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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자습

1화 형광등 아래

펜 끝이 흔들렸다.

서이안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 쥐었다. 힘을 주자 흔들림이 잠시 잦아들었다. 수면 부족, 카페인, 눈의 피로. 원인을 하나씩 짚어두는 것까지가 이안의 자기관리에 포함됐다.

문제 될 거 없다.

청람관 지하 1층 야간자습실은 형광등 소리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지이이, 하는 고주파 진동에 환기 송풍기가 가끔 우우, 하고 끼어들었고, 그 위로 이안의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가늘게 얹혔다. 그게 전부였다. 칸막이 책상 50개 중 불이 켜진 곳은 다섯 개, 그중에서도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건 늘 둘이었다.

자신과, 31번 자리.

이안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이번 주 학습 계획은 미적분 14번 류 준킬러 시간 단축과 22번 단답형 오답 정리였다. 새벽에 손댈 분량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책상 위 시계가 1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이안은 14번 단축 풀이 두 세트를 막 끝낸 참이었다.

다음은 22번. 공통 단답형 자리, 가장 정답률이 낮은 칸.

'집중해.'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이안은 펜의 위치를 다시 잡았다.

칸막이 너머 31번 자리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천천히. 평소 그 자리의 사람은 책장을 빠르게 넘기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오래 봤다. 이안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한순간 멈칫했다. 다른 사람이 책장을 넘기는 속도까지 머릿속에 새겨둔 게 자기관리의 범주 안인지 바깥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시 펜을 잡았다.


청람관의 아침은 6시 30분에 시작된다.

기상 벨이 울리기 10분 전, 이안의 눈은 이미 떠 있었다. 다섯 시간 수면이 자기관리의 기준선이었다. 그 이상은 사치, 그 이하는 비효율. 정확히 다섯 시간을 자고 알람보다 먼저 깨는 것까지가 루틴이었다.

이불을 개고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얼굴은 다크서클이 관자놀이까지 번져 있었지만 이안은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얼굴은 변수가 아니었다.

"언니, 진짜... 잠 좀 자."

아래 침대에서 룸메이트 유하린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중얼거렸다. 이불 밖으로 나온 머리카락 한 줌이 베개 옆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린은 이안보다 생일이 두 달 늦었다. 같은 학번인데 그 두 달이 '언니'라는 호칭을 만들었다.

"일어나. 식당 줄 서야 돼."

"5분만..."

"3분."

이안은 세면을 마치고 학원복으로 갈아입었다. 청람관 지정 체육복 상의에 검정 트레이닝 바지, 머리카락을 높이 묶고 볼펜 두 자루와 수정테이프를 필통에 넣었다. 오늘은 월요일, 성적 게시일이다.

위장이 살짝 뒤틀렸다. 이안은 그 감각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위장이 뒤틀리는 건 사흘에 한 번 있는 일이었고, 월요일이라는 변수는 거기에 안 들어 있었다.

거짓말, 사실은 들어 있었다.


1층 로비의 대형 모니터 앞에는 이미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매주 금요일 모의고사, 월요일 오전 8시 성적 게시. 청람관의 리듬은 이 두 날을 축으로 돌아갔다. 성적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특실을 유지하는지 4인실로 쫓겨나는지, 모든 것이 저 화면 위의 숫자로 결정됐다.

이안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모니터를 봤다.

'1위 / 서이안 / 408점 / ▲2'

숨을 내쉬었다. 아주 조금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지난주 406, 이번 주 408. 청람관에서 쓰는 환산 표준점수 합이었다. 평가원 표점에 절대평가 영어 등급과 탐구 두 과목 표점을 환산해 600점 부근을 만점으로 잡은 학원 내부 지표였다. 408이면 대략 상위 0.5퍼센트 안쪽이었다. 청람관 특별장학의 유지 조건은 주간 모의고사 환산 표준점수 합 상위 5위 이내, 3주 연속 5위권 밖이면 자동 박탈. 이안은 입소 11주째, 5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유지했어. 한 주 더.'

머릿속의 다른 목소리가 즉각 따라붙었다.

'유지가 아니라 그냥 본전이야.'

이안은 그 목소리를 제자리에 도로 집어넣었다. 1등인데 왜 안도하는 걸까. 1등이면 당연한 건데 왜 매주 이 화면 앞에서 심장이 빨라질까. 답을 알면서도 답을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깔끔한 처리법이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2위로 내려갔다.

'2위 / 한시우 / 404점 / ▼1'

4점 차였다. 지난주 시우는 405였고 이번 주 1점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2등이었다. 이안이 입소한 7월 첫 주 이래로 한시우는 늘 2등이었다. 한 번도 1등을 한 적이 없는, 한 번도 3등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깔끔한 2등.

'저 사람은 왜 항상 저 자리에 있을까.'

이안은 그 의문도 도로 밀어 넣었다. 남의 사정은 변수가 아니었다.

시선을 옮기려는데 로비 끝에서 해당 이름의 주인이 눈에 들어왔다.

한시우였다. 검정 후드집업에 손을 찔러 넣고 성적 게시판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식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눈을 반쯤 가렸다. 2등인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고, 꼴등인 사람의 걸음도 아니었다. 성적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야, 서이안 또 1등이다."

"저 언니는 진짜 기계냐."

"아 조용히 해, 들리잖아."

뒤에서 수군거림이 흘렀다. 이안은 귀를 닫았다. 듣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배운 기술이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람관의 하루는 촘촘했다.

오전 6시 50분 조식, 7시 30분 국어, 9시 수학, 10시 30분 영어. 11시부터는 요일에 따라 영어 보강이 붙거나 자습/상담 호출 슬롯으로 비었다. 점심 후에는 오후 자습 네 시간, 그 끝에 17시부터 18시 30분까지 탐구 정규 수업이 선택과목별로 분반 운영됐다. 석식, 야간자습 1차는 19시부터 22시까지, 취침 준비 후 야간자습 2차는 23시부터 02시까지 신청제로 굴러갔다.

이안은 야간자습 2차를 빠진 적이 없었다, 입소 첫날부터.

"서이안 학생, 오늘도 야간자습 2차 신청이네요."

감독관이 명단을 체크하며 말했다. 의례적인 확인이었다.

"네."

"컨디션 괜찮아요? 매일은 좀..."

"괜찮습니다."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9월 말이라 본격적인 난방 전이었지만 환기가 안 되는 지하의 공기는 그것대로 종이 냄새와 형광등에 데워진 먼지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청람관 전체가 밀폐된 공간이었고, 이 야간자습실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계단 끝에서 마지막 한 칸을 내려서면 천장이 한 뼘 낮아졌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막대 네 개가 한 줄로 누워서 자습실의 모든 그림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책상 50개의 칸막이가 그 빛 아래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칸막이 위쪽 베니어판에는 누군가가 손톱으로 그어둔 짧은 자국들, 누군가가 펜으로 흘려 쓴 수학 공식의 잔재, 그리고 어디서도 회수되지 않은 시간의 흔적이 얇게 앉아 있었다.

이안의 자리는 그 줄에서 열두 번째였다.

자리에 앉았다. 12번, 자신의 자리.

형광등이 켜지고 세계가 축소됐다. 칸막이 안쪽, 책상 위, 문제지와 펜. 그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11시 10분에 여덟 명, 11시 40분에 다섯 명, 자정에 세 명.

새벽 12시 30분, 두 명.

언제나 그랬다. 마지막까지 남는 건 자신과 31번 자리.

이안은 시선을 들었다. 오늘따라 왜인지 그 자리가 신경 쓰였다.

31번.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건 검정 후드의 등과 이어폰 줄이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건 문제지가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형광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부를 안 하면서 왜 새벽까지 여기 있는 거지.'

이안은 시선을 내렸다. 남의 사정이었다.

펜을 다시 잡았다. 22번 단답형, 평소라면 풀이가 손에 익어 있을 문제였다.

그런데 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31번 자리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의자가 삐걱이고, 일어나고, 발소리가 자습실 뒤쪽 출입구 방향으로 갔다.

이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화장실이거나 자판기겠지.

1분 뒤 발소리가 돌아왔다. 이안의 자리 옆을 지나갔다.

스치듯 봤다. 시우의 옆얼굴, 형광등 아래 창백한 피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왼쪽 귀. 귀 뒤에 작은 흉터 같은 것이 있었다. 1센티미터쯤, 하얗게 아문 자국이었다.

'...뭐지.'

이안은 시선을 내렸다. 문제지, 22번. 점화식이 아니라 함수의 그래프, 대칭축, 두 곡선의 교점.

펜 끝이 또 흔들렸다.

이번에는 손목을 쥐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새벽 1시 27분.

거의 한 시간째 같은 문항을 붙들고 있었다. 풀이를 적다 지우고 다시 적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집중력이 밑 빠진 독처럼 새어 나가고 있었다.

형광등의 고주파 진동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간이었다. 감독관이 새벽 1시에 마지막 순찰을 돌았고 다음 감독관은 1시 15분에 와야 했다. 오늘은 1시 20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교대가 늦어진 모양이었다.

자습실에는 두 명만 남아 있었다.

이안은 문제를 풀고 있었다, 아니 푸는 척하고 있었다. 15분 전부터 같은 문제를 보고 있었다. 머리가 작동하지 않았고 눈앞의 숫자들이 의미를 잃었다.

'왜 이러지. 집중해. 집중하면 돼. 집중...'

펜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을 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괜찮다, 괜찮은 거다. 피곤해서 그런 거다. 내일은 괜찮을 거다.

그런데 '내일'은 오늘과 같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내일도 새벽까지 여기 앉아 있을 거고, 손이 흔들릴 거고, "괜찮다"고 말할 거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수능까지.

수능까지는 7주 정도 남아 있었다.

7주.

엄마가 지난주에 한 말이 떠올랐다.

'"이안아, 엄마는 네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 근데 최선을 다하면 1등이잖아? 너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따뜻했다. 그 따뜻함의 뒤편에 있는 것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작년에 깎인 아빠 월급, 변두리 빌라 전세, 청람관에 보내려고 들었던 적금, 그리고 6월에 통보받은 장학.

청람관 한 달 비용은 500만 원이었다. 이안의 부모가 정상 비용으로 자식을 청람관에 보낼 방법은 없었다. 6평에서 백분위 99.5를 받아오지 못했다면 이안은 지금 동네 독서실 책상에 앉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1등은 자존심이 아니었다, 1등은 잔류 조건이었다.

'당연히 1등이지.'

엄마의 목소리에 깔린 미안함을 이안은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하는 게 모두에게 편한 일이었다.

눈에서 물기가 번졌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들킨다. 여기는 자습실이고 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울 수 있는 곳 따위는 없었다.

손가락으로 눈 밑을 눌렀다. 닦았다. 또 번졌다. 닦았다.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약한 거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의자가 삐걱거렸다.

31번 자리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가볍고 느린 발소리였다. 이안은 얼굴을 감싼 채 굳었다. 몸이 돌이 됐다.

'가. 제발 그냥 지나가.'

발소리가 멈췄다, 바로 옆에서.

무언가가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 딱, 플라스틱이 나무에 닿는 소리.

그리고 목소리.

"...울어도 돼. 여기 CCTV 없으니까."

낮은 목소리, 건조한 톤. 위로도 아니고 동정도 아닌,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안이 손가락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한시우가 서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채 캔커피 하나를 이안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다만 시우의 손에는 캔이 하나뿐이었다. 자판기에서 자기 것을 뽑은 게 아니라 이안의 것만 뽑아서 들고 온 손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안의 눈은 젖어 있었고 시우의 눈은 건조했다. 그 대비가 형광등 아래에서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이안은 입을 열려 했다. '괜찮아' 혹은 '필요 없어' 혹은 '나가줘'. 어떤 말이든 통제를 되찾을 수 있는 말이면 됐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우가 한 박자 기다렸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31번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다시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책상 위의 캔커피를 봤다. 차가운 캔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습실의 정체된 공기와 만나 표면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안의 눈에도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닦지 않았다는 것.

형광등이 지이이, 하고 울었다.

새벽 1시 34분, 야간자습실. 12번 자리와 31번 자리 사이에 아직 이름이 없는 무언가가 생겼다.

이안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다만 손이 흔들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캔커피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책상 위로 흘러내렸다. 이안은 그 물방울이 책상 끝에 닿기 전에 캔을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시우가 자판기 앞에서 캔을 꺼낼 때 그 손바닥이 닿았을 자리였다.

'필요 없어.'

밀어내지 못했다, 손에서 캔을 떼지도 못했다.

9월의 마지막 주, 깊어진 새벽은 살갗에 옅은 한기를 남겼다. 이안은 그 한기가 캔의 차가움보다 훨씬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능까지 7주, 장학 유지 12주째.

이안의 책상 위에는 처음으로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