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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사피엔스

6화 조교의 시간

유진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7시 43분. 알람보다 17분 먼저 눈이 떴다. 몸이 먼저 깨는 건 불안의 신호라고 어디선가 읽었다. 원룸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3초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세수. 자외선 차단제. 안경.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학원 조끼를 입었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내려 학원까지 걷는 8분이 하루 중 유일한 개인 시간이었다. 이어폰으로 듣는 것은 임용 강의가 아니라 학생이 보낸 질문 음성 메시지였다.

[S반 이서연: 유진쌤, 어제 수학 7번 해설에서 치환 과정이 이해가 안 돼요. 출근하시면 다시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유진은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7번 풀이를 떠올렸다. 치환적분. t = sin x로 놓으면... 맞다. 해설지에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학생이 헷갈릴 만했다.

8시 정각. 6층 조교실. 컴퓨터를 켜고 출결 시스템에 로그인했다.

8시 05분. S반 출석 확인. 12명 중 11명 출석. 한서율 미출석 — 8시 12분에 도착. 지각은 아니지만 다른 학생들보다 늦었다.

8시 30분. 오전 수업 자료 프린트. 차도윤의 국어 교재 보충 프린트 12부. 복사기가 종이를 씹어서 3분 지체.

9시. 수업 시작. 유진은 조교석에 앉아 수업을 보조했다. 차도윤이 칠판에 비문학 구조 분석을 적는 동안, 유진은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해하는 얼굴, 못 따라가는 얼굴. 서율은 후자였다. 펜을 쥔 손이 멈춰 있었다.

10시 30분. 1교시 종료. 쉬는 시간 10분 동안 질문 3건 처리.

11시. 2교시 수학 수업 보조. 수학 강사 한재호의 수업이었다. 유진의 담당은 아니었지만, 조교실에 오는 질문의 60%가 수학이었다.

12시. 점심. 편의점 도시락. 조교실에서 먹었다. 점심시간에도 카카오톡으로 질문이 왔다.

[반수반 김도현: 유진쌤 화작 모의고사 3번 선지 해설 부탁드려요] [S반 박준혁: 쌤 어제 보충 프린트 한 부 더 받을 수 있어요?] [A반 최유나: 선생님 상담 예약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 되세요?]

도시락의 밥이 식었다. 유진은 식은 밥을 한 숟갈 떠먹고 답변을 타이핑했다.

1시. 오후 수업 자료 정리. 차도윤이 보낸 문자.

[차도윤: S반 주간 성적 리포트 오늘 중으로 학부모한테 발송해줘. 서율 점수는 내가 보내는 대로.]

유진은 문자를 읽고 화면을 껐다. '내가 보내는 대로.' 이 말의 의미를 유진은 알고 있었다. 실제 점수가 아닌 다른 점수를 쓰라는 뜻이었다.

2시. 학부모 전화 응대 1건. A반 학부모가 반배치 기준을 물었다. "S반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진은 매뉴얼대로 답했다. "내부 평가와 모의고사 성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합니다." 종합적으로. 이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겨져 있는지,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3시. 보충 수업 보조.

5시. 오후 수업 종료. 저녁 자습 시작 전 30분 공백. 유진은 이 30분을 임용 공부에 쓰려고 매번 다짐했다. 매번 실패했다. 오늘도.

6시. 저녁 자습 순찰.

7시. 학부모 전화 응대 2건.

8시. 야간 수업 보조.

9시. 수업 종료. 자습실 마감 관리.

10시. 퇴근 — 이라고 하기엔 아직 학생 질문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유진의 하루였다. 14시간. 이 14시간 안에 유진 자신을 위한 시간은 0분이었다.


밤 10시 30분. 조교실.

서율이 문을 두드렸다.

"유진 선생님,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유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서율을 봤다. 후드집업에 다크서클. S반에 온 뒤로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 같았다.

"응, 들어와."

서율이 문제집을 펼쳤다. 국어 비문학. 과학 지문.

"이거 3번 선지인데요. '가설이 기각되었다'랑 '귀무가설이 지지되었다'가 왜 같은 뜻이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유진이 문제를 봤다. 통계학 관련 비문학 지문이었다. 풀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봐. 가설이 기각된다는 건 대립가설을 기각하는 거야. 근데 귀무가설이 지지된다는 건 다른 의미지. 기각과 지지의 논리적 관계가..."

설명하다가 잠시 멈췄다. 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잠깐, 이거 쉽게 설명할게." 유진이 볼펜을 들었다. "법정이라고 생각해봐. 피고인이 '무죄'인 게 귀무가설이야. 검사가 유죄를 증명 못 하면 무죄 판결이 나오잖아. 근데 그게 진짜 무죄라는 뜻은 아니야. 증거가 부족한 거지. 그래서 '귀무가설이 기각되지 않았다'랑 '귀무가설이 지지되었다'는 다른 거야."

서율의 눈이 밝아졌다. "아, 그러면 이 선지는 '증명 실패'를 '참'으로 바꿔치기한 거네요."

"맞아. 그게 함정이야."

서율이 노트에 적었다. 적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유진 선생님."

"응?"

"원래 뭐 되고 싶었어요?"

유진의 손이 멈췄다. 볼펜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선생님."

"여기서도 선생님이잖아요."

유진이 서율을 봤다. 서율의 눈은 진심이었다. 위로가 아니라 궁금함이었다. 유진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여기서는 조교지. 선생님이 아니라."

"뭐가 달라요?"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야. 조교는 관리하는 사람이고. 나는 출석 체크하고, 프린트 복사하고, 학부모 전화 받고, 성적 엑셀 정리하고." 유진이 손가락을 꼽았다. "이 중에 가르치는 건 하나도 없어."

서율이 문제집을 가리켰다. "방금 저한테 가르쳐주셨잖아요."

유진이 웃었다. 피곤한 웃음이었지만, 진짜 웃음이었다.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진짜 웃은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좋아서 하는 거야."

서율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제집을 챙겼다. 문 앞에서 돌아섰다.

"선생님, 임용 공부는 하고 계세요?"

유진의 웃음이 멈췄다. 시선이 책상 구석의 임용 교재로 갔다. "2025 교육학 기출분석." 그 위에 S반 성적 관리 서류가 한 장, 학부모 상담 기록이 두 장, 프린트 오류 수정본이 세 장 쌓여 있었다. 교재 표지가 보이지 않았다.

"하고 있어." 유진이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조금씩."

서율은 그 대답을 믿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일 봬요." 문이 닫혔다.

유진은 빈 조교실에 혼자 앉았다. 서류 아래 임용 교재를 꺼냈다. 표지를 봤다.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펼쳤다. 3페이지. 지난번에 읽다 만 곳. 3페이지에서 두 달째 멈춰 있었다.

'올해도 이러다 끝나겠지.'

교재를 다시 덮으려다가, 서율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도 선생님이잖아요." 유진은 교재를 덮지 않고 4페이지를 넘겼다. 1분 뒤 카카오톡이 울려서 교재를 덮었지만, 적어도 한 페이지는 넘겼다.


다음 날 밤 11시. 유진의 원룸.

임용고시 원서접수 페이지가 모니터에 열려 있었다.

유진은 인적사항을 입력했다. 이름 박유진. 생년월일 2001년 3월 14일. 전공 국어교육.

수험 과목 선택에서 커서가 멈췄다.

한국교육사. 교육심리. 교육사회. 교육행정. 교육과정. 교육평가. 교육철학. 교육방법. 이 중에서 4과목을 선택해야 했다.

유진은 교재를 봤다. 3페이지. 아니, 어제 한 페이지 넘겼으니 4페이지. 시험 범위의 3%도 보지 못했다. 원서접수 마감은 8월 말이었다. 한 달 반 남았다.

한 달 반 동안 시험 범위를 다 볼 수 있을까. 학원 업무를 하면서? 하루 14시간을 학원에 쓰고, 나머지 10시간 중 수면 6시간, 출퇴근 1시간, 식사 1시간을 빼면 남는 건 2시간. 2시간으로 임용시험을 준비한다? 올해도 '원서만 내고 포기하는' 패턴이 반복될 것이 보였다.

원서접수 페이지를 닫으려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가 '닫기' 버튼 위에 멈췄다.

'올해도 닫을 거야?'

작년에도 닫았다. 재작년에도 닫았다. 3년째. 매년 원서접수 페이지를 열고, 인적사항까지 쓰고, 수험 과목 선택에서 멈추고, 닫았다. 임용 교재는 매년 새로 사고, 매년 3~4페이지에서 멈췄다.

유진은 '닫기'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카카오톡을 열었다. 학생 질문이 4건 와 있었다.

[S반 강민수: 쌤 수학 미적분 14번 변곡점 판별 과정 확인 부탁합니다] [반수반 김도현: 유진쌤 영어 빈칸 유형 풀이법 자료 있으면 보내주세요 ㅠ] [A반 최유나: 선생님 내일 상담 가능하세요? 반배치 관련해서요] [S반 이서연: 쌤 오늘 설명해주신 거 감사해요! 다음에 또 질문드릴게요 ㅎㅎ]

유진은 답변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강민수의 미적분 문제를 풀어서 사진을 찍었다. 도현에게 빈칸 유형 자료를 첨부했다. 유나에게 내일 오후 4시 상담 가능하다고 답했다. 서연에게 "언제든 질문해~"라고 보냈다.

다 보내고 나니 자정이었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임용 원서접수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유진은 그 페이지를 바라봤다. 인적사항까지 적힌 미완성 원서.

'닫을까.'

'닫으면 올해도 끝이야.'

유진은 페이지를 닫지 않고 모니터를 끄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이 보였다. 아침에 봤던 것과 같은 자국. 하루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 보는 풍경이 같았다. 그 사이에 14시간의 노동이 있었고, 그 노동 중 유진을 위한 시간은 0분이었다.

서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여기서도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

유진은 눈을 감았다. 내일도 7시 43분에 눈이 뜰 것이다.


이틀 뒤. 오후 9시. 조교실.

유진은 S반 성적 관리 엑셀 파일을 열었다. 차도윤이 보낸 학부모 리포트용 수정 점수를 입력해야 했다.

[차도윤: 서율 주간테스트 148 → 195로. 나머지는 원래 점수대로.]

148에서 195. 47점 상향. 유진은 커서를 서율의 점수 칸에 올려놓았다. 148. 이 숫자를 지우고 195를 치면 끝이었다. 3화에서 87을 93으로 바꿨을 때처럼. 그때는 6점이었고 이번에는 47점이었다. 규모만 커졌을 뿐, 행위는 같았다.

키보드를 치려는데, 습관적으로 파일의 '변경 이력' 탭을 열었다. 차도윤이 모르는 기능이었다. 엑셀의 변경 추적. 누가, 언제, 어떤 셀을 바꿨는지 기록되는 탭.

유진은 이 탭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스크롤을 내려봤다.

기록이 있었다.

2023년 7월 — S반 학생, 주간테스트 178 → 203 2023년 9월 — S반 학생 2명, 성적 리포트 점수 상향 조정 2023년 11월 — S반 학생 3명, 일괄 수정 2024년 3월 — S반 학생 2명, 내부 평가 조정 2024년 7월 — S반 강민수, 주간테스트 241 → 258 2024년 9월 — 다수 학생 일괄 수정

유진의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졌다.

'강민수도?'

강민수. S반 1등. 411점. 실력으로 앉아 있다고 서율이 확신하는 — 아니, 유진도 확신하던 — 그 강민수의 점수도 과거에 조작된 적이 있었다.

스크롤을 더 내렸다. 3년치 기록이 있었다. 2022년부터. 유진이 이 학원에 오기 전부터. 조작된 학생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스무 명을 넘어갔다. 서율만 조작된 게 아니었다. 매년, 매 학기, 반복적으로 점수가 조정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이미 있었어.'

그 생각이 위안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이미 있었다는 건, 이것이 시스템이라는 뜻이었다. 차도윤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학원이라는 구조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관행. 유진 전의 조교도 이 일을 했을 것이고, 유진 다음의 조교도 이 일을 할 것이다.

유진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변경 이력의 행들이 스프레드시트를 채우고 있었다. 각 행이 한 명의 학생이었다. 각 숫자가 한 사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 거짓이었다.

손이 떨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USB를 꽂았다. 파일을 복사했다. 변경 이력이 포함된 전체 파일. 3년치.

복사가 완료되었다. 유진은 USB를 빼서 필통 안에 넣었다. 그리고 원래 파일로 돌아가 서율의 점수 칸에 커서를 올렸다.

148을 지우고 195를 쳤다.

저장.

파일이 저장되었다. 유진은 의자에 기대 천장을 봤다. 조교실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한 손에는 저장 버튼을 누른 손가락이 있었고, 주머니 속 필통 안에는 3년치 기록이 담긴 USB가 있었다.

공범이면서 동시에 증인. 유진은 그 두 역할 사이에 서 있었다.

임용 교재 위에 서류가 또 한 장 쌓였다. 교재의 표지가 완전히 가려졌다. '2025 교육학 기출분석'이라는 글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학원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