잠그고 반대편 비상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이안이 뒤를 따랐다, 심장이 귀까지 뛰었다.
적발되면 끝이었다. 야간자습 이탈, 이성 학생과 단둘이 옥상, 즉시 퇴원. 거기에 장학 박탈까지 겹친다.
다만 심장이 뛰는 이유는 공포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직 손바닥에 시우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차가웠던 손이 마지막에는 따뜻해져 있었다.
각자의 층으로 돌아갔다. 복도에서 헤어질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은 자습실에 돌아가지 않고 방으로 갔다. 하린은 이미 자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형광등 대신 어둠이 있었다. 송풍기 소리 대신 하린의 고른 숨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손바닥에는 아직 시우의 손가락 끝 감각이 남아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은 독이다. 점수를 끌어내릴 것이고, 엄마를 실망시킬 것이고, 상담사의 관리 대상에 올릴 것이고, 결국 이 기숙학원에서 쫓겨나게 만들 것이다. 장학과 의대를 동시에 잃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숨을 쉴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 감옥 같은 곳에서.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시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건 네가 정한 게 아니잖아."'
그 말이 형광등 소리보다 오래 울렸다.
손이 흔들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흔들림이 무서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이안은 처음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점수가 아닌, 1등이 아닌, 엄마의 인정이 아닌, 장학이 아닌, 이름을 붙이기엔 아직 너무 위험한 그것을.
그리고 5층 옥상 비상계단에는 아직 시험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정답을 지우고 오답을 적은 시험지. 바람에 페이지가 한 번 넘어갔다, 아무도 줍지 않는.
'답을 알면서.'
'왜 틀린 걸 골랐을까.'
그 질문은 시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