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1시 8분. 이안은 면담실 2호 복도에서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면담실 1호의 문은 닫혀 있었고, 안에서 무슨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1호 안에 하린이 부모와 함께 들어가 있었다. 어제 받은 종이 여덟 글자가 가리키던 자리였다.
이안의 어머니는 14시 도착으로 통보됐다. 약속까지 50분 남아 있었다. 이안이 50분 일찍 면담실 복도에 올라와 있는 건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도착하기 전에 자기 안쪽을 한 번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사탕이 입 안에서 천천히 녹았다. 어제 옥상 계단에서는 꺼내지 않은 사탕이었다. 그날 밤의 '필요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판단으로 도로 넣었던 사탕을 오늘 1시 8분에 꺼낸 건 다른 종류의 판단이었다.
필통 안에 사탕 두 알 남았다.
이안이 복도 끝 창문 쪽으로 걸었다. 4층 창문 너머로 학원 주차장이 보였다, 검정 세단 한 대가 천천히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머니의 차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차가 없었다. 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한 번 타고 학원 정문까지 오는 게 어머니의 표준 동선이었다. 그 동선으로 학원에 와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이안이 함께 정리했다.
면담실 1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안이 복도 끝에서 돌아봤다. 하린이 먼저 나왔다, 그 뒤로 하린의 어머니, 마지막으로 도현이 나왔다. 하린의 어머니가 도현에게 두 번 고개를 숙였다, 도현이 그 인사를 받았다, 짧은 인사였다.
하린이 복도에 나와 이안을 봤다. 두 사람이 5미터 떨어진 자리에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하린의 표정이 평소와 같았다, 같은 정도가 더 무거운 의미였다.
하린의 어머니가 도현과 함께 1층 쪽으로 내려가는 사이 하린은 복도에 남았다. 이안 쪽으로 걸어왔다. 이안 옆에 와서 창문 밖을 봤다, 잠시 같이 봤다.
"...언니."
"응."
"우리 부모는 그냥 면담만 하고 가셨어. 별일 없었어."
"...어."
"근데."
하린이 한 박자 뒤에 말했다.
"내가 막아야 하는 일이 아니야, 이거."
이안이 하린의 옆얼굴을 봤다. 하린의 시선이 창문 너머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막아야 하는 일이라고 그때, 매점에서 그렇게 말했잖아. 한 번 더 생각했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막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
"언니가 결정한 거잖아. 결정한 사람이 책임지는 거지."
이안이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이 천천히 돌아섰다, 복도 쪽으로 걸었다.
"...하린아."
이안이 불렀다. 하린이 멈췄다.
"고마워."
하린이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내렸다, 짧은 끄덕임으로 답했다. 그대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이안이 다시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정문 쪽에 어머니로 보이는 실루엣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손을 한 번 비벼서 따뜻하게 만들었다.
같은 시각, 1시 15분. 하린 시점. 면담실 1호.
30분 전, 하린은 어머니와 면담실 1호에 들어갔다. 도현이 면담실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 하린의 성적 기록부가 펼쳐져 있었다.
"하린 학생, 어머님 모시고 와줘서 고마워."
"...네."
도현이 책상 위 기록부를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어머님, 하린이 이번 주 모의고사 점수가 365점이에요. 누적 평균은 372점. 청람관 중위권 안정 구간이긴 합니다만, 수능까지 7주가 남은 시점에서 추가 상승 폭은 제한적입니다."
어머니가 기록부를 봤다. 손가락으로 점수 칸을 한 번 짚었다.
"수시 결과는 언제 나와요."
"빠른 학교는 12월 둘째 주, 늦은 학교는 12월 셋째 주에 나옵니다."
"수시로 정해진 학교는 어느 정도 가능한가요."
"하린이 지원한 학교 6장 중 합격선이 가장 안정적인 곳은 두 곳입니다. 추합까지 가면 한 곳은 충분히 합격 가능합니다."
어머니가 도현 쪽을 봤다, 도현이 같이 봤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합의가 만들어졌다.
"그럼 정시는 안 쓰는 걸로 합시다. 수시 발표까지 청람관에 그대로 두고."
"네, 어머님. 청람관도 그게 효율적이라고 봅니다."
어머니가 의자에서 살짝 자세를 바꿨다. 하린 쪽을 봤다.
"하린아, 너 어때."
"...어, 괜찮아."
"청람관에서 더 있을 수 있겠어. 수시 발표까지."
"...응, 있을게."
"엄마는 네가 그러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집에 와서 너무 부담받지 말고."
"...어, 알겠어."
어머니가 도현 쪽을 다시 봤다.
"한 가지만 더 묻고 갈게요. 하린이 룸메이트가 누군가요."
도현이 잠깐 멈췄다, 천천히 답했다.
"서이안 학생입니다. 청람관 기숙 1등 자리에 오래 있다가 이번 주에 13위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안이라고. 그 학생도 같은 4인실인가요."
"이번 주까지는 특실 2인 1실 룸메이트로 같이 쓰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자리 변동이 있을 수도 있고요."
어머니의 얼굴이 한 번 미세하게 움직였다, 도현이 그것을 보지 않은 척 기록부를 정리했다. 그 사이에 도현이 하린 쪽을 보고 짧게 말을 던졌다.
"유하린 학생, 룸메이트 변경 신청 받아줄까요?"
하린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한 번 쥐어졌다, 풀렸다.
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하린은 알았다. 도현이 하린에게 '이안과 떨어지고 싶으면 떨어질 수 있다'는 카드를 내민 거였다. 떨어지는 게 하린을 위한 길이라는 신호를 도현이 옆에 같이 얹어둔 카드였다.
하린의 어머니가 하린 쪽을 봤다, 답을 기다렸다.
하린이 잠시 도현의 얼굴을 봤다. 도현의 눈은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 안에 한 가지 결론이 미리 들어가 있었다. 도현은 하린이 '네'라고 답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요."
하린이 말했다.
"같이 갈게요. 이안 언니랑."
도현이 한 박자 늦게 끄덕였다.
"그래요, 하린 학생. 의견 존중합니다."
어머니가 더 묻지 않았다. 자리를 정리했다, 가방을 들었다. 도현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면담실 문 앞에서 어머니가 하린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
"하린아, 네가 결정한 대로 하자."
"...어."
면담실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먼저 나가고, 도현이 따라 나가고, 하린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 이안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오후 2시 정각. 이안 시점.
면담실 2호 문 앞에 어머니가 도착했다.
검은색 코트, 머리카락은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가방은 작은 핸드백 하나. 어머니가 이안을 보고 짧게 끄덕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에요."
"들어가자."
이안이 먼저 면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가 뒤를 따랐다. 도현이 책상 앞에 이미 앉아 있었다, 도현 옆에 학원장이 같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어머니가 의자에 앉았다, 이안은 어머니의 오른쪽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이안의 성적 기록부와 환산점수 추정표가 펼쳐져 있었다.
학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님, 이안 학생 이번 주 점수가 380점입니다. 누적 5위권 평균이 392.4점이고요. 청람관 특별장학 유지 조건이 5위권 평균 400점 이상이라, 이번 주까지의 누적으로 보면 1차 경고 단계입니다."
어머니가 기록부를 천천히 봤다,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도현 쪽을 봤다.
"...수능까지 몇 주 남았죠."
"7주 남았습니다."
"7주에 회복 가능한가요."
"가능하긴 합니다. 다만 회복 폭은 학생의 컨디션에 달려 있고요."
어머니가 이안을 봤다.
"이안아."
"...네."
"왜 떨어졌어."
이안이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어머니의 표정에 화는 없었다, 평소 어머니의 표정 그대로였다. 묻는 톤도 평소 그대로였다, 식탁에서 반찬 이야기를 묻는 톤이었다.
"...집중이 흐트러졌어요."
"왜 흐트러졌어."
"...."
"이안아, 엄마는 답을 들으러 온 게 아니야. 엄마가 듣고 싶은 건 네가 다시 집중할 수 있는지야. 다음 주부터 점수가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노력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도현을 봤다, 도현이 어머니를 봤다.
"학원에서는 어떻게 보세요."
도현이 한 박자 천천히 답했다.
"이안 학생은 학습 능력은 충분합니다. 7주 동안 집중하면 회복 가능합니다. 다만, 어머님."
"네."
"이안 학생의 특별장학 박탈 가능성에 대비해서 학비 부분도 미리 의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박탈이 확정되면 다음 학기 학비가 청구됩니다."
어머니의 손이 핸드백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이안이 그 손을 봤다, 어머니는 그 손을 다시 무릎 위로 옮겼다.
"...학비는 얼마인가요."
"잔여 학기 환산 시 약 2200만 원입니다. 11월 마지막 주에 1차 청구가 갑니다."
어머니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안이 어머니의 옆얼굴을 봤다. 어머니의 입가 근처가 조금 굳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굳음이었다.
"...이안아."
"...네."
"엄마가 학비를 못 댈 수도 있어. 알지."
"...알아요."
"청람관에 못 있으면 어디로 갈래."
"...집에서 다니는 학원이 있어요. 대치동 쪽."
"비싸지 않니."
"...청람관보다는 싸요. 한 달에 150 정도."
"그것도 부담스러워."
이안이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가 이안을 같이 봤다.
면담실 안의 공기가 한 박자 멈췄다. 도현과 학원장은 책상 건너편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도현의 표정이 잠깐 평소와 달랐다, 부드러움이 한 단계 옆으로 비켜난 표정이었다.
"...엄마."
"응."
"...죄송해요."
이안이 말했다. 어머니가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작은 한숨이었다.
"이안아, 죄송할 게 아니야. 점수가 떨어지면 다시 올리면 되고, 못 올리면 다른 길 찾으면 돼. 엄마가 너한테 한 가지만 묻고 갈게."
"...네."
"네가 1등이 아니라도, 네가 청람관에 있지 않아도, 네가 엄마한테 죄송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지."
이안의 호흡이 한 번 막혔다. 어머니의 단어가 이안이 기대한 단어가 아니었다. 평소 어머니의 단어는 "1등이어야 한다"였고 "장학을 잃으면 안 된다"였고 "엄마는 너한테 학원비를 댈 수밖에 없다"였다. 그 단어들 사이에 어디에도 '죄송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어는 없었다.
오늘 어머니의 단어 끝에 그 단어가 붙어 있었다.
"...."
이안이 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더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도현 쪽을 다시 봤다.
"...학비 부분은 제가 정리해서 다음 주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면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어머님. 살펴 가십시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도 함께 일어났다, 두 사람이 면담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햇살이 4층 창문에서 들어와 복도 바닥에 노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복도에서 멈췄다.
"이안아."
"...네."
"내일 오전에 한 번 더 전화할게."
"...네."
어머니가 이안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 떼었다. 1층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이안이 복도에 혼자 남았다. 노란 띠 안에 발끝이 들어가 있었다, 발끝을 잠시 같이 봤다.
어머니의 단어 한 줄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네가 1등이 아니라도, 네가 엄마한테 죄송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지.'
이안이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머니를 거절하는 일이 되고, 받아들이면 지난 11년 동안 어머니 앞에서 1등을 유지해온 자기 자신을 거절하는 일이 되었다. 두 가지 다 이안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안이 복도 창문 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어머니의 검은 코트가 정문 쪽으로 멀어지는 게 보였다. 정문 옆 보안실에서 경비원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답례를 했다, 그대로 정문 밖으로 나갔다.
이안이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사탕이 입 안에서 다 녹아 있었다. 새 사탕을 꺼내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8시 30분. 파이널 7주차 마지막 모의고사 1교시 직전.
이안이 시험실 12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 야간자습실 12번 자리와 같은 번호였다, 우연이었다, 우연이라는 사실에 이안이 한 박자 의미를 두려다가 두지 않았다.
책상 위에 컴퓨터용 사인펜 두 자루, 수정테이프, 손목시계. 평소의 시험 준비물이었다. 필통 안에 사탕 두 개. 한 알을 꺼낼지 망설였다, 꺼내지 않았다.
'필요할 때 먹어.'
지금이 아니었다, 점심 직전이나 4교시 직전이 그 자리였다. 이안이 필통을 닫았다.
8시 40분, 1교시 국어 시작 종이 울렸다.
시험지가 책상 위에 놓였다.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독서론 지문이 있었다. 평가원 시험과 같은 구조였다, 청람관 자체 모의고사도 평가원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시즌이었다.
이안이 첫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글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들어왔다, 5분 만에 첫 지문 3문항을 풀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문학,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 평소 푸는 속도였다. 80분 동안 시간을 30분 남기고 다 풀었다, 검토 시간이 30분 남았다. 평소보다 검토 시간이 5분 더 길었다, 그게 이번 주 이안의 컨디션이 살짝 회복됐다는 신호였다.
10시 종이 울렸다. 시험지 회수.
10시 30분, 2교시 수학.
100분 시험. 시험지가 놓였다, 1번 객관식부터 풀었다. 1~15번 객관식 한 시간 안에 통과 목표.
22번 단답형. 공통과목 마지막 문제, 킬러 자리. 이안이 22번에서 12분을 썼다. 자연수 한 자릿수가 답으로 나왔다. 9였다.
답란에 9를 적었다. 객관식 답란은 마킹이, 단답형 답란은 자연수가 적혀 있었다.
선택과목 23번부터 30번. 23~28번 객관식, 29~30번 단답형. 30번이 선택과목 킬러였다.
30번에서 이안이 18분을 썼다. 답이 자연수 세 자릿수로 나왔다, 247이었다. 답란에 247을 적었다, 한 번 다시 풀어봤다, 같은 답이 나왔다.
12시 10분 종이 울렸다. 시험지 회수.
이안이 책상 위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기댔다. 어깨가 한 번 떨렸다, 떨림은 짧았다.
12시 10분 ~ 13시. 점심.
식당으로 내려갔다. 하린이 식당에서 손을 흔들었다, 하린의 시험은 별관에서 봤다. 이안이 식판을 들고 하린 옆에 앉았다.
"언니, 1교시 어땠어."
"...괜찮았어."
"수학은."
"...22번이랑 30번 시간 좀 썼는데, 답은 나왔어."
"어."
하린이 더 묻지 않았다. 자기 식판에서 밥을 떴다, 이안도 떴다. 점심을 30분 만에 마쳤다.
식당에서 나와 시험실로 돌아가는 길에 이안이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 앞에서 손을 씻었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짧게 봤다. 다크서클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제보다 한 톤 덜 진했다.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필통을 열었다. 사탕 두 알이 있었다, 한 알을 꺼낼지 망설였다.
3교시 영어, 4교시 한국사와 탐구. 영어는 절대평가라 압박이 덜했다, 4교시 탐구가 마지막 산이었다. 사탕을 4교시 직전에 쓸지 지금 쓸지가 결정 지점이었다.
이안이 사탕을 도로 필통에 넣었다. 4교시 직전이었다, 평소 자기가 시우를 위해 아껴두던 사탕을 이안이 자기 4교시를 위해 아껴두는 게 처음이었다. 그게 이상한 일인지 이상하지 않은 일인지 이안이 분간하지 못한 채 필통을 닫고 시험실로 돌아갔다.
같은 토요일 오전 8시 30분. 시우 시점. 별관 시험실.
시우가 별관 시험실 8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1차 자습실 분리 처분을 받은 학생들은 모의고사도 별도 시험실에서 응시했다. 별관 시험실에 시우 외에 다섯 명이 더 있었다, 다섯 명 모두 다른 학년이거나 다른 사유의 분리 학생이었다. 시우와 직접 안면이 있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감독관은 도현 직속 부감독관이었다. 이안 쪽 본관 시험실은 일반 감독관이 들어갔고, 별관 시험실에는 도현이 따로 배치한 감독관이 들어왔다. 8시 35분에 감독관이 시우의 책상 옆을 한 번 지나갔다, 책상 위 시험 준비물을 눈으로 한 번 훑었다.
8시 40분 종, 시험 시작.
시우가 표지를 넘겼다. 첫 장 독서론 지문, 평가원 형식. 시우가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글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시우가 답을 적은 다음 답을 지우지 않을 거라는 점.
어제 면담실에서 한정수가 말한 한 줄이 시우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의대 아니어도 가능해, 단 가군에만.' 그 줄을 정확하게 받아내려면 가군 의대 합격 안전선 점수가 필요했다, 안전선 점수는 410점 부근이었다, 그게 지난주 시우가 처음 도달한 점수였다.
이번 주에 점수를 더 올리지 않고 비슷한 자리를 지키는 게 목표였다. 도현의 의심을 더 키우지 않으려면 410점에서 5점 정도 내려가는 자연스러운 변동이 필요했다. 405점.
평소처럼 풀면서 평소처럼 답을 적고, 평소와 달리 지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410 부근의 점수가 나올 거였다. 지우는 동작 한 번이 5점이라는 사실을 시우는 오랫동안 자기 안쪽에 데이터로 가지고 있었다. 지우는 동작이 적은 만큼 점수가 높았다, 지운 동작이 0이면 410 부근, 1~2회면 405 부근, 그 이상이면 400 아래.
오늘 시우는 1~2회만 지울 계획이었다. 의도적인 미세 하강이었다.
1교시 80분. 시우가 시험지를 풀었다, 답을 적었다, 지우지 않았다. 두 번 정도 답을 적고 옆 문항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와서 답을 다시 적은 적이 있었다, 그 두 번이 시우가 오늘 의도적으로 사용한 '지우는 동작'이었다.
10시 종, 시험지 회수.
2교시 수학.
22번 단답형. 자연수 한 자릿수, 답이 9로 나왔다. 시우가 9를 적었다, 지우지 않았다.
30번 단답형. 자연수 세 자릿수, 답이 247로 나왔다. 시우가 247을 적었다, 지우지 않았다.
12시 10분 종.
시우가 답안지를 책상 위에 놓고 감독관이 회수하는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감독관이 시우의 책상 옆에 와서 답안지를 들었다, 들 때 답안지 위쪽을 한 번 봤다, 봤다는 사실을 시우가 봤다.
그 1초가 시우에게 신호였다. 도현 직속 감독관이 시우의 답안지를 회수 시점에 확인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답안지 위쪽 빈칸과 지운 자국을 확인했을 거였다, 오늘은 답이 다 채워져 있고 지운 자국이 없는 답안지였다.
감독관이 답안지를 들고 다음 책상으로 갔다. 시우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이 살짝 축축했다.
오늘 시우의 답안지는 도현이 1차 자습실 분리 처분 이후 처음 받는 시우의 답안지였다. 도현이 그 답안지를 받아서 어떻게 해석할지를 시우가 자기 안쪽에서 한 번 정리했다.
해석은 두 가지였다. 하나, 시우가 진짜로 실력을 다 쓰기 시작했다. 둘, 시우가 도현의 요구에 따라 점수를 유지하는 척하고 있다.
두 해석 모두 시우의 이번 주 답안지를 보고 즉시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도현이 단정 짓기 위해서는 다음 주, 그다음 주의 답안지가 더 필요했다. 도현의 1차 칼이 이번 주 답안지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시우의 안쪽에서 같이 정리됐다.
시우가 시험지를 들고 시험실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이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1층 로비를 지나갔다. 로비에 본관 시험실에서 시험을 끝낸 학생들이 식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안이 있었다, 하린 옆에서 걷고 있었다. 시우가 멀리서 이안을 봤다, 이안은 시우를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 학생 스무 명이 있었다.
시우가 별관 식당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1차 자습실 분리 학생들은 본관 식당이 아닌 별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어 있었다. 별관 식당의 식판은 본관과 다른 색이었다, 더 어두운 회색이었다.
시우가 별관 식당에 들어갔다, 식판을 받았다. 별관 식당에 있던 다섯 명의 학생들 사이에 앉았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식판 옆에 자기 가방을 두고 점심을 30분 만에 마쳤다.
오후 14시 50분, 4교시 한국사와 탐구 직전.
이안이 시험실 12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책상 위에 사탕 두 알 중 한 알을 꺼냈다, 포장을 뜯기 전에 한 번 봤다, 노란 포장지. 평소 시우가 자판기에서 뽑아주는 캔커피와 같은 노란색이었다.
이안이 사탕 포장을 뜯었다, 입에 넣었다. 4교시 종이 울리기 전에 사탕이 입 안에서 절반쯤 녹았다.
4교시 시작. 한국사 30분, 탐구 1과목 30분, 탐구 2과목 30분.
이안이 한국사를 풀었다. 객관식 20문항, 무리 없이 통과. 탐구 1과목 사회문화. 객관식 20문항. 마지막 문항 17번에서 한 번 멈췄다. 답이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이안이 답을 한 번 적었다, 마킹했다, 그다음 문항으로 갔다. 그다음 문항을 풀고 17번으로 돌아왔다. 마킹된 답을 한 번 봤다.
수정테이프를 들었다. 답을 바꿀지 망설였다. 1초, 2초.
수정테이프를 도로 책상에 놓았다. 처음 마킹한 답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사탕의 단맛이 입 안에서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 사라지는 단맛의 마지막에 이안이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네 점수 네가 써.'
시우가 자기 점수를 결정한 만큼 이안도 자기 점수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처음 푼 답을 바꾸지 않는다는 결정이 이안의 결정이었다.
다음 문항으로 갔다.
탐구 2과목 생활과 윤리. 객관식 20문항. 시간 안에 다 풀었다.
16시 37분 종, 시험지 회수.
이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가벼웠다, 평소의 시험 직후보다 한 단계 가벼웠다. 가방을 들고 시험실에서 나왔다, 복도에서 하린과 마주쳤다.
"언니, 어땠어."
"...괜찮았어."
"진짜?"
"...어. 다 풀었어."
하린이 이안의 얼굴을 한 번 봤다. 이안이 평소보다 약간 풀어진 표정이라는 걸 하린은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16시 37분. 시우 시점. 별관 시험실.
시우가 별관 시험실에서 시험지를 회수했다. 답을 다 적었다, 한 번도 지우지 않았다. 답란이 비어 있지 않은 답안지가 시우 앞에 놓여 있었다.
감독관이 답안지를 들었다. 들 때 답안지 위쪽을 한 번 더 봤다, 1초였다. 감독관이 답안지를 들고 시험실 앞쪽으로 가서 다른 답안지와 함께 묶었다.
시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시험실에서 나왔다.
별관 복도가 비어 있었다, 본관 학생들과 동선이 분리되어 있었다. 시우가 별관 1층 로비를 지나서 별관 출구로 나왔다, 본관과 별관을 잇는 짧은 복도를 지나 본관으로 갔다.
본관 1층 로비에 학생들이 가득했다, 시험이 끝난 토요일 오후의 분위기였다. 시우가 학생들 사이를 지나갔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1차 자습실 분리 첫 주가 끝난 토요일 오후였다.
본관 자판기 쪽을 지났다. 자판기 옆 30센티 사각, 시우가 그 사각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자리였다. 어제 도현이 카메라 각도를 조정했다는 정보를 시우는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른 채로, 도현의 콘솔에 그 사각이 새로 잡히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만 하고 있었다.
시우가 자판기 옆을 지나서 1차 자습실 쪽으로 걸었다. 시우의 1차 자습실은 본관 4층 끝에 별도로 마련된 작은 방이었다, 별도 책상이 하나, 감독관용 의자가 하나. 토요일 저녁에도 시우는 그 방에 들어가서 자습을 해야 했다.
방문을 열기 전에 시우가 복도 창문 쪽을 잠깐 봤다. 4층 창문 너머로 학원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 한쪽에 본관 시험을 끝낸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무리 안에 이안의 묶은 머리가 있었다, 하린이 옆에 있었다.
시우가 1초만 봤다. 1초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자기 1차 자습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