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숨기지 않았다.
중앙평가센터 지하 3층. INTEGRATION PROGRAM 교육실. 모니터에 수리논리 심화 문제가 떴다. 비선형 동역학 모델링. NAS 등급 산출 알고리즘의 기초가 되는 수학.
시우의 손이 키보드 위를 달렸다. 변수를 분리하고, 행렬을 재구성하고, 수렴 조건을 도출했다. 막힘이 없었다. 물이 경사를 따라 흐르듯.
4년 동안 일부러 틀려온 문제들. 답을 알면서 오답을 눌러온 시간들. 그 속박이 풀렸을 때 느낀 것은 — 해방감이었다.
'이게 나야.'
손끝에서 숫자가 쏟아졌다. 옆자리의 후보자가 아직 첫 번째 항을 분리하고 있을 때 시우는 이미 최종 해에 도달해 있었다.
그 해방감 바로 뒤에, 자기 혐오가 밀려왔다.
'이 실력이 진짜라면, 4년 동안 소율이를 지킬 수 있었어.'
'일부러 F에 머문 건 나야.'
'아니 — F에 머물게 만든 건 누군가의 조작이야.'
생각이 뒤엉켰다. 키보드를 치는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서정원이 교육실 뒤편에서 관찰하고 있었다.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 다만 시우가 문제를 풀 때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오후 교육. 정책 시뮬레이션.
모니터에 가상 시나리오가 떴다. '외곽거주구 D-7의 등급 하락률이 전월 대비 15% 증가. 해당 구역의 자원 배분을 조정하시오.'
다른 후보자들이 데이터를 분석하며 배급량 조정안과 이주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시우는 화면을 응시했다.
'자원 배분을 조정하시오.'
'사람이야. 숫자가 아니라.'
이 시뮬레이션은 NAS의 관리자가 하는 일의 축소판이었다. 등급이 떨어진 구역에 배급을 줄이고, 의료를 제한하고, 이동권을 축소하는 — 그 결정을 내리는 연습.
'소율이가 살고 있는 곳이야. 7-F.'
옆자리 후보자가 효율적인 배급 삭감안을 제출했다. 시우는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서정원이 다가왔다.
"제출하지 않았군."
"시나리오가 현실적이지 않아서요."
"현실적이지 않다고?"
"외곽거주구 등급 하락률이 15% 증가한 원인 분석 없이 자원 배분부터 조정하는 건 대증요법입니다. 해결이 아니에요."
서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관점이야. 시스템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군."
칭찬인지 평가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 지하도서관.
시우가 계단을 내려갔을 때, 평소와 다른 공기를 느꼈다. 조용해야 할 공간에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높은 톤.
장면이 보였다. 긴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강민혁과 한 남자가 마주 서 있었다.
남자는 시우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각진 턱. 짧게 깎은 머리. 눈에 서린 분노가 날것 그대로였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지하의 서늘한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준하. 윤서가 얘기해준 적 있었다. 넘버리스 내부의 직접행동파.
"3년이야, 강민혁." 이준하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렸다. "3년 동안 증거만 모았어. 파일만 쌓았어. 그래서 뭐가 바뀌었어?"
"증거가 충분히 모이면—"
"충분히? 얼마나 더?" 이준하가 테이블을 쳤다. 종이 파일이 흩어졌다. "내 어머니가 F등급 강등 후 배급도 못 받아서 쓰러졌을 때 — 증거가 부족해서 못 도운 거야? 아버지가 의료 사각지대에서 죽었을 때 — 파일이 몇 장 더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조직원 몇몇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몇몇의 눈에는 이준하에 대한 동조가 보였다.
"직접행동이 필요해." 이준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까의 폭발과는 다른,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 "NAS 지역 관리소를 타격한다. 서버를 물리적으로 파괴한다. 그래야 놈들이 흔들려."
"그러면 NAS는 넘버리스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 소탕에 나서." 강민혁이 담담하게 받았다. "지금까지 쌓은 것이 전부 무너져."
"쌓은 게 뭔데!" 이준하가 다시 소리쳤다. "종이 더미! 아무도 안 읽을 종이 더미!"
이준하가 돌아서서 계단을 향했다. 다섯 명의 조직원이 뒤따랐다. 발소리가 콘크리트에 울리며 멀어졌다.
강민혁은 흩어진 파일을 주워 담았다. 그 모습이 — 수업 끝나고 칠판을 닦는 교사처럼 보였다.
시우가 기둥 옆에 서 있자 윤서가 다가왔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이준하." 시우가 낮게 말했다. "심해?"
"점점 더." 윤서가 팔짱을 꼈다. "동조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
시우가 윤서를 보았다. 윤서의 눈에서 갈등이 읽혔다. 강민혁의 온건함을 이해하면서도, 이준하의 분노에 공감하는.
"넌 어떻게 생각해?"
윤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증거만 모으다 몇 년이야. 사람들은 -지금- 죽고 있어." 목소리가 낮았다. "하지만 폭력이 답인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아. 머리로는."
"가슴으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이준하가 사라진 계단을 보았다.
그날 밤. 지하도서관 끝 복도에서 시우와 윤서가 마주 앉았다.
시우가 낮의 INTEGRATION PROGRAM에 대해 보고했다. 수리논리 심화. 정책 시뮬레이션. 서정원의 관찰. 모두 종이에.
"S등급 시설에서 수업 받는 기분이 어때?" 윤서가 물었다. 톤이 가벼웠지만 눈은 가볍지 않았다.
"이상해." 시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 처음으로 진짜 실력을 써도 되는 곳에 있으니까. 그게 — 좋으면 안 되는데 좋아."
윤서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미소는 아니었다.
"거기서 따뜻한 밥을 먹고 있으면 여기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시우가 손목의 이중 코드를 내려다보았다. "소율이가, 지하도서관이, 외곽거주구가. 숫자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침묵이 흘렀다.
"넌 S등급 시설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뭘 안다고."
윤서의 말이었다. 같은 문장. 하지만 던지는 방식이 달랐다. 비난이 아니라 확인.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 네 입으로 말하니까 다행이야." 윤서가 작게 웃었다.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거든."
시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까지는 아니었지만.
"미안해." 윤서가 말했다. "지난번에. 너무했어."
"아니, 네 말이 맞았어."
"그래도 네가 거기 들어간 건 네 선택이야. 위험을 알면서도." 윤서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건 인정해."
잠깐의 침묵. 불편하지 않은 종류.
"시우."
"응."
"이준하가 관리소에 방화를 계획하고 있어."
공기가 바뀌었다.
"확인된 거야?"
"소문이야. 하지만 이준하는 소문을 내는 사람이 아니지." 윤서의 표정이 굳었다. "관리소에 불이 나면 NAS 보안이 외곽거주구 전체를 수색해. 지하도서관이 위험해져."
"강민혁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준하를 막을 방법이 없어. 조직에서 나가겠다고 하면 모를까."
시우는 손목의 이중 코드를 내려다보았다. S와 F.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또 다른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INTEGRATION PROGRAM에서 돌아오는 길.
중앙평가센터를 나와 외곽거주구 방향 셔틀 정류장으로 걸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 너머로 삼성타워 특별거주구의 첨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발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보폭이 좁고 조심스러운 걸음. 뒤를 따르는.
'미행.'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대신 유리 건물의 반사를 이용해 뒤를 확인했다. 남자. 후드를 쓰고 있었다. NAS 보안요원의 검정 재킷이 아니었다. 낡은 옷. 외곽거주구 쪽 사람.
'NAS가 아니야. 그럼 누구지.'
골목 하나를 돌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기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모퉁이를 돌아온 남자의 팔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왜 따라와."
남자가 놀라 후드가 벗겨졌다. 스물 중반쯤. 눈 밑에 그림자가 짙었고, 왼쪽 귀 뒤에 — 빈 원 문신.
넘버리스.
"나를 왜 미행해."
"이, 이준하 형이..."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INTEGRATION PROGRAM에 들어간 사람이 진짜로 넘버리스 편인지 확인하래요."
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을 놓았다.
'이준하.'
넘버리스 내부에서 시우를 감시하고 있다. NAS의 스파이인지, 넘버리스의 배신자인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적의 내부에 들어갔더니, 아군의 내부에서도 의심이 시작되었다.
남자가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빈 골목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 별은 없었다. 두 개의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같은 시각. 외곽거주구 7-F 동쪽 끝.
셔틀 정류장의 전광판에 등급 변동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 소년이 한 명 서 있었다.
곽태준.
D등급 배지가 달린 새 재킷. NAS에서 승급 후보자에게 지급하는 감색 재킷이었다. 짐가방 하나를 든 채 D등급 거주구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F등급 거주구를 떠나는 날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닿았다. 부러움, 질투, 경멸, 그리고 아주 드물게 — 희망. '나도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태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가 왔다. 문이 열렸다. NAS 코드를 스캔하고 올라탔다.
[인증 완료 — 곽태준 / D등급 / 이주 확인]
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외곽거주구 7-F의 회색 콘크리트가 스쳐 지나갔다. 17년을 보낸 곳. 곰팡이 냄새와 배급 감자와 미지근한 콩나물국.
'올라갈 수 있어. 노력하면 된다.'
그 믿음이 여기까지 데려왔다. 3개월 연속 D등급 커트라인 달성. 새벽 4시 기상, 18시간 공부. 이를 갈며 쌓아올린 3개월.
그런데.
'너의 그 노력이 헛된 게 아니라, 이 시스템 자체가 조작됐다는 거야.'
한시우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특별거주구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 눈. 거짓말하는 눈이 아니었다.
'NAS는 처음부터 특정 사람들의 점수를 조작했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아니야. 시스템이 조작됐다고? 증거도 없이. 그건 실패한 놈들이 하는 변명이야.'
하지만 속삭임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이면, 내 3개월은 뭐가 되는 거야.'
버스가 D등급 거주구 게이트를 통과했다. 새로운 주거동이 보였다. F등급보다 넓고, 깨끗하고, 창문이 있는.
태준은 짐가방을 쥔 채 내렸다. 새 세계. 더 높은 곳.
하지만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어디선가, 한시우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