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28분. 이안이 알람보다 2분 먼저 일어났다.
방이 어두웠다. 침대 아래층 하린이 자고 있는 게 이불의 윤곽으로 보였다. 이안이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발끝이 차가웠다.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안의 얼굴이 어제 밤에 본 얼굴과 같았다, 잠이 오지 않은 사람의 얼굴. 이안이 그 얼굴을 길게 보지 않았다. 세수를 했다, 양치를 했다, 머리를 묶었다. 평소처럼 높이, 뒤통수의 가장 높은 지점에 손가락을 대고.
학원복 대신 본인 옷을 입었다. 청람관 학생들은 수능 당일에 학원복이 아니라 본인 옷을 입는 게 표준이었다, 시험장 입실 시 학원 단체복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학원 측 권고였다. 이안이 검정 후드 티에 검정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5시 45분,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 학생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평소보다 조용했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식당 입구에서 도시락을 받았다, 따뜻한 상태로 포장된 도시락 통이었다. 이안이 도시락 통을 가방 안에 넣었다. 안에 사탕 한 알이 같이 있었다, 어제 밤에 미리 넣어둔 사탕.
식판에 가벼운 죽 한 그릇과 김치 한 접시를 받았다. 평소 아침의 절반 양이었다. 이안이 자리에 앉았다, 죽을 다섯 술 떴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식판을 반납했다.
식당 출구 쪽에서 하린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하린도 검정 옷이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언니, 잤어?"
"...어, 조금."
"나도 조금."
두 사람이 서로의 표정을 한 번 봤다, 같이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6시 30분, 1층 로비.
학생 12명이 B고사장 출발조였다. 이안과 하린이 그 무리 안에 있었다, 학원 버스 한 대가 정문 앞에 와 있었다. 도현이 로비에 나와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점검하는 동작이었다.
"서이안 학생."
"네."
"가방 잘 챙겼지."
"네."
"시계 두 개?"
"네."
"신분증?"
"네."
도현이 짧게 끄덕였다. 다음 학생을 호명했다, 하린. 하린이 답했다, 도현이 끄덕였다.
호명이 끝나고 학생들이 버스에 올랐다. 이안이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하린이 옆에 앉았다.
6시 50분, 버스가 정문에서 출발했다. 학원 외부 도로로 나왔다, 새벽 6시 50분의 도로가 한산했다. 이안이 창밖을 봤다. 11월 13일의 새벽 하늘이 회색이었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시우 시점. 같은 새벽 6시.
청람관 정문 옆 보안실 앞에 검정 세단 한 대가 와 있었다. 한정수의 차였다.
시우가 가방을 들고 보안실 앞으로 걸었다. 1차 자습실 사물함에서 5시 30분에 가방을 받았고, 별관 식당에서 도시락을 받았고, 본관 정문 쪽으로 6시 정각에 나왔다. 보안실 옆에서 한정수가 차에서 내려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네."
"타."
시우가 뒷자리에 탔다, 한정수가 운전석에. 차가 학원 정문을 빠져나갔다. 도로가 한산했다.
차 안에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클래식 채널. 한정수가 평소 듣던 채널이었다. 음악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한정수가 음악을 줄이지 않았다.
10분쯤 갔을 때 한정수가 운전대에서 한쪽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시우야."
"...네."
"오늘 시험 잘 봐."
"...네."
"점수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고 한다. 시험 보는 동안은 시험만 생각해."
"...네."
한정수가 다시 운전대에 양손을 올렸다. 차가 도로를 따라 강북 쪽으로 향했다, A고사장은 시우의 외고 동기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시우가 창밖을 봤다. 새벽 6시 20분, 서울 도로의 차량이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시우가 한정수의 옆모습을 한 번 봤다, 한정수가 정면을 보고 있었다.
한정수의 차에 시우가 탄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한정수가 학원에 와서 시우를 직접 데리러 온 게 처음이었다. 청람관에 시우를 보낸 8월 첫 주에 한정수가 등록 서류를 들고 학원에 한 번 왔지만, 그때 한정수는 시우를 차에 태우지 않았다. 시우는 학원에서 도착해 있었고, 한정수는 등록을 마치고 떠났다.
오늘 한정수가 직접 차로 데려가는 건 새 한 가지였다. 무슨 의미인지 시우가 자기 안쪽에서 정리하지 못한 채 창밖을 봤다.
차가 7시 정각에 A고사장 입구에 도착했다. 한정수가 차를 학교 정문에서 50미터 떨어진 자리에 세웠다. 학교 주차장은 학부모 차량 출입 금지였다.
"내려."
한정수가 말했다.
시우가 차에서 내렸다. 가방을 들고 학교 정문 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시우야."
한정수가 차 안에서 불렀다. 시우가 돌아봤다.
"...."
한정수가 한 박자 말이 없었다. 시우가 차 옆에 서 있었다, 한정수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시우를 봤다.
"잘 봐."
한정수의 두 음절이었다. 시우가 끄덕였다, 한 번. 한정수가 운전석 창문을 올렸다, 차가 시동을 걸어 도로 쪽으로 돌아갔다.
시우가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잠깐 봤다. 그다음 학교 정문 쪽으로 걸었다.
7시 50분, B고사장.
학원 버스가 B고사장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학생 12명이 차례로 내렸다, 이안이 가방을 들고 내렸다. 하린이 옆에 서서 같이 정문을 봤다.
B고사장 정문 앞에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다른 학원, 다른 학교, 다른 동선으로 온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부모들이 정문 앞에서 학생을 배웅하고 있었다, 한 학생을 두세 명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있었다.
이안의 옆에 어머니는 없었다. 하린의 부모도 없었다. 청람관 버스를 타고 온 학생들은 부모 없이 학원 단위로 입실하는 게 표준이었다. 도현이 정문 앞에서 따라 내리지 않았다, 도현은 학원에 남아 있었다.
이안이 정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본관 건물이 보였다, 시험실 번호가 건물 안쪽 게시판에 붙어 있을 거였다. 이안의 시험실은 사전에 통보받은 305호였다, 3층.
하린의 시험실은 308호, 같은 층 한 칸 옆.
8시 10분 입실 완료. 이안이 305호 자기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컴퓨터용 사인펜 두 자루, 수정테이프, 시계 두 개, 신분증 한 장. 가방은 책상 옆 가방 보관 구역에 두었다.
같은 시각 8시 10분, A고사장. 시우 시점.
시우가 A고사장 217호 자기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 준비물 정렬, 가방은 보관 구역.
A고사장은 시우의 외고 모교였다. 1년 전에 졸업한 학교, 시험실 217호는 시우가 고3 1학기에 사용한 교실이었다. 칠판 옆 게시판에는 시우가 졸업할 때 떼어내지 않고 떠난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어 단어 카드 묶음, 모의고사 결과 표.
시우가 그 게시판을 한 번 봤다. 자료의 글자가 작아서 안 읽혔다, 봤다는 사실로 충분했다.
옆자리 학생이 누구인지 시우가 모르는 학생이었다. 시우와 같은 외고 졸업생이거나 인근 학교 졸업생일 가능성이 높았다. 청람관에서 분리 배정된 시우는 청람관 학생 다른 누구와도 같은 시험실에 없었다.
감독관이 시험실 앞에 들어왔다, 시계를 확인했다, 8시 35분에 1차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8시 40분, 1교시 국어 시작.
이안이 표지를 넘겼다. 첫 장에 독서론 지문이 있었다. 평가원 형식, 청람관 모의고사와 같은 구조. 이안이 첫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한 박자 천천히 들어왔다, 어제 밤 4시간 잠으로 인한 컨디션의 영향이었다. 5분 만에 첫 지문 3문항을 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평소 속도가 6분으로 늘어났다.
이안이 페이스를 조정했다. 평소보다 1분 늘어난 페이스를 80분 동안 유지하면 검토 시간이 5분에서 0분으로 줄어든다, 검토 시간이 없어도 답이 다 채워지는 시험을 만들어야 했다. 첫 페이지를 평소처럼 빠르게 보지 않고, 답을 적은 다음 한 번 더 확인하면서 다음 페이지로 가는 페이스로 바꿨다.
독서 두 번째 지문이 사회과학 글이었다. 한 문단을 두 번 읽었다, 한 번 읽었을 때 들어오지 않은 단어가 두 번 읽었을 때 들어왔다. 평소라면 한 번에 들어왔을 단어였다. 이안이 그 차이를 머릿속에 두지 않고 다음 문단으로 갔다.
문학 첫 지문. 시조 한 수. 평소처럼 풀었다, 답을 적었다. 다음 지문, 현대시. 답을 적었다. 시 한 줄이 마음에 한 박자 닿았다가 풀려서 흩어졌다, 그 흩어진 자리에 답이 남았다.
화법과 작문. 첫 지문 강연문, 답을 적었다. 강연자의 톤이 머릿속에서 한 박자 재생됐다, 재생된 톤이 시우의 비상계단 톤과 닮은 자리가 있었다. 이안이 그 자리를 짚지 않고 답을 적었다.
페이스가 점점 평소로 돌아왔다. 70분쯤 지났을 때 시험지를 다 풀었다, 검토 시간 10분 남았다. 이안이 검토를 시작했다.
검토 중에 한 문항을 바꿨다. 화법과 작문 마지막 문항, 처음 답이 3번이었는데 다시 보니까 4번이 맞아 보였다. 수정테이프로 3번을 지웠다, 4번에 새 표시를 했다. 한 번의 답 변경.
수정테이프를 책상에 놓으면서 한 박자 손이 멈췄다. 답을 바꾼 자리가 11월 8일 모의고사 사회문화 17번에서 답을 바꾸지 않기로 한 자리와 같은 결의 자리였다. 그때는 안 바꿨다, 오늘은 바꿨다. 어느 쪽이 자기 결정인지 시험 중에는 답이 안 나왔다.
10시 정각 종이 울렸다. 시험지 회수.
같은 1교시, A고사장. 시우 시점.
시우가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 평소 속도로 풀었다, 답을 적었다, 지우지 않았다. 한 번도.
독서 첫 지문이 인문 분야였다. 글의 결이 시우의 평소 독해 습관에 맞았다, 한 문단 한 문단이 가지런히 들어왔다. 답을 적는 동안 손목의 각도가 평소와 같았다, 평소 시우의 손목은 답을 적은 다음 0.5초 뒤에 한 번 지웠다가 다시 적는 패턴이 있었다. 오늘 그 0.5초의 동작이 없었다.
문학 두 지문, 현대시와 소설. 답을 적었다. 화법과 작문 한 지문. 답을 적었다. 답 옆에 비스듬한 표시도, 동그라미도, 별표도 그리지 않았다. 시험지 위가 단정했다.
70분쯤 지났을 때 시험지를 다 풀었다. 검토 시간 10분. 시우가 검토를 했다, 한 문항도 바꾸지 않았다.
10시 정각 종, 시험지 회수.
시우가 책상 위에 손을 모았다. 옆자리 학생이 답안지를 회수당하는 동안 시우는 정면을 봤다. 답안지에 답이 다 적혀 있었고, 지운 자국이 0건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시우의 답안지가 그렇게 회수됐다.
칠판 옆 게시판이 시우의 정면 시야 안에 들어왔다. 시우가 졸업할 때 떼어내지 않은 영어 단어 카드 묶음. 1년 전 시우가 그 카드를 만든 손과 오늘 답안지를 적은 손이 같은 손이었다, 다른 손이기도 했다.
10시 30분, 2교시 수학.
이안이 시험지를 받았다. 100분 시험, 시작.
1번부터 15번 객관식, 평소 페이스로 통과. 16번부터 22번 단답형, 평소 페이스. 22번에서 시간을 썼다. 답이 자연수 한 자릿수, 9가 나왔다. 단답형 답란에 9를 적었다.
23번부터 28번 선택과목 객관식. 29번, 30번 선택과목 단답형. 30번이 킬러였다.
30번에서 이안이 18분을 썼다. 첫 5분은 문제 조건을 옮겨 적는 데 썼다, 다음 7분은 식 두 개를 세우는 데 썼다, 마지막 6분은 식을 풀어서 답을 끌어내는 데 썼다. 답이 자연수 세 자릿수, 247이 나왔다. 답란에 247을 적었다. 한 번 다시 풀었다, 식 한 줄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세웠다, 같은 247이 나왔다.
연습지의 식이 두 가지 풀이로 채워져 있었다, 두 풀이 모두 같은 답에 도달했다. 두 풀이가 같은 답을 가리키는 게 답이 맞다는 가장 큰 근거였다.
12시 10분 종, 시험지 회수.
시험지가 회수되는 동안 이안이 양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 어깨가 한 번 떨렸다, 떨림이 짧았다. 1교시보다 2교시가 어려웠다는 의식이 옆에 있었다, 평가원 시험은 청람관 모의고사보다 한 톤 위였다.
손바닥의 땀이 살짝 났다, 손을 한 번 책상 모서리에 비볐다. 옆자리 학생이 책상 위에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누구의 한숨인지 시우의 한숨이 아닌 게 너무 분명해서 이안이 그 한숨을 옆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12시 10분 ~ 13시. 점심.
이안이 가방에서 도시락 통을 꺼냈다. 책상 위에 도시락을 놓고 뚜껑을 열었다. 도시락 안에 작은 사탕 하나가 음식 옆에 놓여 있었다, 노란 포장지.
이안이 사탕을 꺼냈다, 포장을 뜯었다, 입에 넣었다. 레몬맛.
'필요할 때 먹어.'
점심시간이 필요할 때였다. 1교시 국어, 2교시 수학, 두 교시를 마친 누적 피로가 어깨와 머리에 동시에 와 있었다. 사탕의 단맛이 입 안에 퍼지는 동안 어깨의 긴장이 한 단계 풀렸다.
5분쯤 사탕을 굴리는 사이에 머릿속의 한 박자가 가벼워졌다. 1교시 화법과 작문 마지막 문항을 답을 바꾼 자리, 2교시 30번 18분을 쓴 자리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로 떠다녔다, 사탕의 단맛이 그 떠다님을 잠시 가라앉혔다.
도시락의 밥과 반찬을 천천히 먹었다. 절반 정도 먹고 멈췄다, 위장이 그 이상을 받지 않았다. 도시락 통의 뚜껑을 닫고 가방에 넣었다.
12시 35분쯤 사탕이 입 안에서 다 녹았다. 이안이 책상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봤다. 다음 교시는 3교시 영어, 절대평가, 듣기 17문항.
같은 점심시간, A고사장. 시우 시점.
시우의 2교시도 같은 페이스로 흘러갔다.
10시 30분 종이 울렸을 때 시우가 시험지를 받았다. 22번 단답형 킬러, 답이 자연수 한 자릿수. 시우가 식 한 줄을 세웠다, 풀었다, 9가 나왔다. 답란에 9를 적었다. 30번 단답형 킬러, 답이 자연수 한 자릿수. 식 두 줄을 세웠다, 풀었다, 7이 나왔다. 답란에 7을 적었다.
객관식 23~28번을 마지막에 풀었다, 평소 시우의 풀이 순서였다. 단답형 두 문항을 먼저 풀고 객관식을 뒤에 모으는 방식. 12시 10분 종이 울리기 5분 전에 시험지를 다 풀었다, 마지막 5분 검토 시간에 한 문항도 바꾸지 않았다.
답안지가 회수됐다, 한 번도 지우지 않은 답안지. 시우의 손목이 평소 5개월 동안 답을 적고 지우고 적고 지우는 패턴에서 답을 적고 그대로 두는 패턴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 패턴의 마지막 자리가 오늘 수능 답안지였다.
시우가 점심시간 도시락 통을 책상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도시락 안에 작은 사탕 하나가 음식 옆에 놓여 있었다, 노란 포장지. 어제 시우가 1차 자습실에서 직접 넣어둔 사탕이었다.
시우가 사탕을 꺼냈다, 포장을 뜯었다, 입에 넣었다. 레몬맛.
이안과 시우가 다른 고사장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탕을 입에 넣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동시에 알지 못한 채 같은 단맛을 느꼈다. 1초의 단맛이 양쪽에서 동시에 있었다.
시우의 사탕은 청람관 매점에서 평소 시우가 사놓던 사탕이었다. 시우가 자기 필통에 평소 챙겨두었다가 이안의 필통에 옮겨 넣어준 사탕 4알이 한 달 전쯤의 사탕이었고, 시우 자신의 필통에 따로 챙겨놓은 사탕이 오늘 점심시간의 사탕이었다. 두 사람의 사탕이 같은 봉지에서 나온 사탕이었다.
시우가 도시락을 먹었다. 평소보다 천천히 먹었다. 시우 옆자리 학생이 자기 도시락을 먹는 동안 시우도 같이 먹었다, 한 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밥을 한 술 한 술 떠 넣으면서 시우가 머릿속에서 1교시 답안지를 한 번 더 봤다. 답을 다 적었고 지운 자국이 없는 답안지의 시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평소 시우의 답안지에는 한 페이지마다 작은 지운 자국이 한두 개씩 있었다, 오늘은 그 흔적이 0이었다. 5개월 동안 이안과 마주 앉아 답을 적고 안 지운 시간이 누적되어 오늘 답안지의 형태가 됐다.
12시 50분쯤 사탕이 입 안에서 다 녹았다. 시우가 손을 책상 위에 모으고 정면을 봤다.
13시 10분, 3교시 영어. 70분.
이안이 듣기 17문항을 풀었다. 듣기 음원이 시험실 천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평소 청람관 영어 자습에서 듣던 음원보다 한 톤 깨끗했다. 듣기 끝나고 독해 28문항. 페이스가 평소 영어 페이스대로 흘렀다, 절대평가 영어는 이안에게 부담이 적은 과목이었다.
독해 마지막 문단 추론 문항에서 한 박자 멈췄다. 답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한 번 답을 적었다, 다음 문항으로 갔다,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 답이 한 번에 보였다. 흔들리지 않고 답을 마킹했다.
14시 20분 종, 시험지 회수.
쉬는 시간 14시 50분까지 30분.
이안이 자리에 앉아서 30분을 보냈다.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왔다, 다녀와서 자리에 앉았다. 손을 책상 위에 모으고 정면을 봤다, 4교시 한국사와 탐구가 마지막 산이었다.
필통을 열었다. 사탕 한 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사탕.
이안이 사탕을 꺼냈다, 포장을 뜯었다, 입에 넣었다. 레몬맛.
4교시 직전이었다, '필요할 때'의 자리가 정확히 이 자리였다. 도시락 안 사탕은 점심시간을 위한 사탕이었고, 필통 안 마지막 사탕은 4교시 직전을 위한 사탕이었다. 두 알의 사용처를 이안이 어제 밤 미리 결정해두었다.
사탕이 입 안에서 천천히 녹는 동안 이안이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봤다. 마지막 사탕이었다, 시우가 한 달 전쯤 넣어준 사탕 4알의 마지막 한 알이었다.
10월 마지막 주에 자판기 옆에서 시우가 사탕 4알을 한 번에 건넸을 때, 시우는 그 4알이 11월 13일 4교시 직전까지 갈 줄을 알지 못했을 거였다. 사탕 4알이 한 달 반 동안 한 알씩 한 알씩 자리를 옮겨와 오늘 4교시 직전 마지막 한 알이 됐다. 이안이 그 마지막 한 알을 입 안에서 굴리면서 그 사실을 한 번 더 정리했다.
14시 50분, 4교시 한국사. 시작.
한국사 30분. 객관식 20문항. 무리 없이 통과. 15시 20분 종, 한국사 답안지 회수. 한국사 답안지 회수와 탐구 답안지 배부 사이에 15분의 텀이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손목을 한 번 풀었다, 어깨의 긴장도 한 번 풀었다.
15시 35분, 탐구 1과목 사회문화. 30분. 객관식 20문항. 17번에서 한 번 멈췄다, 답이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이안이 한 답을 적었다, 다음으로 갔다, 돌아왔다, 답을 바꾸지 않았다. 토요일 모의고사 때 한 결정과 같은 결정이었다.
16시 5분 종, 탐구 1 답안지 회수. 그 사이 2분 동안 탐구 2 답안지가 책상 위로 배부됐다. 페이지를 빠르게 펼쳐서 첫 문항을 1초 먼저 읽었다.
16시 7분, 탐구 2과목 생활과 윤리. 30분. 객관식 20문항. 시간 안에 다 풀었다.
16시 37분 종, 시험지 회수.
이안이 책상에 손을 모았다. 길고 짧은 한숨이 동시에 나왔다. 어깨가 무거웠다, 머리가 가벼웠다. 모순된 두 감각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시험실 앞에 5교시 안내 방송이 있었다. 5교시 제2외국어는 미선택 학생 퇴실 가능. 이안은 미선택, 퇴실. 가방을 들고 시험실에서 나왔다.
복도에 청람관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하린이 308호에서 나와 이안을 봤다, 손을 들었다.
"...언니."
"...어."
"끝났어."
"...어, 끝났어."
두 사람이 같이 정문 쪽으로 걸었다. 학원 버스가 16시 50분에 정문 앞에서 출발 예정이었다. 청람관 학생 12명이 모이는 데 10분 걸렸다.
같은 시각 16시 37분, A고사장. 시우 시점.
시우의 4교시 탐구가 끝났다. 답안지를 회수당했다, 답을 다 적었다, 지우지 않았다.
평생 처음으로 수능 답안지에 지운 자국이 0건이었다.
시우의 3교시 영어도 같은 페이스로 흘렀다, 듣기 17문항 한 문항도 놓치지 않았다, 독해 28문항 마지막까지 답을 적고 한 문항도 바꾸지 않았다. 시우의 영어는 평소 1등급 안쪽 성적이었다, 오늘도 안쪽이었다. 14시 20분 종, 영어 시험지 회수.
3교시와 4교시 사이 30분 휴식, 시우가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고 자리에 앉았다. 필통에서 사탕 한 알을 꺼냈다.
시우의 4교시 직전, 14시 50분 한국사 시작 직전에 시우도 필통에서 그 사탕을 입에 넣었다. 1차 자습실에서 어제 도시락 통 안에 넣은 사탕 한 알 외에, 필통에 별도로 한 알을 더 챙겨놓은 사탕이었다. 시우의 사탕도 노란 포장지였고, 한국사 30분, 답안지 회수 15분, 탐구 1 30분, 답안지 교체 2분, 탐구 2 30분의 누적된 107분을 시우의 입 안에서 단맛이 받쳤다.
시우의 탐구는 생명과학 1과 화학 1이었다. 의대 지원자 표준 조합. 두 과목의 페이스가 같았다, 단답형도 객관식도 답을 적은 다음 지우지 않는 패턴 그대로였다.
시우가 가방을 들고 시험실에서 나왔다. 5교시 미선택, 퇴실. 복도에 모교 후배들이 보였다, 시우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 명이 옆으로 비켜섰다. 시우가 그 학생에게 가벼운 끄덕임을 했다, 학생이 답례를 했다.
정문 앞에 한정수의 차가 와 있었다. 시우가 차에 탔다, 한정수가 운전석에.
"끝났어."
한정수가 짧게 말했다.
"...네."
"가자."
차가 도로로 나갔다. 한정수가 운전 중에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음악이 없었다. 시우가 창밖을 봤다, 11월 13일의 오후 햇살이 차창에 비스듬히 들어왔다.
"...시우야."
"...네."
"점수는 가채점 끝나고 이야기한다. 오늘은 안 묻는다."
"...네."
시우가 한정수의 옆모습을 봤다. 한정수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입가의 표정이 평소와 같았다.
차가 청람관 정문 앞에 17시 5분에 도착했다.
17시 5분, 청람관 정문.
학원 버스가 5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이안과 하린이 버스에서 내려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한정수의 검정 세단이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시우가 차에서 내렸다.
이안이 정문 안쪽에서 시우의 차를 봤다. 시우가 차에서 내리는 동작, 한정수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는 동작, 시우가 한정수에게 한 번 끄덕이는 동작.
시우가 가방을 들고 정문 쪽으로 걸었다. 차가 떠나지 않았다, 한정수가 운전석에 앉아서 시우가 학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안이 정문 안 로비 한쪽에 서 있었다. 하린이 옆에 있었다, 다른 청람관 학생들도 옆에 있었다.
시우가 정문을 통과해 로비로 들어왔다. 가방을 어깨에 한쪽으로 메고 있었다, 평소 시우의 가방 메는 자세였다. 로비를 통과해 본관 1층 쪽으로 한 걸음 갔다.
이안과 시우의 눈이 마주쳤다.
1초였다.
시우가 한 번 끄덕였다, 짧게. 이안이 같이 끄덕였다. 두 사람이 어른 셋이 있는 자리에서, 청람관 정문에서, 1초 마주봤다.
도현이 로비 안쪽에서 두 사람의 시선을 봤다. 도현이 그 시선을 보지 않은 척 다른 학생을 호명했다. 한정수의 차가 정문 밖으로 나갔다, 사라졌다.
시우가 가방을 들고 본관 안쪽으로 걸었다. 이안과 시우 사이에 더 이상 1차 자습실 분리가 없었다, 수능이 끝났으므로. 두 사람이 같은 청람관 안에 있게 됐다, 어른들의 처분이 끝나고 학생 두 명이 같은 학원에 다시 들어왔다.
이안이 시우의 등이 본관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봤다. 손에 가방끈을 쥐고 있었다, 손이 차가웠다.
가채점이 아직이었다. 어른들의 다음 처분이 아직이었다. 정시 원서가 아직이었다.
오늘의 1초가 다음 한 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