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비문학만 아니라 문학도 같이 봐줘."
스터디룸 테이블 위에 서연의 3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놓여 있었다. 서연이 직접 꺼내 놓은 것이었다. 성적표를 빠르게 접어 감추던 사람이, 직접.
국어 — 2등급. 표준점수 124.
"이대로면 의대 수시 최저를 못 맞춰."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성적표를 내려놓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걸 보았다.
3화 끝, 서연이 성적표를 감추듯 접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슨 사정인지 몰랐다. 이제 알았다.
"수시 최저가 국어 1등급이야?"
"서울대 의예과 수시 지역균형. 국수영탐 중 3개 합 5 이내. 국어가 2등급이면 나머지 셋이 전부 1등급이어도 합 5야. 한 과목만 더 흔들리면 끝이야."
서연이 볼펜을 돌렸다. 날카로운 눈이 성적표 위를 훑었다.
"비문학에서 3문제 틀렸어. 네 프레임워크 적용하기 전이었으니까. 근데 문학에서도 1문제 틀렸어. 고전소설."
"고전소설?"
"현대시는 괜찮은데, 고전소설이랑 고전시가가 약해. 어휘가 낯설어서 해석 자체가 느려져."
나를 올려다보았다.
"국어 비문학은 네 프레임워크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문학까지 봐줘야 해. 그게 조건."
'서연이 이렇게까지 약점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다.'
전교 1등의 갑옷. 그 안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3월 모의고사가 균열의 시작이었다.
"좋아. 고전 문학은 내가 따로 정리해서 가져올게. 주요 고전소설 지문 유형이랑 자주 나오는 고어 어휘 목록."
"……고마워는 안 해."
"거래니까."
서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라 긴장이 풀리는 표정.
다음 날 아침. 교실.
1교시 시작 전, 교실 앞문이 열리고 낯선 얼굴이 들어왔다.
담임 오쌤이 뒤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전학생이다. 자기소개 해."
남학생. 키가 컸다. 180은 되어 보였다. 단정한 머리, 교복 위에 네이비색 가디건, 자세가 바르고 눈이 또렷했다. 학교가 바뀌어도 위축됨이 없는 얼굴.
"이준혁입니다. 용인에 있는 한빛고에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고 깔끔한 인사. 목소리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교실이 잠깐 웅성거렸다. "자사고 출신 아니야?" "학기 중에 전학이 왜?" 속삭임이 돌았다.
오쌤이 빈 자리를 가리켰다. 내 왼쪽 두 칸 옆. 준혁이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준혁.'
그 이름을 검색했다. 머릿속의 기억을, 돌아오기 전의 1년을 전부 뒤졌다.
없었다.
'전에 이 녀석은 없었는데.'
3학년 5반 교실에 이준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전학생은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기억이 틀린 건가?'
아니면 전에도 전학 왔었는데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모른 건가. 가능성은 있었다. 그때는 교실에서 누가 오고 가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혼자 벽을 보고 공부했으니까.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건 변수야. 계산에 없던 변수.'
1교시 종이 울렸다. 시선을 칠판으로 돌렸다. 하지만 준혁의 존재가 시야 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시간. 구내식당.
정호가 밥을 먹으며 물었다.
"전학생 봤어? 자사고 출신이래."
"응."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학이 흔한 건 아닌데. 무슨 사정이 있나 봐."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으며 말하는 정호에게 전학생은 그냥 새로운 얼굴이었다.
나에게는 달랐다.
밥을 먹고 교실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준혁과 마주쳤다. 준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한시우 맞지?"
멈추었다.
"전교 성적표에서 봤어. 전교 30등 정도?"
"그 정도."
준혁이 웃었다. 여유 있는 웃음이었다.
"나도 정시 준비 중이야. 서울대 경영."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같은 목표. 정시. 서울대 경영학과.
"표점 합산 싸움이잖아, 정시는. 수학은 내가 자신 있어. 너는?"
"……수학도 하고 있어."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같은 반이니까."
돌아서서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
'예의 바르다. 하지만.'
준혁의 눈. 웃고 있었지만 재고 있었다. 탐색하는 눈.
자사고에서 전학 온 학생이 첫날부터 내 성적 순위를 확인하고 다가온 것. 수학에 자신 있다고 말하며 서울대 경영을 선언한 것. 우연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만만하지 않다.'
방과 후. 독서실 25시 스터디룸.
서연과의 스터디. 경제가 추가된 첫 날이었다.
서연이 경제 기출문제집을 펼쳤다. 비교우위 파트.
"비교우위는 공식만 외우면 안 돼. 표를 그릴 줄 알아야 해."
빈 종이에 2x2 표를 그렸다. A국, B국. X재, Y재.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을 채워 넣고, 기회비용을 계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게 우리 아빠가 병원 경영 이야기할 때 쓰는 방식이야. 자원 배분의 효율성. 경제학의 근본이지."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서연이 '아빠'를 언급한 것에 주목했다.
"의사 집안이면 경제 감각도 있구나."
서연의 손이 멈추었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볼펜을 내려놓고 잠시 창 너머를 보았다.
"……아빠 얘기는 하지 마."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가운 게 아니라 닫히는 목소리. 문을 닫는 소리.
"……미안."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기출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문제."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빠 얘기는 하지 마'라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교실에서 멍한 표정을 짓던 서연, 성적표를 감추던 서연, 그리고 지금 아버지 이야기를 차단하는 서연.
'전부 연결되어 있어.'
의대. 부모. 서연이 짊어진 무게.
하지만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니었다. 서연이 문을 닫은 것이다. 닫힌 문을 억지로 열면 안 된다. 전에는 그걸 몰랐다. 사람의 문을 두드리는 것과 부수는 것의 차이를.
"비교우위 다음은 환율이야. 여기가 진짜 까다롭거든."
서연의 설명에 집중했다. 볼펜을 들고 노트에 적었다.
스터디룸의 시계가 8시를 가리켰을 때, 서연이 문제집을 닫았다.
"내일까지 비교우위 기출 5문제 풀어 와. 틀리면 화요일 스터디에서 다시 잡는다."
"알았어."
서연이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문을 열며 돌아보았다.
"그 전학생."
"이준혁?"
"자사고에서 왔다면서. 성적 좋대?"
"전교 5등 이내라는 소문."
서연의 눈이 좁아졌다. 계산하는 눈.
"수학은?"
"자신 있다고 하더라."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서연에게도 준혁은 변수일 것이다. 전교 1등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변수.
귀가 후. 밤 11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꺼져 있었고, 창밖의 가로등 불빛만 방 안에 들어왔다. 노원구 아파트 숲의 야경이 창문에 비쳤다.
이준혁.
기억에 없는 이름. 지난 생의 1년을 전부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름.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 전에도 준혁이 전학 왔었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가능성은 있다. 그때는 교실에서 누가 오고 가는지 관심이 없었다. 혼자 벽을 보고 공부했으니까. 전학생이 왔어도 이름조차 몰랐을 수 있다.
둘.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 내 행동이 바뀌면서 다른 무언가도 바뀐 건지, 아니면 이 세계 자체가 내 기억과 완벽히 같지 않은 건지.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았다.
'내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검색창에 '서라벌고등학교 전학'이라고 치다가 멈추었다. 검색해봤자 나오지 않는다. 전학 기록은 공개되지 않는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에도 준혁이 전학 왔었다면,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것일 수도 있어.'
가능성이 더 높은 쪽은 이것이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년 전으로 돌아온 사람이 합리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면.'
지금까지의 전략은 기억에 기반해 있었다. 사탐을 경제로 바꾼 것, 서연에게 스터디를 제안한 것, 수학 킬러 대비 루트를 바꾼 것. 전부 '그때 어떤 선택이 잘못이었는지'를 기억하기에 가능했다.
기억이 틀린다면?
전략 전체가 흔들린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희미한 직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가진 건 이것뿐이다. 불완전한 기억과, 그 기억을 토대로 세운 전략과, 옆에 있는 사람들.
'불완전한 무기라도 쓸 수밖에 없어.'
눈을 감았다. 내일 할 일이 떠올랐다. 비교우위 기출 5문제. 국어 고전소설 정리. 수학 중반부 10문제.
그리고——이준혁.
경계해야 할 이름이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