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로 바꾸겠다고?"
오쌤의 안경 너머 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회색 카디건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교무실 칸막이 안, 좁은 상담 공간. 책상 위에 변경 신청서가 펼쳐져 있었다.
"네."
"사회문화는 내가 수업하잖아. 내신도 관리해줄 수 있고. 경제는 우리 학교에 전담 선생님도 없어. 혼자 독학해야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오쌤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삐걱, 소리가 났다.
"이유가 뭐야."
준비해 온 말이 있었다. 표준점수 데이터, 사회문화 만점자의 표점 분포와 경제 만점자의 표점 분포 비교, 최근 3년간의 추이. 하지만 오쌤에게 숫자를 꺼내면 "숫자만 보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돌아오기 전에 겪었으니까.
"적성에 맞습니다."
"적성? 경제 해본 적 있어?"
"수학적 사고가 필요한 과목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한테 맞을 것 같습니다."
오쌤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묵직한 한숨.
"시우야. 솔직히 말해볼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서울대 경영학과. 정시. 네 목표 알아. 근데 작년 입결 알아? 수학 1등급은 기본이고, 국어도 1등급 가까이 맞아야 해. 현실적으로 생각해."
'현실적으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전에도 이 단어를 들었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그 단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현실적으로 안전하게 갔고, 현실적으로 망했다.
"선생님."
오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월 모의고사에서 경제 2등급 이상 받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회를 주세요."
오쌤의 눈썹이 꿈틀했다. 학생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조건을 내건 적이 드문 모양이었다.
"……3월 모의고사는 한 달도 안 남았어."
"알고 있습니다."
"경제 교과서 한 번도 안 펼쳐 본 학생이?"
"해보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오쌤이 안경을 벗고 렌즈를 닦았다. 느린 동작이었다.
"……좋아. 3월 모의고사. 경제 2등급. 못 받으면 사문으로 돌아온다. 됐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등에 땀이 배어 있었다.
'첫 번째 관문 통과.'
하지만 시작일 뿐이었다. 3월 모의고사까지 3주. 경제 교과서를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상태에서 2등급.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할 수 있어. 이건 통제 가능한 변수야.'
다음 날, 쉬는 시간.
교실 맨 뒷자리에서 경제 교과서를 펼쳤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교과서. 첫 단원, 경제생활과 경제 문제.
'기회비용, 매몰비용, 합리적 선택…….'
용어가 낯설지 않았다. 수학적 사고와 닮아 있었다. 그래프를 읽고, 변수를 분석하고, 최적의 답을 찾는 과정. 사회문화의 암기와는 결이 달랐다.
'이건 나한테 맞아.'
확신이 한 겹 더 쌓였다.
종이 울렸다. 3교시 시작. 수학.
교과서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교실 맨 앞 창가 자리에 윤서연이 앉아 있었다. 이미 수학 문제집을 펼쳐 놓고, 선생님이 들어오기도 전에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때 서연은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진 사람이었다. 성적표 위의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같은 교실에 있었지만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서연이 문제집 위에 볼펜을 내려놓았다. 오답에 빨간 밑줄을 그었다. 밑줄을 긋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서연의 시선이 문제집을 벗어나 창밖으로 향했다.
멍한 표정.
3월의 햇살이 안경에 반사되었다, 날카롭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흐릿해졌다. 눈동자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교실도, 칠판도, 문제집도 아닌 다른 어딘가.
2초. 어쩌면 3초.
서연은 다시 고개를 숙여 문제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만 그 2초를 보았다.
'저건 뭐지.'
수업이 시작되었다. 서연에게서 눈을 떼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서연의 흐릿한 눈이 남아 있었다.
방과 후. 중계동 '독서실 25시'.
칸막이 안에서 경제 교과서와 씨름했다. 1단원은 수월했다. 하지만 2단원 '시장과 경제활동'부터 그래프가 쏟아졌다. 수요·공급 곡선, 균형 가격, 탄력성.
'공급 곡선이 우상향하는 건 가격이 오르면 생산자가 더 많이 공급하니까. 맞아. 그런데 탄력성이 1보다 크면…….'
볼펜으로 그래프를 그리다 멈추었다. 머리가 과부하 상태였다. 수학, 국어, 영어에 경제까지. 과목이 하나 늘었다는 건 하루에 필요한 시간이 2시간 더 늘었다는 뜻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47분.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시우야, 엄마."
"응."
"늦게까지 하고 있어?"
"응. 좀 더 하다 갈게."
잠깐의 침묵. 엄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오늘 학원비 대출 받았다. 상반기 거. 너 걱정은 말고."
볼펜이 멈추었다.
"……응."
"밥은 먹었어?"
"먹었어."
거짓말이었다.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너무 늦지 말고 들어와. 내일도 학교 있잖아."
"알았어."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수요·공급 그래프 위에 볼펜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학원비 대출.'
엄마는 간호조무사다. 노원구 개인 병원 야근조. 월급의 절반 이상이 내 학원비와 독서실비로 나간다. 알고 있었다.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혼자 버텼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힘들다고 말하면 엄마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결과로 갚는다.'
경제 교과서를 다시 펼쳤다. 탄력성. 수요의 가격 탄력성. 공식. 그래프. 볼펜을 쥐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더 뽑았다. 300원. 여전히 미지근하고 설탕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구내식당 대신 교실에서 먹기로 했다. 시간을 아끼려고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를 사 왔다.
"야."
정호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뭐야."
"니 엄마 야근이라며."
눈이 커졌다. 정호가 도시락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스테인리스 도시락통. 뚜껑을 열자 소고기 장조림, 계란말이, 김치볶음밥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우리 엄마가 싸준 거. 니 도시락 안 가져오는 거 알길래."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생이 떠올랐다. 정호가 이렇게 도시락을 가져왔던 적이 있었다. 4월쯤이었을까. "괜찮아, 바빠"라고 했다. 정호가 "그래……" 하며 도시락을 다시 가져갔다. 그 뒤로 정호는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그랬지.'
목이 먹먹해졌다.
"……고마워."
정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소름. 니가 고맙다고?"
"왜, 못 해?"
"아니, 할 수 있지. 근데 니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들어봐서."
정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도시락을 펼쳤다.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 장조림을 입에 넣자 짭조름한 맛이 혀에 퍼졌다. 따뜻했다. 단순히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호야."
"응?"
"……아니. 맛있다."
"그치? 우리 엄마 요리 잘하잖아."
정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밥을 떠먹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계란말이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번엔 안 놓친다.'
이 온기를. 이 사람을.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학원으로 빠졌고, 서너 명만 자습 중이었다. 맨 앞자리에 서연.
가방을 들고 서연의 자리로 걸어갔다. 심장이 뛰었다. 담임실 앞에 섰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 오쌤은 넘어야 할 벽이었지만, 서연은—
'설득해야 할 사람이야.'
"윤서연."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이 나를 훑었다. 이름을 불렀다는 것 자체가 의외라는 표정.
"뭐."
"할 말이 있어."
볼펜을 내려놓았다. 문제집 위에 빨간 밑줄이 빼곡했다.
"스터디 하자."
서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수학이랑 국어. 서로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스터디."
서연이 나를 2초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왜 내가 너랑 해야 하는데."
차가웠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전교 1등이 전교 30등과 스터디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돌아오기 전의 기억이 있었다.
6월 모의고사. 서연의 국어 성적. 2등급. 비문학 지문에서 무너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교 1등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네 국어 비문학. 3월 모의고사 예상 등급, 2등급이지?"
서연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고개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 아래에 흔들림이 있었다.
"……뭔 소리야."
"작년 네 국어 내신. 비문학 파트에서 항상 감점이 있었어. 문학은 만점인데 비문학만 떨어져. 맞지?"
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사실 서연의 내신 성적을 직접 아는 건 아니었다. 지난 생의 기억과, 교실에서 서연이 비문학 문제를 풀 때 유독 시간을 오래 쓰는 걸 관찰한 추론이었다. 서연의 반응이 그걸 확인해 주었다.
"거래하자."
한 발 다가섰다.
"내가 국어 비문학 잡아줄게. 지문 분석법, 선지 소거법. 대신 네 수학 킬러 풀이 루트 공유해. 21번, 22번 접근법."
서연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눈을 읽듯이.
"……너, 갑자기 왜 이래?"
"뭐가."
"작년까지 한 번도 말 안 걸었으면서. 고3 되자마자 스터디? 그것도 나한테?"
답을 준비해 두지 않았다. '회귀해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올해 달라지려고."
서연의 시선이 내 얼굴 위를 훑었다.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눈. 계산하는 눈.
입을 열었다.
"싫어."
돌아서며 문제집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왜?"
"이유 없어. 혼자 해."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내 옆을 지나쳐 교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가라앉았다.
'거절.'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허탈했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회귀 전의 나라면 여기서 돌아섰을 것이다. '됐어, 혼자 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다르다.
"윤서연."
교실 문 앞에서 서연이 멈추었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네 6월 모의고사 국어, 이대로면 2등급이야. 비문학에서 2문제 이상 틀려. 지금 풀고 있는 방식으로는."
어깨가 굳었다.
"그건 의대 수시 최저에 걸려. 국어 1등급. 놓치면 수시 전체가 날아가."
교실이 조용했다. 남아 있던 학생 서너 명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서연이 천천히 돌아섰다.
"……도와달라고?"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거부가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야. 서로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거. 도움이 아니라 교환."
서연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초. 5초.
"……좋아."
심장이 뛰었다.
"대신 조건 있어."
서연이 한 발 다가왔다.
"국어 비문학 풀이법. 알려준다며. 내일까지 네 방법론 정리해서 가져와. 그거 보고 판단할게. 쓸모없으면 끝이야."
"좋아."
서연이 돌아서서 교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빈 교실에 서서 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줄이 연결됐다.'
아직 약속이 아니었다. 조건부. 하지만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 창으로 3월의 저녁 하늘이 보였다. 붉은 노을이 아파트 숲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내일까지 비문학 풀이법을 정리해야 한다. 경제 2단원을 끝내야 한다. 수학 기출 20문제를 풀어야 한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것만으로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