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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호 후에는 고백 금지

18화 너희 둘 다 나빠

하린은 진술서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여자 기숙동 세면대 앞은 붐볐다.

드라이기 소리, 세면도구 통 부딪히는 소리, 누가 탐구 프린트를 찾는 소리, 조교가 복도에서 "소등 준비"라고 외치는 소리.

그 사이에서 하린은 단어장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그러다 단어장을 찢었다.

서윤은 놀랐다.

"뭐 해?"

"나 지금 질투랑 걱정이 같이 와서 뭐라도 찢어야겠어."

"하린아."

"너희 둘 다 나빠."

말은 장난처럼 나왔지만, 눈은 아니었다.

"나는 네가 걔 좋아하는 거 먼저 봤고, 걔가 너 좋아하는 것도 봤어. 근데 둘 다 아닌 척하느라 주변 사람만 바보 만들잖아."

서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하린은 찢어진 단어장 조각을 모았다.

"나 차이준 좋아했어."

"알아."

"아니. 너는 몰라."

하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나는 그냥 괜찮다 수준 아니었어. S반 빌보드 붙을 때 걔 이름 찾았고, 식당에서 어느 줄 서는지도 봤고, 도겸이한테 괜히 물어본 적도 있어."

서윤은 숨을 삼켰다.

"근데 걔가 네 이름 볼 때, 내 쪽으로는 한 번도 그런 얼굴 안 하더라."

그 말은 질투였고,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끝내지 마."

하린은 단어장 조각을 주먹 안에 쥐었다.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나쁜 애 같잖아. 나는 그냥, 내 친구가 나한테도 숨기고 걔한테도 숨기고, 그러다 둘 다 망하는 거 보는 게 싫어."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정확히 말했다.

"나 좋아해."

하린의 손이 멈췄다.

서윤은 한 번 더 말했다.

"차이준 좋아해. 근데 그거 인정하면 공부도, 엄마도, 너도, 다 망칠까 봐 무서웠어."

하린은 오래 말이 없었다.

복도에서 소등 5분 전 방송이 울렸다.

그제야 하린이 말했다.

"그럼 더더욱 똑바로 해."

"응."

"좋아하는 걸 핑계로 남 상처 주지 말고, 숨기는 걸 책임감이라고 부르지도 마."

"응."

그날 자습실에서 서윤은 이준에게 쪽지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쉬는 시간에 직접 말했다.

"하린이 다 알아."

"미안."

"나한테 말하지 말고 하린한테 해."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로 하린에게 갔다.

멀리서 하린이 팔짱을 끼고 이준을 노려봤다.

이준은 한참 고개를 숙였다.

도겸이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와, 차이준이 저렇게 오래 사과하는 거 처음 봐."

서윤은 그 장면을 보다가,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숨기는 것보다 아픈 일이 있었다.

하지만 숨기는 것보다 나은 일도 있었다.

하린은 돌아와 찢어진 단어장 조각 하나를 서윤에게 던졌다.

그 조각에는 단어 하나가 남아 있었다.

`honest`

하린이 말했다.

"이제 네가 그거 외워."

서윤은 조각을 손바닥에 올렸다.

종이는 작았지만,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