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아침, 이안은 평소보다 1분 늦게 일어났다.
1분, 고작 1분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시스템에서 1분의 오차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뜨는 게 규칙이었고, 그 규칙이 어긋난 건 청람관에 입소한 이후 처음이었다.
'어젯밤 때문이야.'
생각하자마자 밀어냈다. 어젯밤은 없었다. 피곤해서 잠깐 감정이 흔들렸을 뿐이고 이미 지난 일이다.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눈이 부어 있었다. 찬물로 얼굴을 세 번 씻었다. 부기는 수분 배출로 해결된다, 물을 적게 마시면 된다.
"언니, 오늘 눈 왜 그래?"
하린이 이불 속에서 한쪽 눈을 뜨고 물었다.
"알레르기."
"9월에?"
"환기가 안 돼서 그래.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6시 42분, 평소보다 2분 늦었다. 식당 줄이 길어지면 그만큼 식사 시간이 줄어든다.
'통제해. 일상으로 돌아가면 돼.'
식당 입구에서 발이 멈췄다.
한시우가 배식대 앞에 서 있었다. 검정 후드집업에 머리카락이 눈을 가린 채 국을 받아 식판에 올리고 있었다. 매일 보는 사람이, 매일 있는 장소에서, 매일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안의 발이 멈췄다.
시선을 떼고 줄의 반대편에 섰다. 시우가 있는 쪽의 반대편, 최대한 멀리.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가 되어줄 거라는 비과학적인 기대를 안고서.
밥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 동작이 따로 노는 세 사람의 일처럼 분리돼 있었다.
배식대 너머로 시우가 앉는 게 보였다. 이안 쪽을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시선의 끝만 한 번 이쪽으로 떨어졌다가 곧 식판 위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밥을 먹고 국을 마시고 식판을 들고 나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무 일 없었으니까.
'...그래, 아무 일 없었어.'
그런데 왜 그 '아무 일 없음'이 위장을 쥐어짜는 것 같을까.
이안은 밥을 반이나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
하루가 지났다.
국어, 수학, 영어, 탐구. 모든 수업을 들었고 모든 필기를 했고 모든 오답을 정리했다. 이안의 시스템은 평소와 같이 작동했다, 겉으로는.
오후 자습 시간, 수학 기출 4회분 분석을 시작해야 하는데 3분째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문제는 읽혔는데 숫자가 들어와도 의미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제지 위에서 시선만 미끄러졌다.
'캔커피.'
뜬금없이 그게 떠올랐다. 차가운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 자습실의 공기와 만나 번지던 물기. 그리고 "울어도 돼."
이안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앞자리 학생이 돌아봤다. 고개를 숙였다.
'집중해.'
오후 4시 무렵, 본관 1층.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평소라면 그대로 교실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매점 자판기 앞 모퉁이를 돌다가 발이 멈췄다.
자판기와 비상구 문 사이, 잘 보이지 않는 30센티미터쯤 되는 틈에 사람이 있었다.
시우였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자판기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손에 무언가가 있었다. 본관에 들어올 때 보관함에 맡겼어야 하는 휴대전화였다.
이안은 한 박자 멈췄다가 자판기 옆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둘이 마주칠 일이 없는 위치였지만, 자판기 옆 음수대 쪽에서 종이컵을 뽑아 들면 시우의 옆모습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걸렸다.
시우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한 번 짧게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끌어내리는 동작이었다. 새로고침. 손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화면이 다시 떠오르길 기다리며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안의 위치에서는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우의 입가가 한 번 일그러졌다, 글자를 읽는 표정. 좋은 소식을 본 표정은 아니었다.
시우가 화면을 잠그고 휴대전화를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들어 복도 끝을 흘끔 보고는 자판기 뒤에서 빠져나왔다.
이안 쪽으로 한 걸음 떼다가 멈췄다. 그제야 이안을 본 것이다.
"..."
"..."
두 사람은 서로의 손에 든 종이컵을 봤다. 정확히는 종이컵에 안 따른 물을 봤다, 이안이 물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우의 시선이 한 번 더 짧게 자판기 뒤쪽을 훑었다, 보였다는 걸 아는 시선이었다.
말은 안 했다. 시우가 후드 안쪽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넣고는 음수대 옆을 그대로 지나쳐 본관 출구 쪽으로 나갔다. 이안이 종이컵을 음수대에 끼우고 물을 받았다. 받는 동안에는 시우의 등이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것을 봤다.
'본관 보관함을 한 번 들렀다 나온 거야. 잠깐 꺼내서, 잠깐 보고, 다시 넣고.'
설명은 머리에서 만들어졌다. 시우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단어들도 같이 떠올랐다. 본 적은 없어도 머리에 있는 단어들이었다. 청람관 같은 곳에서 새벽 1시까지 깨어 있는 사람이 폰을 손에 넣으면 들어갈 만한 자리가 몇 개나 있겠나.
이안은 그 단어들을 더 이상 굴리지 않기로 했다. 종이컵을 들고 복도를 걸었다, 평소처럼.
그날 밤, 야간자습 2차 신청서를 작성했다. 펜이 흔들리지 않았다. 어젯밤은 예외였을 뿐이다.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갔다. 종이 냄새와 형광등 소리, 그리고 자신의 자리 12번.
앉았다, 문제지를 펼쳤다.
31번 자리에 불이 켜져 있었다.
보지 않기로 했다.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점화식, 수열의 귀납법. 손이 움직였다.
11시 30분 여섯 명, 12시 세 명, 12시 40분 두 명.
언제나 그랬듯.
새벽 1시.
감독관이 순찰을 돌았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가 자습실 문을 열고 안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안은 시계를 봤다. 1시 2분. 지금부터 다음 감독관이 올 때까지 약 15분, 교대 시간. 어제도 그랬다. 1시에 한 명이 나가면 1시 15분쯤 다음 사람이 온다.
'왜 그걸 세고 있지.'
31번 자리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시우가 일어났다. 기지개를 켰다. 양팔을 위로 뻗어 등을 젖히고 고개를 돌려 목을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나와 자습실 뒤쪽 창문으로 걸어갔다.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한 뼘쯤 밀었다. 복도 쪽 환기구의 약한 흡인과 만나 9월 말 새벽의 옅은 한기가 천천히 흘러들었다. 형광등 아래 정체된 공기가 한 칸씩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이안의 볼에 시원한 기운이 닿았다.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숨을 쉴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우가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봤다. 지하 1층이라 보이는 건 건물 벽과 환기구뿐이었지만, 바깥 공기를 마시는 시우의 등은 이 건물 안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1분 후 시우가 창문을 닫았다. 돌아서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은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너무 늦었다, 보고 있었다는 게 분명했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시우가 이안의 자리 옆에 멈췄다. 이안은 문제지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척이었다. 눈앞의 수식이 외국어처럼 보였다.
"넌 왜 새벽까지 해?"
낮은 목소리, 어젯밤과 같은 톤. 건조하고, 담담하고, 판단이 없는.
이안은 2초간 대답하지 않았다. 그 2초 동안 여러 개의 답이 스쳤다.
'효율이 좋으니까. 새벽이 집중이 잘 되니까. 다른 사람이 없어서 방해받지 않으니까.'
"효율이 좋으니까."
"거짓말."
고개를 들었다. 시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다만 눈이 이안을 읽고 있었다.
"...뭐가 거짓말이야."
"새벽에 효율 좋은 사람은 손이 안 떨려."
이안의 손이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왼손 아래에 숨겼다.
"안 떨려."
"아까 떨었어."
"...추워서."
"여기 송풍기 돌아가도 25도 위야. 안 추워."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광등이 지이이, 울었다.
시우가 이안의 맞은편, 13번 자리에 앉았다. 칸막이 너머가 아니라 이쪽에, 이안의 공간에, 허락 없이.
"뭐 하는 거야."
"앉은 거."
"네 자리 아니잖아."
"감독관 없는데."
이안은 할 말을 잃었다. 시우는 13번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시선이었다. 말하라는 것도, 웃으라는 것도 아닌, 그냥 거기 있는 것.
15분, 감독관이 없는 15분.
이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시우도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이안은 문제지를 넘기지도 않았다.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시우가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공기를 바꿨다. 정체되어 있던 자습실의 공기가, 아까 시우가 열었던 창문처럼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왜 여기 있어."
이안이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뭐가."
"공부 안 하면서. 왜 새벽까지 여기 있냐고."
시우가 1초 생각했다.
"방에 가면 잠이 안 와."
"그건 이유가 안 돼."
"되는데. 잠이 안 오니까 잠 안 자도 되는 데로 오는 거지."
이안은 그 논리의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시우의 말은 논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잠이 안 오니까 잠 안 자도 되는 곳으로 간다, 단순하고 솔직하고 이안에게는 불가능한 종류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면 이 시간에 뭐 해."
"생각."
"뭘 생각하는데."
"별거 아닌 것들."
시우가 형광등을 올려다봤다.
"저 형광등이 왜 저 소리를 내는지, 송풍기 돌아가는 주기, 저 빈자리에 원래 누가 앉았는지. 그런 거."
이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여유'라는 단어 자체가 이안의 사전에 없었다. 모든 시간은 수능을 향한 투자였고, 투자되지 않은 시간은 낭비였다.
그런데 시우는 그 '낭비'를 새벽마다 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기숙 2등이었다.
그 사실이 이안의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시계를 봤다. 1시 12분, 3분 남았다.
"감독관 와."
이안이 말했다. 시우가 일어났다. 13번에서 나와 31번으로 돌아가려다 멈췄다.
"내일도 나와?"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우도 기다리지 않았다. 31번 자리, 칸막이 너머로 후드 뒤통수만 보였다.
1시 16분, 감독관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이안은 문제지를 넘겼다. 5번 문항, 풀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이안은 야간자습을 신청했다.
목적은 공부였다.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새벽 시간대의 효율이 좋고 방에 있으면 하린의 잠꼬대에 깨기 때문에 자습실이 낫다.
합리적인 이유.
하지만 새벽 1시가 되면 시계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감독관의 발소리가 멀어지면 15분을 세기 시작했다. 시우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0.5초 빨라졌다.
수요일 새벽.
감독관이 나간 뒤 시우가 13번에 왔다. 이번에는 이안이 먼저 말했다.
"지난주 금요일 모의고사 30번 풀어봤어?"
시우가 눈을 깜빡였다. 처음으로 예상 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단답형, 정답이 7이고 네 답이 12였잖아. 어떻게 풀었길래 12가 나와?"
"보통 새벽에 그런 거 묻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물어."
시우가 웃었다. 진짜 웃은 건 아니었다, 입꼬리가 1밀리미터 올라간 정도였다. 다만 이안은 그걸 봤다.
"12가 나오려면 접근 자체를 한 칸 비틀어야 돼. 너처럼 정공법으로 식을 세우면 그 답이 안 나와."
"그러니까 어디서 비튼 거야."
시우가 펜을 꺼냈다. 이안의 문제지 여백에 손을 올렸지만 풀이를 처음부터 적지는 않았다. 점화식 두 줄, 대칭축 한 줄, 그리고 마지막 줄에 12를 동그라미 쳤다. 그 옆에 화살표를 그어 7을 적었다.
"여기. 이 줄에서 변수를 한 칸 옮기면 12로 빠지고, 안 옮기면 7. 12 쪽이 함정 답이야. 식을 너무 깔끔하게 세우면 오히려 함정에 들어가."
"너무 깔끔하게 세우면."
"응. 그래서 22번 단답형도 보통 첫 풀이가 다 안 맞아. 한 번 의심하고 두 번째 풀이로 가야 답이 자연수로 떨어져."
이안은 시우의 손끝을 봤다. 4단계 정공 풀이가 빠진 채로 핵심 분기 한 줄로만 짚는 손이었다. 함정 답 12 옆의 동그라미는 시우 자신이 처음에 거기에 빠졌었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함정에 진짜 빠진 사람의 손이라면 마지막 줄의 7이 흐릿했어야 했다. 시우가 짚은 7은 너무 또렷했다, 자기가 거기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던 사람의 글씨처럼.
이안은 그 모순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직.
'이 사람... 나보다 잘해.'
그 인식이 가슴을 찔렀다. 질투가 아니었다, 두려움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시우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안에게 돌려주려는 순간 손끝이 닿았다.
펜의 양쪽 끝을 각자 잡고 있었다, 중간에서 손가락이 겹쳤다. 시우의 손은 차가웠고 이안의 손은 따뜻했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펜이 바닥에 떨어져 딸깍 소리를 냈다.
침묵.
시우가 펜을 주워 이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 말 없이.
이안의 귀가 뜨거웠다. 형광등 아래에서 귀 끝이 빨개진 게 보일까 봐 머리카락을 풀어 양쪽으로 내렸다.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시우는 못 본 척했다, 아마도.
1시 14분.
"가."
이안이 말했다. 시우가 일어났다. 돌아가다가 멈췄다.
"넌, 이 시간이 아니면 사람이랑 말 안 하지?"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그래... 그런데, 너한테는 좀 말이 많아져."
시우가 자기 말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러고는 31번 자리로 돌아갔다.
금요일, 모의고사.
이안은 시험지를 받아 들고 이름을 적었다. 서이안, 획이 흔들렸다. 손떨림은 아침부터 있었다. 어제 새벽에 3시까지 자습실에 있었다. 1시 15분에 시우가 돌아간 뒤에도 두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공부한 게 아니었다, 시우가 짚어준 분기점을 다시 보고 있었다. 문제지 여백의 동그라미와 화살표, 삐뚤빼뚤한데 정확한 표시였다.
국어 영역, 1번부터.
첫 장은 독서론이었다. 짧은 지문, 평이한 문항. 평소라면 1분이 채 안 걸려야 정상이었다. 이안은 같은 줄을 두 번 읽었다, 세 번. 단어가 줄지 않고 늘어났다.
'집중해.'
3번 문제에서 지문의 같은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시험이 끝났을 때 이안은 알고 있었다. 망쳤다. '망쳤다'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 같지 않았다. 5~6문제에서 확신이 없었다, 평소라면 두 문제 이하였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시우와 마주쳤다. 시우는 시험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접은 게 아니라 그냥 구겨서.
"시험 어땠어?"
시우가 물었다. 일상적인 질문, 누구나 하는.
"...보통."
"보통이 몇 점인데, 너한테."
이안은 대답하지 않고 지나갔다. 시우도 잡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1층 로비, 대형 모니터. 평소와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월요일이니까, 성적 게시일이니까.
모니터를 봤다.
'1위 / 박준형 / 406점 / ▲6' '2위 / 한시우 / 405점 / ▲1' '3위 / 서이안 / 400점 / ▼8'
빨간색 화살표, 하락, 8점, 1등에서 3등.
이안은 서 있었다.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수군거림이 물속 소리처럼 뭉개졌다.
'8점.'
'8점이 떨어졌어.'
'3등.'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단어가 있었다. 자존심이 아니었다, 1등이라는 호칭도 아니었다.
'장학.'
장학 유지 조건은 주간 모의고사 표준점수 합 상위 5위 이내였다. 이번 주는 3위, 5위 안에는 들었다. 다만 다음 주에 또 떨어지면 누적 평균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건 이번 한 번이야. 다음 주에 회복하면 돼.'
스스로에게 말하는 그 문장이 너무 빨리 나왔다. 너무 익숙했다. 부모가 자기에게 했던 말의 어순을 그대로 베껴 쓰는 자신을 느꼈다.
"서이안이 3등? 뭐야, 무슨 일 있어?"
"학원 온 이후로 1등 놓친 적 없었는데."
"빌보드 1위 자리가 갈렸어, 오늘."
듣지 않았다. 듣지 않는 기술, 오래전에 배운 기술. 다만 오늘은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귀를 막아도 스며드는 종류의 소리였다.
'엄마한테 전화가 올 거야. 오늘이나 내일.'
'"이안아, 무슨 일이야?"'
'나는 "컨디션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겠지. 엄마는 "다음엔 꼭 회복하렴"이라고 하겠지. 그 말이 "실망이야"보다 더 아플 거야.'
몸이 돌아서려는 순간.
"이안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 시우가 아니었다.
돌아봤다.
학원 상담사 김도현이었다. 재킷을 말끔하게 입고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그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안은 알고 있었다. 보고서, 학부모 통보, 관리 대상.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이안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 넣었다, 보이지 않게.
"...네."
뒤에서 시우가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을 이안은 알지 못했다. 시우의 시선이 '3위 서이안'에 멈춰 있다가 이안의 등을 따라 상담실 방향으로 움직인 것을.
시우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입 모양은 읽을 수 있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