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지 못했다.
아니, 잘 수가 없었다. 태블릿 화면의 숫자가 눈 뒤에 새겨져 있었다. 987. 312. 987. 312. 눈을 감아도 명멸했다.
시우는 이층 침대 아래칸에 누운 채 천장을 보았다. 위칸에서 소율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사이사이 작은 기침이 섞여 나왔다.
'987점. S등급.'
그것이 자신의 진짜 점수라면, 지난 4년은 무엇이었나.
새벽 3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태블릿을 꺼내 다시 NAS 아카이브에 접속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데이터가 아니라, 다른 F등급 인원들의 기록을 추적했다.
커서가 화면을 가로질렀다. 데이터가 스크롤되었다.
첫 번째 — 박은채, 15세, F등급. 원본 점수 945, 보정 후 298. 두 번째 — 김도윤, 19세, F등급. 원본 점수 963, 보정 후 305. 세 번째 — 이하준, 22세, F등급. 원본 점수 971, 보정 후 287.
눈이 가늘어졌다.
패턴이 있었다. 모두 S등급에 해당하는 원본 점수. 모두 F등급으로 '보정'. 그리고 하나 더 — 보정 일자가 전부 같았다. 2027년 8월. NAS 최초 시행일.
시스템이 가동된 바로 그날, 누군가가 특정 인원들의 점수를 조직적으로 조작했다.
'왜?'
S등급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왜 F등급으로 떨어뜨리지?
왼쪽 손목이 간지러웠다. NAS 코드가 내장된 부위. 검은 테이프를 걷어내자 코드 주변의 피부가 붉어져 있었다. 칩이 진동하고 있었다 — 분명하게.
코드의 숫자가 깜박거렸다.
F-7824. F-7824. S-08—
눈이 벌어졌다. 일순간 코드 앞자리가 S로 바뀌었다가 다시 F로 돌아왔다. 0.5초도 안 되는 시간. 하지만 시우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뭐야. 지금 S가 떴어?'
손목을 움켜쥐었다. 코드는 이미 F-7824로 돌아가 있었다. 진동도 멈추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오작동? 아니면 — 원래 코드가 새어나온 건가?'
태블릿을 닫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소율의 기침이 또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오후. 거주동 밖으로 나왔다. 외곽거주구 7-F의 거리는 늘 같았다. 회색 벽, 회색 바닥, 회색 하늘. 전광판만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며 이번 달 컷 변동과 상위 등급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골목을 돌았을 때.
"어젯밤에 재밌는 짓 했지?"
벽에 기대선 여자가 말했다. 단발머리. 구제 군용 재킷. 날렵한 인상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시우의 발이 멈추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세요."
"차윤서. 18살. 너랑 같은 F등급." 벽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 다가왔다. "정확히는, '이전에는' F등급."
"무슨 소리야."
"넌 어젯밤에 NAS 아카이브에 접속했어. 새벽 0시 14분. 구형 서버의 마이그레이션 허점을 통해." 윤서가 시우의 표정 변화를 즐기듯 관찰했다. "걱정 마. 정부 쪽에서는 감지 못 했어. 우리가 먼저 감지한 거니까."
"우리?"
윤서가 군용 재킷 깃을 세우며 왼쪽 귀 뒤를 보여주었다. 작은 문신. 빈 원.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원.
넘버리스.
시우는 그 문신을 본 적이 있었다. 외곽거주구 벽면에 가끔 스프레이로 그려져 있는 낙서. 정부는 테러 단체의 심볼이라고 했다. NAS 폐지를 주장하는 과격파.
"넘버리스."
"정답." 윤서가 웃었다. 거친 웃음이었다. "우리는 NAS를 해킹하는 게 아니야. 감시하는 거야. 누가 접속하나, 뭘 찾나. 네가 찾은 점수 보정 기록, 우리도 이미 알고 있어."
시우의 턱이 경직되었다.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해?"
"합류."
"싫어."
돌아서려 했다. 윤서가 뒤에서 말했다.
"네 아버지도 같은 걸 발견했어."
발이 콘크리트에 박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서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눈이 시우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장난기는 없었다.
"한정호. 2029년에 D등급에서 F등급으로 강등. 강등 후 NAS 시스템의 이상 데이터를 추적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2주 후에 사라졌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우리도 찾고 있어. 네 아버지가 뭘 발견했는지, 왜 사라졌는지." 윤서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네가 어젯밤에 찾은 건 시작이야. 빙산의 꼭대기. 밑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
"생각은 나중에 해. 지금은 따라올 시간이야."
윤서가 돌아서서 골목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빠른 걸음. 군용 부츠가 젖은 바닥을 찼다.
시우는 3초를 서 있었다.
그리고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외곽거주구 7-F의 구석, 폐쇄된 하수도 점검구 뒤에 숨겨져 있었다. 윤서가 녹슨 철문을 열자 습기 섞인 공기가 올라왔다. 곰팡이가 아니라 종이 냄새. 오래된 종이 특유의 누렇고 따뜻한 냄새.
계단을 내려갈수록 빛이 달라졌다. 형광등이 아닌 백열등의 노란 빛이 콘크리트 벽을 물들였다. 그 빛 아래에 책이 있었다.
벽면 전체가 책이었다.
시우의 발이 멈추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나무 선반에 가득 꽂힌 종이 책들. NAS 이전 시대의 것들. 소설, 역사서, 교과서, 사전 — 디지털로 전환되며 폐기 처분된 것들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NAS 체제에서 종이 책은 사실상 불법이다. 디지털 검열을 피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지하도서관이야." 윤서가 말했다. "정부의 디지털 감시가 닿지 않는 곳. 아날로그만 사용해."
공간은 넓었다. 하수도 시설의 메인 터널을 개조한 것이었다. 한쪽에는 긴 나무 테이블, 몇 사람이 앉아 종이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쪽에는 칠판. 복잡한 다이어그램이 분필로 그려져 있었다.
"넘버리스가 뭔지 알아?" 윤서가 시우를 돌아보았다. "숫자를 거부하는 거야. 네 점수가 몇이든 상관없다는 거야."
"테러 단체라고 들었는데."
"폭탄 만드는 사람 본 적 있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을 읽는 사람. 문서를 비교하는 사람. 조용히 토론하는 사람. 무기는 없었다.
"우리가 하는 건 데이터를 모으는 거야. NAS가 조작한 증거를 수집하고, 진실을 기록하고, 때가 되면 세상에 공개하는 것."
윤서가 테이블 앞으로 시우를 이끌었다. 종이 파일이 쌓여 있었다.
"네가 찾은 점수 보정 기록 — 너 혼자만이 아니야.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가 127명. 전부 최초 평가에서 S등급 수준이었고, 전부 F등급으로 떨어졌어."
"127명..." 시우가 중얼거렸다.
"패턴이 있어. 전부 특정 유전자 마커를 공유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는데, 아직 확인은 안 됐어. 네 아버지도 이 부분을 파고 있었어."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돌았다. 127명. 유전자 마커. 아버지.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윤서가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수리논리 문제가 적혀 있었다. 손으로 쓴 것. 복잡한 비선형 연립방정식, 확률 모델링, 그리고 — NAS 보정 알고리즘의 수학적 구조를 역추적하는 문제.
"이걸 풀 수 있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3초. 5초. 10초.
테이블 위의 연필을 집어 들었다.
숫자가 흘러나왔다. 변수를 분리하고, 행렬을 재구성하고, 확률 분포를 역산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의 풀이가 손끝으로 쏟아졌다.
2분 47초.
연필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는 빽빽한 풀이 과정과 깔끔한 답.
윤서가 종이를 들어 확인했다. 눈이 커졌다. 천천히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S등급 머리였어."
그 말이 가슴을 관통했다. S등급. 자신의 '진짜'.
주변의 넘버리스 조직원 몇몇이 고개를 들었다. 경이와 경계가 뒤섞인 시선.
"넌 우리가 필요해. 그리고 우리도 네가 필요해." 윤서가 말했다. "NAS 보정 알고리즘을 해독할 수 있는 건 — 바로 그 알고리즘에 의해 조작당한 사람이야."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서지도 않았다.
윤서가 맞은편에 앉았다.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
"네 아버지는 혼자 했어. 그래서 사라졌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혼자 하지 마."
거주동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7시쯤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기침. 하지만 아까와 달랐다. 깊고, 거칠고, 끊이지 않았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방문을 열었다. 소율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소율아!"
무릎을 꿇었다. 소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이 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가슴이 급격하게 오르내리며 쌕쌕거리는 호흡음. 숨을 들이쉬려 안간힘을 쓰지만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오... 빠..."
소율의 손이 시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작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오빠가 있어. 괜찮아."
한 손으로 소율을 안고, 다른 손으로 NAS 응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벽면의 빨간 버튼. F등급 거주구에 유일하게 제공되는 의료 접근 수단.
전자음이 울렸다.
[F등급 응급 호출이 접수되었습니다.] [현재 대기: 47건] [예상 대기 시간: 약 2시간 10분] [증상이 악화될 경우 가까운 평가센터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2시간 10분.
이빨이 맞물렸다.
소율의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쌕쌕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작은 몸이 품에서 떨리고 있었다.
"오빠... 숨이..."
"알아. 알아, 소율아. 오빠가 해결할게."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았다. F등급 의료 대기 2시간. 가장 가까운 평가센터 응급실은 D등급 이상만 이용 가능. B등급 이상 병원은 NAS 코드 인증 필수.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 한 가지.
소율을 안은 채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을 켜고, 오후에 윤서가 알려준 연락 경로를 떠올렸다. 아날로그 방식 — 지하도서관의 유선 전화 번호.
복도의 공동전화기를 잡았다. 번호를 눌렀다.
세 번 울리고 윤서의 목소리.
"시우?"
"소율이가 쓰러졌어. 호흡 발작이야. F등급 응급 대기가 2시간이야."
"..."
"도와줘."
그 두 글자가 입에서 나오는 데 4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혼자 해야 안전하다고, 누구도 믿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온 4년. 그 벽이 두 글자에 금이 갔다.
전화기 너머 짧은 침묵.
"30분만 버텨. 방법이 있어."
전화가 끊겼다.
방으로 돌아와 소율을 안았다. 이불을 덮고, 등을 쓸어주고, 숨이 끊기지 않도록 상체를 세워 주었다.
소율의 손이 셔츠를 놓지 않았다.
"오빠... 나 죽는 거야?"
"아니. 절대 아니야."
뜨거운 것이 눈에서 흘렀다. 한 방울. 소율이 볼 수 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닦았다.
'987점.'
'그 점수가 진짜라면, 소율이를 살릴 수 있었어.'
'S등급이었다면 최고급 의료를, 깨끗한 공기를, 따뜻한 밥을.'
'누군가 빼앗은 거야. 소율이의 숨을. 소율이의 삶을.'
분노가 슬픔을 삼켰다.
소율의 이마에 이마를 대었다. 작은 아이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오빠가 꼭 고칠게. 전부 다."
그 말은 소율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스템에게, 이 세계에게 한 것이었다.
벽면의 NAS 응급 호출 화면이 무심하게 깜박거렸다.
[예상 대기 시간: 약 2시간 0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