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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능

1화 이미 본 시험지

수학 영역 4등급.

성적표의 숫자가 눈에 박혔다. 종이를 쥔 손이 떨렸다. 떨림이 아니라 경련에 가까웠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그저 바라보았다.

국어 2등급. 영어 1등급. 사회탐구 2등급.

수학만 아니었으면.

'수학만 아니었으면.'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수백 번째 맴돌고 있었다. 교실은 이미 비어 있었다.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교 30등.

그 숫자가 가능하게 해주는 대학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곳은 하나였고, 수학 4등급은 그 '하나'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성적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상 철문의 자물쇠는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체육 창고 쪽 비상계단이 열려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3년 동안 이 학교를 다니며 알게 된 몇 안 되는 쓸모 있는 정보.

계단을 올라 철문을 밀자, 12월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노원구의 아파트 숲이 발아래로 펼쳐졌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겨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 서서 구겨진 성적표를 다시 꺼냈다.

수학 영역. 4등급. 원점수 52점. 표준점수 108.

킬러 문항.

21번과 22번에서 멘탈이 무너졌다. 21번을 10분 넘게 붙잡다가 뒷목이 뻣뻣해지고, 손에 땀이 차고, 문제의 글자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아는 문제도 틀렸다. 중반부 15번, 16번. 평소 같으면 3분이면 풀 문제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시험장에서 들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옆자리 연필 소리. 앞자리에서 넘기는 시험지 소리. 감독관의 구두 소리.

그리고 내 심장 소리.

'두근, 두근, 두근.'

그게 수능이었다.

"한 번만 더."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한 번만 더 할 수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눈앞이 희미해졌다. 피곤한 건지, 추운 건지, 아니면 그냥 지친 건지. 난간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의식이 가라앉았다.


삐, 삐, 삐, 삐—

알람 소리.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 형광등. 익숙한 형광등.

'……내 방?'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미끄러졌다. 책상 위에 기출문제집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수능특강, 수능완성, EBS 변형, 기출 모음집.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다.

2024년 3월 4일. 월요일. 오전 6시 30분.

화면을 세 번 다시 확인했다.

2024년. 3월. 4일.

"……뭐야."

이불을 걷어차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얼굴. 핏기 없는 볼, 다크서클, 부스스한 머리카락. 하지만.

젊었다.

12월의 지친 얼굴이 아니었다. 3월의, 불안하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은 얼굴.

손가락을 꼬집었다. 아팠다. 볼을 때렸다. 아팠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웠다.

꿈이 아니었다.

"……돌아온 거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거울 속의 내가 똑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뉴스 헤드라인을 훑었다. 3월 4일. 고3 첫 등교일.

'수능까지 255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확인.

'수능 문제. 기억나나?'

눈을 감고 떠올려 보았다. 수학 1번. ……흐릿했다. 국어 지문.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장의 긴장, 떨림, 식은땀—감각은 생생한데 문제의 내용은 안개 속이었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겠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험장에서 문제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내용이 기억날 리 없었다.

회귀. 이게 진짜라면, 시험지를 들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돌아온 것은—

'기억.'

어떤 과목에서, 왜 무너졌는지. 어떤 선택이 잘못이었는지. 누가 도움이 되었고, 누가 독이었는지. 정시 입결 데이터. 그리고 나 자신의 심리 패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교복을 집어 들었다. 검정 후드집업을 교복 위에 걸쳤다. 거울 속의 나를 마주 보았다.

255일. 채 9개월도 안 남았어.

"이번엔 한 문제도 놓치지 않는다."


서라벌고등학교 정문.

3월의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12월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직 시작 전의 차가움이었다. 끝나버린 뒤의 차가움이 아니라.

교문을 지나며 운동장을 한 번 훑었다. 벚꽃이 아직 피지 않은 가지들, 조회대 옆 게시판, 체육복 입고 뛰어가는 2학년 아이들. 모든 것이 기억 속의 풍경과 정확히 일치했다.

3학년 5반 교실.

문을 열자 소음이 쏟아졌다. 겨울 방학 이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떠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과자를 돌리고, 누군가는 자리 배치를 따지고 있었다.

"야, 시우야!"

익숙한 목소리. 걸음이 멈췄다.

박정호. 창가 쪽에서 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이어폰이 한쪽 귀에 걸려 있고, 교복 위에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자리 여기야! 내 옆!"

정호가 의자를 두드렸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전에 이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던 게 떠올랐다. 정호가 밥 먹자고 했을 때 "바빠"라고 했다. 같이 PC방 가자고 했을 때 "시간 없어"라고 했다. 한 달, 두 달. 정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어."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정호 옆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정호가 환하게 웃었다.

"야, 고3 첫날부터 그렇게 살벌한 눈 하고 있으면 어떡해."

"……원래 이런 눈인데."

"에이, 그래도 오늘은 좀 웃어라. 첫날이잖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정호가 "뭐야 그 좀비 웃음" 하며 깔깔 웃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으로 가는 복도에서 정호가 앞서 걸었다. 나는 정호의 걸음걸이를 보았다. 왼쪽 다리. 살짝 절뚝이는 보폭.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

'무릎.'

정호가 돌아보았다. "뭐 봐?"

"아니. 안 봤어."

"빨리 와. 오늘 메뉴 돈까스래."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게시판 앞을 지나치다 발이 멈췄다.

'서라벌고등학교 2024학년도 대학 합격자 현황'

포스터 맨 위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도현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돌아오기 전, 졸업식 때 무대 위에 서 있던 선배. 학교 역사상 3년 만의 서울대 합격자. 교장이 직접 이름을 부르며 축하했다.

'김도현. 이 사람에 대해 알아봐야 해.'

표정이 굳었다. 시선이 포스터 위에 잠시 머물렀다.

"시우야, 뭐 해! 줄 길어진다!"

정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옮겼다. 포스터 위의 이름이 시야 끝에서 사라졌다.


방과 후. 중계동 '독서실 25시'.

칸막이 사이로 형광 스탠드 불빛만 새어 나오는 공간. 자판기에서 300원짜리 커피를 뽑아 자리에 앉았다. 미지근한 커피. 설탕이 덜 녹아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새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

-[ 바꿀 수 있는 것 ]-

1번. 사탐 조합 변경.

볼펜을 굴리며 생각했다. 전에 사회문화를 선택한 건 오쌤의 수업이 있어서였다. 편하니까. 하지만 사회문화의 표준점수 상한은 생각보다 낮았다. 만점을 받아도 표점이 60대 후반. 반면 경제는 응시 인원이 적고 난이도가 높아서, 잘 치면 표점 70 이상까지 올라간다.

'경제로 바꾸면 수학적 사고가 필요하지만, 나한테는 맞아. 표점 차이가 5~8점이면 대학 한 단계 차이야.'

2번. 수학 학습 루트 변경.

미적분 선택은 유지한다. 확률과 통계로 바꾸면 서울대 경영학과 정시에서 불리하다. 문제는 미적분 킬러 대비. 지난번에는 혼자 기출만 돌렸다. 이번엔 다르게 가야 한다. 풀이를 외우는 게 아니라 구조를 파악하는 훈련.

'서연.'

이름이 떠올랐다. 윤서연. 같은 반 전교 1등. 수학 모의고사에서 항상 1등급을 찍고, 킬러를 풀어내는 몇 안 되는 학생.

그때는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같은 반이었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이번엔 다르게.'

3번. 멘탈 루틴 도입.

시험 전 호흡법. 루틴화된 시간 배분. 킬러 문항 15분 룰—15분 안에 안 풀리면 넘긴다.

4번.

잠시 멈추었다. 볼펜 끝이 종이 위에서 머뭇거렸다.

4번. 사람.

'혼자 하지 않는다.'

밑줄을 그었다. 두 번.

지난 생에서 무너진 건 수학 때문이 아니었다. 수학은 방아쇠였을 뿐이다. 진짜 원인은 혼자 버텼다는 것. 정호의 밥 한 끼도, 엄마의 걱정 전화도, 서연의 존재도—전부 외면하고 혼자 싸웠다. 혼자 무너졌다.

이번엔 다르게 가야 한다.

노트를 덮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미지근하던 게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내일까지 사탐 변경 신청서를 내야 한다.

'오쌤이 문제야.'

담임 오창식. 안전 지원의 신봉자. "현실적으로 생각해라"가 입에 붙은 사람. 전에도 내 서울대 목표에 부정적이었다. 사탐을 바꾸겠다고 하면 반대할 게 뻔했다.

하지만 이건 넘어야 할 산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독서실을 나서며 노트의 '사람' 항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내일. 담임실에 간다. 그리고 서연에게 말을 건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3월의 바람은 겨울이 아직 덜 물러난 바람이었다.


다음 날 방과 후.

변경 신청서를 출력해 왔다. 사회문화 → 경제. 사유란에 '표준점수 유리'라고 적을까 하다가 '적성에 맞음'이라고 고쳤다. 오쌤에게 표점 얘기를 꺼내면 "숫자만 보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3학년부 교무실. 담임실은 안쪽 칸막이 너머.

복도에서 멈추었다. 교무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오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리한 목표 세우면 본인만 힘들어. 재수하면 되냐고? 재수가 뭐 보험이야? 1년 더 하면 뭐가 달라진다고."

다른 학생과 상담 중이었다.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쌤의 목소리만 복도까지 울렸다.

"선생님이 30년 봐왔는데, 무리한 학생치고 좋은 결과 본 적 없어. 안전하게 가. 확실한 데로."

손이 멈추었다. 신청서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30년.'

그때도 이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가 죽었다. 오쌤의 "현실론"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안전하게 가야 한다고.

그래서 사문을 유지했다. 그래서 수학 킬러 대비를 혼자 했다. 그래서 안전하게—안전하게 망했다.

신청서를 다시 쥐었다. 구겨지지 않게, 하지만 단단하게.

'이번엔 안 물러서.'

교무실 안에서 의자 소리가 났다. 상담이 끝나는 모양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학생이 나오고, 내 차례가 될 것이다.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심장이 뛰었다. 수능 시험장에서처럼. 하지만 이번 떨림은 달랐다. 무너지기 직전의 떨림이 아니라, 싸우러 가기 직전의 떨림.

교무실 문이 열렸다.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