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A4 두 장짜리 문서를 들고 교실에 들어섰다.
'비문학 지문 분석 3단계 프레임워크.'
밤새 정리한 것이었다. 내 국어 비문학 풀이법은 단순하다. 첫째, 지문의 구조를 먼저 파악한다—정의, 원인-결과, 비교-대조, 문제-해결. 둘째, 각 단락의 핵심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단락 간의 논리적 연결을 화살표로 표시한다. 셋째, 선지를 지문 문장과 1:1로 대응시켜 소거한다.
서연은 아침 자습 시간에 그 문서를 받아 들었다. 읽는 데 3분. 안경 너머 눈이 A4 위를 훑는 속도가 빨랐다.
"……이거, 니가 직접 만든 거야?"
"응."
"기출 적용해 봤어?"
"2023학년도 수능 비문학 전 지문에 적용했어. 이 프레임으로 풀면 평균 풀이 시간 30초 단축돼."
서연이 A4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날카로움이 아니라—인정.
"좋아."
단 두 글자.
"일주일에 3회, 방과 후 독서실 25시에서. 5시부터 8시까지 3시간. 성적 떨어지면 바로 끝이야."
"받아들일게."
서연이 볼펜을 들어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요일과 시간. 깔끔한 글씨체를 내려다보았다.
'동맹이 성립됐다.'
스터디 첫날. 독서실 25시, 2인용 스터디룸.
좁은 방이었다. 접이식 테이블 하나에 의자 두 개. 형광등이 노르스름한 빛을 내고, 환기가 안 돼서 공기가 텁텁했다. 하지만 둘 다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았다.
서연이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미적분. 킬러 문항 모음.
"여기서부터."
손가락이 21번 유형 문제를 가리켰다.
"킬러는 두 가지 패턴으로 나와. 첫 번째는 함수의 그래프 해석. 조건을 하나씩 분리해서 그래프에 표시하면 돼. 문제는 두 번째."
다른 문제를 가리켰다.
"미적분 개념이 복합적으로 엮인 유형. 풀이를 외워서는 절대 못 풀어. 구조를 봐야 해."
"구조?"
"문제가 요구하는 게 뭔지를 먼저 파악하라는 뜻이야. 대부분은 문제를 읽자마자 풀이에 들어가. 그러다 길을 잃지."
볼펜으로 문제 밑에 화살표를 그렸다.
"먼저 물어봐. '이 문제는 뭘 구하라는 거지?' 그다음 '어떤 조건을 줬지?' 조건을 전부 나열하고, 조건 사이의 관계를 찾아. 풀이는 그다음이야. 이건 워밍업이고, 진짜 킬러는 조건이 4개 이상 엮여. 그건 다음에."
서연의 설명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난번에 멘탈이 무너졌던 문제 유형. 수능 당일, 21번을 10분 넘게 붙잡다가 뒷목이 뻣뻣해지고 손에 땀이 찼던 그 유형이었다. 서연이 지금 분석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그 패턴.
'이걸 그때 알았더라면.'
분함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이번엔 준비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해봐."
서연이 문제집을 내 쪽으로 밀었다. 볼펜을 들었다.
''이 문제는 뭘 구하라는 거지?''
함수 f(x)의 극값의 합.
''어떤 조건을 줬지?''
f(x)는 삼차함수, f(0) = 0, f'(1) = 0, f(2) = 4.
조건을 나열했다. 관계를 찾았다. f'(x)가 이차함수라는 것, f'(1) = 0이라는 조건에서 또 다른 극점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
3분.
답이 나왔다.
서연이 해설을 확인했다. 맞았다.
"나쁘지 않네."
칭찬은 짧았다. 하지만 그 두 마디의 무게를 알았다. 서연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연습 문제야. 실전에서는 시간 압박이랑 멘탈이 변수로 들어와. 그게 진짜 문제지."
'맞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해도 수능은 내가 쳐야 한다.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르다.
"그래서 반복 훈련이 필요해. 같은 유형을 30문제 이상 풀어서 손이 먼저 움직이게 만들어야 해."
"30문제."
"최소."
노트에 '킬러 유형 반복 훈련 30제+'라고 적었다.
'회귀해도 공부는 해야 하는구나.'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마법이 아니라 노력의 문제라면,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이니까.
서연의 차례. 국어 비문학.
2023학년도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을 프린트해 왔다. 과학 지문.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
서연이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옆에서 풀이 과정을 지켜보았다.
문제가 보였다. 서연은 지문을 한 번에 통째로 읽으려 했다. 단락을 나누지 않고, 구조를 파악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는 속도는 빨랐지만, 선지를 볼 때 다시 지문으로 돌아가 찾느라 시간이 길어졌다.
"멈춰봐."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날카로웠다. 지적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표정.
"네 문제는 독해력이 아니야. 전략이야."
프린트 위에 볼펜으로 괄호를 쳤다. 각 단락을 구분선으로 나누었다.
"1단락은 정의. 불확정성 원리가 뭔지 설명하는 부분. 2단락은 원인-결과. 왜 불확정성이 발생하는지. 3단락, 비교.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 4단락, 적용. 실제 사례."
서연이 내 손을 따라 지문을 다시 보았다.
"이 구조를 먼저 잡으면, 선지가 어떤 단락에서 나왔는지 바로 찾을 수 있어. 지문 전체를 다시 읽을 필요 없고."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논리가 맞다는 걸 아는 표정이기도 했다.
"……해볼게."
다른 지문을 꺼내 프레임워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구조를 파악하는 데 오히려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세 번째 지문부터 속도가 붙었다.
"선지 대응이 빨라졌어."
서연이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연은 스스로 깨닫는 사람이다. 옆에서 떠들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스터디룸의 시계가 8시를 가리켰다. 3시간이 흘러 있었다. 둘 다 시간을 의식하지 못했다.
서연이 문제집을 닫으며 말했다.
"풀이를 외우지 마. 구조를 봐. 킬러는 항상 같은 뼈대야."
수학 킬러에 대한 요약이었다. 동시에 내 비문학 프레임워크에 대한 간접적 인정이기도 했다. 구조를 보는 것. 두 사람의 접근법은 닮아 있었다.
"다음 스터디, 수요일."
가방을 메며 서연이 말했다.
"알았어."
서연이 나간 뒤, 혼자 남아 노트를 정리했다.
'이건 될 수도 있겠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점심시간.
교실 뒤쪽, 내 자리. 삼각김밥을 먹고 있는데 정호가 다가왔다. 평소의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어폰이 양쪽 귀에 다 꽂혀 있었는데, 음악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차단용이었다.
"시우야."
"응."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입을 열지 못했다. 기다렸다. 전의 나였다면 "뭔데, 빨리 말해"라고 재촉했을 것이다. 이번엔 기다렸다.
"나…… 체대 못 가."
조용한 목소리였다. 정호의 목소리가 이렇게 작아지는 건 처음이었다.
"무릎. 작년 여름에 다쳤거든. 십자인대. 수술은 했는데 완전 회복이 안 돼."
삼각김밥을 내려놓았다.
"축구 특기자 포기했어. 코치한테 말했더니 '몸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래. 그 한마디로 끝."
정호가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 것에 가까웠다.
"3년 동안 새벽 운동하고, 주말마다 연습 경기 뛰고, 다 했는데. 무릎 한 번 나가니까 끝이래."
정호의 다리를 보았다. 왼쪽 무릎. 등교 첫날 복도에서 살짝 절뚝이던 그 다리.
"체육교육과 수시 쓸 건데."
정호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내신이 안 돼. 전교 120등인데, 체교과 수시 최저가 내신 3등급 이내야. 지금 4등급이거든."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솔직히 나는 니가 부러워. 최소한 목표는 확실하잖아."
가슴이 아렸다. 그때 정호가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빠"로 막아버렸을 것이다. 정호는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번엔 달랐다.
"정호야."
"응."
"내신 과목 조합, 내가 한번 봐줄까."
정호가 눈을 깜빡였다.
"뭐?"
"체교과 수시면 학생부 종합이잖아. 내신도 중요하지만 생기부가 핵심이야. 네 체육 관련 활동은 생기부에 다 들어가 있을 거고, 문제는 내신 최저만 맞추면 되는 거야."
머릿속에서 입시 데이터가 돌아갔다. 체육교육과 수시 전형. 학생부 종합. 서류+면접. 내신 최저학력기준: 국수영탐 중 2개 합 5~6등급 이내. 학교마다 다르지만 보통 그 범위.
"4등급이면 좀 빠듯하지만, 3학년 1학기에 올리면 가능성 있어. 잘하는 과목이 뭐야?"
"……체육?"
"학과목."
"아…… 한국사? 그나마."
"한국사랑, 사회 쪽으로 하나 더 잡으면 돼. 생윤이나 사문. 암기 비중이 높아서 단기간에 올릴 수 있어."
정호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니가…… 왜 갑자기 이래?"
'알지. 내가 왜 갑자기 이런지.'
밥 얻어먹은 걸 갚는 게 아니었다. 전에 놓쳐버린 것을 이번엔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밥 얻어먹은 거 갚는 거야."
정호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야, 소고기 장조림 하나에 입시 컨설팅이야?"
"장조림 맛있었으니까."
"……미친놈."
웃으며 눈가를 닦았다. 나는 모른 척 삼각김밥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 녀석은 체교과 간다. 이번엔 반드시.'
3월 마지막 주. 3월 모의고사.
시험 당일 아침. 평소보다 30분 일찍 교실에 도착했다. 1교시 국어 시작 전,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호흡. 들이쉬고, 4초. 참고, 4초. 내쉬고, 4초.
'루틴.'
돌아오기 전에는 이런 준비가 없었다. 시험지를 받으면 바로 풀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든 말든. 결국 수학에서 심장 박동이 사고를 집어삼켰다.
이번엔 다르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국어.
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문학, 과학 지문. 프레임워크를 적용했다. 구조 파악, 단락 구분, 핵심 문장 밑줄. 선지 대응. 흔들림 없이 넘어갔다.
문학. 현대시 한 편, 고전소설 한 편. 익숙한 유형. 시간 안에 마무리.
'국어, 안정적.'
영어. 듣기 평가를 끝내고 독해로 넘어갔다. 빈칸 추론, 순서 배열. 강점 과목. 흔들림 없이 마크.
'영어, 안정적.'
점심시간. 밥을 먹지 않았다. 초콜릿 바 하나를 씹으며 수학 공식을 복기했다. 서연이 내 자리 옆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하지 마."
그리고 지나갔다.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그 한마디가 가슴에 닿았다.
오후. 수학.
시험지를 뒤집었다. 1번부터 순서대로. 1번, 2번, 3번. 쉬운 문제를 빠르게 넘겼다. 5번, 8번, 10번. 중간 난이도. 서연이 알려준 접근법이 손에 익어 있었다. 조건 나열, 관계 파악, 풀이.
15번에서 살짝 멈칫했다. 하지만 15분 룰. 넘기고 다음 문제.
20번까지 도달했다. 시간 확인. 35분 남음. 넘겼던 15번으로 돌아갔다. 다시 읽으니 보였다. 조건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수정. 답을 적었다.
21번. 킬러.
심장이 빨라졌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시험지 위의 글자가—
'흔들렸다.'
그때의 감각이 돌아왔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시험장의 소리가 커지고, 연필 소리가, 시험지 넘기는 소리가, 감독관의 구두 소리가—
'멈춰.'
볼펜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호흡. 들이쉬고, 4초. 참고, 4초. 내쉬고, 4초.
'혼자가 아니야.'
서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풀이를 외우지 마. 구조를 봐. 킬러는 항상 같은 뼈대야.'
정호의 도시락. 소고기 장조림의 짭조름한 맛. '니가 고맙다고?'
'이번엔 혼자가 아니야.'
눈을 떴다. 시험지를 다시 보았다. 21번.
''이 문제는 뭘 구하라는 거지?''
조건을 나열했다. 관계를 찾았다. 구조가 보였다. 함수의 그래프 해석 유형. 서연과 연습했던 패턴이었다.
풀었다.
22번. 마지막 킬러. 시간이 부족했다. 12분. 복합 유형. 조건을 나열하다가 시간이 흘렀다. 답을 확정하지 못한 채 마크를 찍었다. 감이었다.
종료 벨.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21번은 맞았을 거야. 22번은…… 모르겠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멘탈이 무너지지 않았다. 떨렸지만, 돌아왔다. 호흡이 돌아왔고, 풀이가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다르다.'
약 3주 뒤. 4월 중순. 3월 모의고사 성적 공개일.
오쌤이 교실 앞에서 성적표를 나눠줬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고 종이를 건넸다. 내 차례가 왔다.
"한시우."
오쌤이 성적표를 건네며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읽히지 않는 표정이었다.
자리로 돌아가 성적표를 펼쳤다.
국어 — 1등급. 표준점수 131.
'좋아.'
영어 — 1등급. 절대평가.
'좋아.'
사회탐구 생활과윤리 — 1등급. 표준점수 67.
'좋아.'
사회탐구 경제 — 3등급. 표준점수 58.
손이 잠깐 멈추었다.
'3등급. 오쌤과의 약속은 2등급인데.'
그리고 수학.
눈이 멈추었다.
수학 — 3등급. 표준점수 119.
손이 차가워졌다.
'3등급.'
21번은 맞았다. 서연의 방법이 통했다. 22번은 틀렸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문제는 중반부였다. 14번, 16번, 17번. 풀었다고 생각한 문제들. 세 문제 중 두 문제를 틀렸다. 조건을 하나 빠트리거나, 계산 실수를 했거나. 킬러가 아니라 중반부에서 무너진 것이다.
전과는 다른 패턴의 실패. 전에는 킬러에서 멘탈이 붕괴되며 뒤가 무너졌다. 이번에는 킬러는 잡았지만 중반부를 가볍게 보았다.
'회귀가 만능이 아니라는 거야.'
성적표를 쥔 채 굳어 있었다. 교실이 웅성거렸다. 잘 나온 아이들의 환호, 안 나온 아이들의 한숨.
서연이 맨 앞자리에서 자기 성적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 게 보였다. 잠깐—서연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랐다. 성적표를 접는 손이 빨랐다. 감추듯이.
'서연의 성적도 뭔가 있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호가 다가왔다.
"시우야, 어때?"
"……."
"야, 왜 그래? 안 좋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수학 3등급. 이 성적으로는 서울대는커녕 상위권 대학도 힘들다. 3월이니까 아직 시간이 있다고 스스로를 달랠 수 있지만, 오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리한 학생치고 좋은 결과 본 적 없어.''
그리고 경제 3등급. 오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쌤한테 뭐라고 말하지.'
성적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수학 3등급. 킬러를 맞히고도 3등급. 그때와 다른 유형의 실패. 회귀의 기억이 지켜준 것과 지켜주지 못한 것 사이에서, 새로운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교실 창으로 4월의 햇살이 들어왔다. 벚꽃이 만개한 교정이 보였다. 봄 한가운데였다. 수능까지 211일.
주머니 속 성적표를 한 번 더 쥐었다.
'괜찮아. 변수일 뿐이야. 통제 가능한 변수.'
하지만 손끝이 떨렸다.
'……정말?'
확신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이 여정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