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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능

4화 계산 밖의 숫자

경제 3등급.

오쌤의 책상 위에 내 성적표가 놓여 있었다. 안경을 고쳐 쓰며 성적표를 들어 올리는 오쌤. 분필 가루가 묻은 손가락이 '경제' 칸을 짚었다.

"한시우. 약속이 뭐였지?"

"2등급입니다."

"몇 등급이야?"

"……3등급입니다."

성적표가 책상 위로 내려왔다. 탁. 소리가 조용한 교무실에 울렸다.

"사문으로 돌아와."

짧고 단호했다. 예상한 말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턱이 굳었다.

"선생님."

"약속은 약속이야. 2등급 못 받으면 사문으로 돌아온다. 네가 한 말이잖아."

맞았다. 내가 한 말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원점수 보셨습니까?"

오쌤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경제 원점수 38점입니다. 2등급 컷이 42점이었습니다. 4점 차이."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밤새 정리한 데이터.

"3주간 독학으로 38점이면, 6월 모의고사까지 두 달 넘게 남아 있습니다. 성장 곡선으로 보면 2등급은 도달 가능합니다."

노트를 펼쳐 오쌤 앞에 놓았다. 경제 단원별 학습 진도, 오답률 추이, 예상 도달 점수. 오쌤이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읽는 건지 안 읽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

"숫자만 보지 말라고 했지."

"숫자가 아닙니다. 근거입니다."

오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눈이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 피곤함 아래에 무언가가 있었다. 짜증이 아니라—

저울질.

침묵이 5초쯤 흘렀다. 교무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렸다.

"……6월 모의고사."

입이 열렸다.

"마지막 기회야. 6월에도 2등급 못 받으면, 그때는 내가 뭐라 해도 사문으로 돌린다. 됐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등이 땀으로 축축했다.

'유예. 6월까지.'

두 달. 경제 교과서 전 단원을 끝내고, 기출을 돌리고, 2등급을 찍어야 한다. 인강도 없이. 학교 수업도 없이.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문으로 돌아가면 표준점수에서 몇 점을 손해 본다. 서울대 경영학과 정시 입결이 표준점수 합산 407점. 탐구 표점 차이는 합격과 불합격의 경계선이다.

'6월까지. 반드시.'


방과 후. 독서실 25시.

경제 교과서를 펼쳤다. 3단원, 시장과 경제. 시장 실패. 외부 효과. 공공재.

한 페이지를 읽고, 노트에 정리하고, 확인 문제를 풀었다. 틀린 문제에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서연이 하는 방식을 흉내 낸 것이었다.

4단원으로 넘어갔다. 국민 경제의 활동과 경제 변동. GDP, GNI, 경제성장률.

개념 자체는 이해되었다. 응용 문제에서 막혔다. 명목 GDP와 실질 GDP의 차이를 그래프로 해석하는 문제. 교과서만으로는 풀이 과정이 보이지 않았다.

'인강이 있으면 3분이면 이해할 건데.'

볼펜을 돌렸다. 과목당 월 수강료가 5만 원이라 해도, 엄마는 이번 달도 야근 중이었다. 학원비 대출. 그 위에 인강비를 얹을 수는 없었다.

교과서를 다시 읽었다. 세 번째. 그래프 아래의 설명을 한 줄씩 짚어가며.

시계를 보니 밤 9시. 경제에만 3시간을 쓴 셈이었다. 수학 기출 20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고, 국어 비문학 지문 분석도 해야 했다.

경제 교과서를 닫으며 연필로 짧은 메모를 적었다.

'포기한 것 중 가장 큰 가치가 기회비용이다.'

교과서 1단원에서 읽은 문장이었다. 밑줄을 그었다. 두 번.

'내 기회비용은 뭘까.'

그 질문은 대답하지 않은 채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수요일 저녁. 독서실 25시 스터디룸.

서연이 내 3월 모의고사 수학 오답 노트를 펼쳐 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서연의 표정을 살폈다.

"14번."

볼펜으로 문제를 짚었다.

"이거 왜 틀렸어?"

"계산 실수——"

"아니."

서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계산 실수가 아니야. 조건을 안 읽은 거야. 문제에 x > 0이라는 조건이 있는데 네 풀이에 음수 해가 들어가 있어."

오답 노트를 다시 보았다. 맞았다.

"16번도 마찬가지야. 너는 킬러에 집중하느라 중반부를 가볍게 봐. 쉬운 문제니까 빨리 넘기려고 하는데, 그 '빨리'가 독이야."

지적이 정확히 아팠다.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성적표가 증명하고 있었다. 킬러를 맞히고도 3등급. 중반부에서 무너진 것이다.

"……맞아."

서연이 빈 종이를 꺼내 도식을 그렸다.

"중반부 훈련 루트. 10번에서 18번까지의 문제를 매일 10문제씩, 시간 제한 걸고 풀어. 한 문제당 4분. 조건 밑줄 치는 습관부터 잡아."

"4분이면 빠듯한데."

"실전은 더 빠듯해."

반박할 수 없었다. 서연이 건넨 도식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고마워."

"거래니까."

표정은 차가웠지만, 도식을 그리는 손은 꼼꼼했다. 서연은 대충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목요일 점심시간. 교실.

정호가 한국사 교과서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표정이 심각했다.

"시우야. 중간고사 한국사 범위가 일제강점기까지래."

"그래서?"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외울 게 산더미야. 조약 이름만 열 개가 넘어."

"앉아."

정호가 옆 의자를 끌어 앉았다. 한국사 교과서를 펼쳤다. 포스트잇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는데, 색깔에 규칙이 없었다. 정리가 아니라 혼란의 흔적.

"정호야, 조약을 하나씩 외우려고 하지 마."

"그러면?"

"흐름으로 잡아. 개항기는 '외세의 압력에 문을 연다'가 핵심이야. 강화도 조약이 시작이고, 그 뒤에 불평등 조약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하나하나 외우는 게 아니라, 왜 이 조약이 나왔는지 앞뒤 맥락을 연결하는 거야."

노트에 타임라인을 그렸다. 강화도 조약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동학농민운동 → 을미사변 → 아관파천. 각 사건 사이에 화살표를 긋고, 원인과 결과를 적었다.

"이렇게 흐름이 보이면, 조약 이름은 자연스럽게 따라와."

정호가 타임라인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커졌다.

"야…… 이거 한눈에 보인다."

"암기법이 아니라 이해야. 시험에서 연도를 물어봐도 흐름을 알면 앞뒤로 추정할 수 있어."

정호가 타임라인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니가 선생님이면 좋겠다."

웃었다. 정호도 웃었다.

"장조림으로 갚기엔 점점 빚이 쌓이는데."

"괜찮아. 이자는 안 받을게."

정호가 깔깔 웃었다. 교실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전에 이 웃음소리를 외면했다. 공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이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밤 11시. 독서실 25시.

형광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경제 기출을 풀고 있었다. 5단원, 세계 시장과 교역. 비교우위와 절대우위.

문제를 읽었다. 두 번. 세 번.

'A국이 X재 1단위를 생산하는 데 노동 2단위, Y재 1단위를 생산하는 데 노동 3단위가 필요하다. B국은 X재에 노동 4단위, Y재에 노동 5단위. A국의 X재 기회비용은?'

머릿속에서 공식이 돌아갔다. X재 1단위 생산의 기회비용. 노동 2단위로 Y재를 만들면 2/3단위. X재의 기회비용은 Y재 2/3단위.

해설을 확인했다. 맞았다. 하지만 왜 맞는지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공식으로 찍은 것과 이해한 것은 다르다.

교과서를 다시 펼쳤다. 비교우위 설명이 두 줄. 두 줄로는 부족했다.

인강이 있으면 강사가 표를 그려가며 3분이면 풀어줄 것이다. 학교 수업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없었다.

칸막이 너머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독서실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서너 명. 밤 11시의 독서실은 볼펜 소리와 환기팬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이건 통제 가능한 변수야.'

되뇌었다. 확신이 예전 같지 않았다. 수학은 서연이 있었다. 국어와 영어는 원래 강점이었다. 경제는—

혼자였다.

노트를 덮고 눈을 감았다.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하루에 경제만 4시간을 쓰고도, 개념 하나가 완전히 잡히지 않는 느낌.

'괜찮아. 변수일 뿐이야. 통제 가능한——'

"한시우."

눈을 떴다.

고개를 들자, 칸막이 입구에 서연이 서 있었다. 교복이 아니라 회색 후드티에 청바지. 한 손에 경제 기출문제집을 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서연이 기출문제집을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탁.

"거래 추가."

"……뭐?"

"내가 경제 도와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기출문제집을 펼쳤다. 비교우위 파트. 내가 막혀 있던 바로 그 단원.

"대신 조건 하나 더."

서연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와 달랐다. 날카로움이 빠져 있었다. 안경 너머 눈이—불안해 보였다.

"조건이 뭔데?"

서연이 입을 열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기출문제집의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내일 스터디에서 얘기할게."

비교우위 파트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박또박했지만, 그 짧은 망설임이 머릿속에 남았다.

서연의 표정. 불안.

전교 1등의 갑옷 아래에 무언가가 금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