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수요일 오후. 하린 시점. 청람관 4인실.
하린이 자기 침대 위에 마지막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옷 두 벌, 책 한 권, 세면도구 한 묶음. 청람관에서 열흘 더 머문 짐의 잔여분이었다.
수시 합격한 학교에 12월 중순에 등록을 마쳤다. 2월 중순까지 청람관에 남아 있은 건 부모와의 거리가 한 번 더 필요해서였다, 등록 후 곧장 집에 가는 게 어색해서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를 청람관에서 마저 보냈다. 오늘 2월 25일이 청람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가방 정리를 마치고 4인실을 한 번 둘러봤다. 이안의 침대 위층이 열흘 전부터 비어 있었다, 침대 위에 이불이 정리된 채로 놓여 있었다. 다른 두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
하린이 자기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안에 평소 메모 쪽지가 한 다발 있었다, 5개월 동안 쌓인 쪽지들. 그 안에서 8주 전쯤의 자기 메모를 꺼냈다.
'이안 언니, 요즘 좀 이상해.'
8주 전의 글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 면담 직전에 책상 서랍에서 한 번 봤던 종이, 그 종이를 다시 봤다.
이안의 침대 위층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새로 적었다, 펜으로 한 줄.
'언니, 그때 막지 않아서 다행이야.'
종이를 이안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다음에 누가 이 4인실에 들어와도 그 종이를 발견할 가능성은 낮았다, 청람관 4인실은 한 학기마다 청소되고 책상 위 잔여물은 폐기됐다.
하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도 종이를 적은 건 이안에게 종이가 닿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안쪽에 한 줄을 정리하기 위한 거였다.
두 달쯤 전 자기가 매점에서 한 한 마디 "내가 막아야 하는 일이잖아"가 어머니 면담 끝의 복도에서 "내가 막아야 하는 일이 아니야, 이거"로 바뀌었다. 두 단어의 거리가 7주였다, 그 7주 동안 하린이 한 가지 결정을 안쪽에서 굳혔다. 막지 않는다. 막지 않는 사람이 지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린이 한 번 더 정리했다.
하린이 가방을 들고 4인실 밖으로 나왔다. 정문 앞에서 부모가 차로 데리러 와 있을 거였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청람관 잔류 학생이 다섯 명 안쪽으로 줄어든 시점이라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이 없었다, 1년 가까이 같은 복도에서 매일 마주친 학생들이 한 명씩 청람관을 떠나면서 만들어진 빈 복도였다.
하린이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도현이 사무실 입구에서 하린을 봤다, 가벼운 끄덕임으로 인사를 했다. 하린이 같이 끄덕였다. 5개월 동안 도현과 마주친 횟수가 30번이 안 됐다, 그 30번이 같은 결의 인사로 끝났다.
정문 밖으로 나왔다. 부모의 차가 정문 앞 50미터에 와 있었다, 어머니가 운전석에서 손을 한 번 흔들었다. 하린이 가방을 들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2월 25일 오후 3시. 이안 시점. 어머니의 집.
이안이 어머니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청람관에서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다군 학교 등록을 마치고 입학식 일정 통보를 받았다. 입학식은 3월 둘째 주.
청람관에서 어머니 집으로 옮긴 첫 사흘은 어색했다. 1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자기 방의 책상이 청람관 4인실 책상과 너비가 달랐다, 책상 위 공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한 박자 결정이 안 났다. 어머니가 그동안 책상 위에 둔 사진 액자 한 개를 그대로 두고, 이안이 청람관에서 가져온 책 다섯 권과 노트 일고여덟 권을 책상 왼쪽 끝에 한 줄로 정리했다.
어머니가 처음 사흘은 평소 톤으로 말을 걸었다. "밥 먹어라", "옷 정리 도와줄까", "오늘 학교 가지 뭐 했어". 11년 동안 어머니가 이안에게 한 말이 평소 톤으로 다시 돌아왔다. 평소 톤이 평소 톤이라 어색했다, 어색한 자리에 이안이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사흘이 지나갔다.
나흘째부터 평소 톤이 평소가 됐다. 어색함이 옅어졌다, 어머니의 단어가 11년 동안 옆에 있던 단어로 도로 들어왔다. 단 한 가지가 달랐다, 어머니가 가끔 "네가 결정한 거"라는 단어를 1초 더 길게 발음했다. 그 1초의 길이가 11월 면담실의 어머니가 옮겨와 있는 자리였다.
이안이 자기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2월 15일 청람관에서 가져온 가방 안의 종이 묶음이 책상 서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폰이 울렸다. 학교 홈페이지 알림, 정시 1차 발표 후속. 추가합격 통지나 등록 변경 통지가 가끔 1주 단위로 떴다.
화면을 열었다. 다군 학교 합격 확정 통지였다, 등록 완료 후 1차 변동 없음. 이안이 화면을 닫았다.
이안이 잠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폰 화면이 꺼지면서 화면에 자기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11월 13일 새벽 거울에서 본 얼굴과 다른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옅어졌고 입술의 색이 평소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거울이 아닌 폰 화면에서 자기 얼굴을 짧게 본 것뿐인데, 그 얼굴이 청람관에서의 5개월보다 가벼웠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시우의 종이 한 장과 이안의 답장 종이가 같이 들어 있었다. 두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수능 끝나면 너랑 같은 자리에 앉을게. 야자가 아닌 자리.' '야자 끝나고 어디서 앉을지 같이 정하자.'
이안이 두 종이를 보면서 폰을 들었다. 시우의 번호를 눌렀다.
청람관에서 떠난 다음에 두 사람이 폰 번호를 교환했다. 어머니의 집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한 번 연락한 게 2월 15일 밤, 그 다음에 일주일 동안 짧은 메시지 두세 번. 직접 통화는 처음이었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시우가 받았다.
"...어, 이안."
"...어."
"무슨 일."
"...만나자."
이안이 말했다. 시우가 한 박자 멈췄다.
"...언제."
"...내일."
"...어디."
"...두 학교 사이 어딘가."
"...."
시우가 작게 웃었다. 폰 너머에서 시우의 웃음이 들렸다, 카페에서 들었던 웃음과 같은 결의 웃음.
"...그 어딘가가 어딘데."
"...정해야지."
"...어."
"...."
두 사람이 잠시 폰 너머로 침묵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내일 오후 3시. 두 학교 사이 지하철역 중간 어딘가."
시우가 말했다.
"...어."
"...구체적인 지점은 내일 아침에 메시지 보낼게."
"...어."
전화를 끊었다. 이안이 폰을 책상 위에 놓고 두 종이를 다시 봤다. 두 종이를 책상 서랍에 다시 넣었다, 닫았다.
2월 26일 목요일 오후 3시. 시우 시점. 강남구와 강북구 사이의 카페.
시우가 카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11월 15일에 청람관 근처 카페에서 처음 같이 앉은 후로 두 사람이 외부 카페에서 만나는 것이 세 번째였다, 12월 30일 이후 두 달 만이었다.
카페 안에 손님 다섯 명. 시우가 창가 자리를 잡았다, 카페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가방 안에 사탕 봉지 한 개, 2월 13일에 새로 사서 청람관 마지막 야간자습 때 한 알씩 입에 넣고 남은 봉지.
3시 5분, 이안이 카페에 들어왔다. 검정 코트,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청람관 학원복이 아닌 본인 옷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평상복.
이안이 시우 앞에 앉았다. 시우가 라떼 한 잔을 이안 쪽으로 밀었다.
"...따뜻한 거 시켰어."
"...어."
이안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우유 맛이 11월의 카페와 같았다.
"...학교 입학식 언제."
시우가 물었다.
"...3월 둘째 주."
"...나도 둘째 주."
"...."
"...개강 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자."
"...어, 일주일에 한 번."
두 사람이 잠시 라떼를 마셨다. 카페 창문 너머로 2월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1월보다 한 톤 따뜻한 햇살이었다.
시우가 가방에서 사탕 봉지를 꺼냈다. 한 알을 자기 입에 넣었다, 한 알을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이 받았다, 포장을 뜯었다, 입에 넣었다. 레몬맛, 평범한 단맛.
같은 단맛이었다. 석 달 전 시우가 이안의 필통에 넣어준 사탕, 수능 점심의 사탕, 2월 13일 마지막 야간자습의 사탕, 그리고 오늘 2월 26일 카페의 사탕. 1년 가까이 두 사람의 손을 거친 사탕이 같은 단맛이었다.
다른 자리에 같은 단맛.
"...."
이안이 시우의 얼굴을 봤다. 시우가 같이 봤다.
평생 처음 마주 앉아서 사탕을 일상으로 먹고 있는 자리였다. '필요할 때 먹어'가 무기가 아니었다, 일상이었다. 위협을 견디기 위한 단맛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단맛이었다.
"...학교 시작하면 사탕은 안 챙길 거 같아."
시우가 작게 말했다.
"...어, 카페에서 마시는 거 따로 있으니까."
"...어."
"...."
"...근데 한 봉지는 가지고 다닐 거 같아."
"...어."
이안이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사탕이 더 이상 약속의 형태로 남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와 있었다, 그래도 한 봉지는 가방 안에 있을 거였다. 약속도 아니고 무기도 아닌 한 봉지가 두 사람 사이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라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두 사람이 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 같이 앉아 있었다. 사이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고, 사이의 말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랑 만나기로 한 자리 있어서."
"...어, 가."
이안이 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카페 밖으로 나왔다, 카페 앞 도로에서 잠시 마주봤다.
"...다음 주에 너 학교 한번 가보자."
시우가 말했다.
"...어."
"...개강 전에."
"...어, 일주일 안에."
시우가 끄덕였다. 강남구 쪽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안이 강북구 쪽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같은 카페 앞에서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이안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시우의 검정 코트가 도로 끝에서 작아져 있었다, 시우도 한 번 뒤를 돌아본 자세였다. 두 사람이 같은 도로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본 1초. 그 1초가 청람관 정문 앞에서 1초 마주봤던 11월 13일 수능 직후의 1초와 같은 결의 1초였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빛 아래에 있는 1초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안이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2월 말의 도로가 천천히 지나갔다.
3월 1일 일요일. 청람관 도현 사무실. 도현 시점.
도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새 노트가 한 권 펼쳐져 있었다, 2월 마지막 주 정리 노트.
청람관 잔류 학생이 5명 안쪽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정시 등록 마친 학생들이 청람관을 떠난 자리에 다음 학기 입소를 준비하는 새 학생 명단이 한 줄씩 들어오고 있었다. 3월 셋째 주에 신입생 60명이 입소 예정이었다, 그중 30명이 특실 2인 1실, 30명이 4인실.
도현이 노트 마지막 페이지를 폈다. 한 줄을 적었다.
'2025-2026 사이클 정리 메모.'
밑에 학생별로 정리 메모가 이어졌다. 박준형 - 서울대 자연계열 합격. 김재훈 - 연세대 경영 합격. 그렇게 한 줄씩 적어 내려가다 두 줄에서 멈췄다.
'한시우 - 나군 서울대 경영 등록. 가군 4번 의대 추합 무. 다군 안전 학교 미등록.' '서이안 - 다군 상경계열 등록. 가군 사범대 합격 미등록. 나군 인문대 합격 미등록.'
도현이 한 박자 멈췄다. 그 옆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한시우·서이안 케이스 - 청람관 시스템이 끝까지 분류해내지 못한 관계.'
도현이 펜을 책상에 놓았다. 그 한 줄을 한 번 더 봤다.
청람관의 야간자습 2차 23:00~02:00 신청제는 학원 운영 6년 동안 한 번도 격일제로 운영된 적이 없었다. 신청한 학생은 매일 야간자습에 참여, 신청하지 않은 학생은 매일 빠짐. 두 가지 외에 변형은 없었다.
한시우와 서이안의 케이스는 그 두 가지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생들이 격일제로 야간자습에 참여하는 형식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냈고, 학원 시스템이 그걸 막지도, 알아채지도 못했다. 시스템이 감당하지 못한 부분이 두 사람의 관계였다는 사실이 도현 안쪽에서 천천히 정리됐다.
다음 사이클부터 운영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아직 한 줄로 적혀지지 않았다. 운영 회의에서 다음 주에 한 번 입을 떼볼 자리, 정도가 지금 도현이 결정한 자리였다.
도현이 노트를 덮기 전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한시우 케이스 - 행정 처분 1차 자습실 분리 후 답안지 패턴 변화. 처분 이전 = 의도적 미세 하강, 처분 이후 = 의도적 미세 하강의 표현 형태가 점수 유지에서 점수 정확도로 옮겨감. 처분의 의도 효과와 실제 효과의 차이 분석 필요.'
'서이안 케이스 - 4인실 강제 이동 이후 점수 안정세. 환산점수 437로 학과 라인 다섯 곳 안정. 어머니 학교 1순위에서 본인 정한 학교 1순위로 변경. 청람관 정시 합격률 통계상 학생-학부모 합의 결정이 학부모 단독 결정보다 등록률 12퍼센트 높음. 본 케이스가 그 통계의 한 사례.'
도현이 펜을 책상에 놓았다. 노트를 한 번 더 봤다, 책상 서랍에 넣었다, 다음 사이클 운영 자료들과 함께 보관.
사무실 창문에서 2월 말의 햇살이 들어왔다. 노란빛이 11월의 햇살과 같은 결이었지만 톤이 한 단계 옅었다. 도현이 한 박자 그 햇살을 봤다, 다음 사이클의 첫 운영 회의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3월 5일 목요일 오후 4시. 청람관 정문 인근 카페. 이안과 시우.
두 사람이 카페 창가에 앉았다. 입학식 한 달 전, 두 사람이 만나는 게 일주일에 한 번 패턴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주 시우의 학교 캠퍼스를 두 사람이 한 번 걸었다, 그 다음 주 이안의 학교 캠퍼스를 같이 걸을 예정이었다. 학교 사이의 어딘가 자리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 정하고 있었다, 두 학교 중간 지하철역 카페 한 곳, 두 학교에서 같은 거리인 도서관 한 곳,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청람관 인근 카페.
청람관 인근 카페가 두 사람 사이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학원에서 보낸 5개월의 자리가 학원이 아닌 거리로 옮겨졌다, 같은 자리에 다른 결로 두 사람이 앉는 패턴이 만들어졌다.
"...."
이안이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우가 가방에서 사탕 봉지를 꺼냈다, 한 알씩.
"...너 학교 가기 전에 뭐 하고 싶어."
시우가 물었다.
"...책 좀 읽으려고."
"...어떤 거."
"...학교 도서관 목록 미리 봤어. 경제학 입문 책 두 권, 사회과학 책 한 권. 시작 전에 미리 한 번씩 보려고."
"...어."
"...너는."
"...형이랑 한 번 학교 가보려고. 캠퍼스 한번 둘러보고."
"...."
"...형이 데려가준대."
시우가 작게 웃었다. 형 이야기를 시우가 가벼운 톤으로 한 게 처음이었다, 가을 옥상에서 시우가 형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는 무거운 톤이었다, 11월 면담실에서 한정수와 마주할 때도 무거운 톤이었다. 3월 5일 카페에서 시우가 형 이야기를 꺼내는 톤이 처음으로 가벼웠다.
이안이 끄덕였다. 시우의 가벼움이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이 뭐래."
이안이 물었다.
"...수업 시간표 한 번 같이 짜보자고."
"...."
"...형이 4년 동안 들었던 수업 중에 후배에게 추천하고 싶은 거 다섯 개 있대. 다섯 개 중 두 개는 1학년 때 들어야 하는 거고."
"...어."
"...."
시우가 라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시우의 형 이야기 안에 한정수의 그림자도 같이 들어 있었다, 한정수의 6개월 동안 가군 1번 학교만 가리키던 그림자. 그 그림자가 3월 5일 카페에서 가벼운 톤으로 한 번 더 옮겨와 있었다.
"...이안."
"...어."
"...다음 주에 한 번 너 학교 가보자."
"...어."
"...같이."
"...어."
3월 7일 토요일 새벽 1시. 청람관 지하 1층 자습실.
청람관 신입생 입소가 2주 남은 시점이었다. 잔류 학생 5명 중 마지막 두 명이 어제 짐을 정리했다, 청람관이 거의 비어 있는 새벽이었다.
지하 1층 자습실 12번 자리에 누구도 앉아 있지 않았다, 31번 자리도 비어 있었다. 두 자리가 비어 있는 새벽 1시 12분.
청람관 야간 감독관이 1차 순회 중이었다, 자습실 안에 학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출구 쪽으로 나갔다. 자습실의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두 자리의 빛이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12번 자리 책상 위에 작은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청람관 신입생 입소 전 청소 작업의 한 부분으로 청소 인력이 둔 메모지였다. '신입생 입소 전 정리 점검 - 12번 자리 책상 정리 완료.' 청소 인력의 표시 자국이었다.
31번 자리 책상 위에 같은 형태의 메모지 한 장.
두 메모지가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두 자리의 형광등이 그대로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자판기 옆 30센티 사각이 비어 있었다, 카메라 각도는 도현이 11월에 조정한 그대로였다. 비상계단 4와 5 사이의 녹색 비상등이 작게 깜빡이고 있었다. 옥상 문이 잠겨 있었다, 5층에서 옥상으로 가는 페인트 벗겨진 계단도 빈 채로 있었다.
청람관의 모든 사각이 비어 있는 새벽 1시였다, 5개월 동안 시우와 이안이 매일 새벽 1시 12분에 채워 넣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2주 후 신입생 60명이 입소했다, 그중 한 명이 12번 자리에 배정될 거였다, 다른 한 명이 31번 자리에 배정될 거였다. 청람관의 다음 사이클이 시작될 자리였다.
같은 3월 7일 새벽 1시. 어머니의 집. 이안.
이안이 자기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책상 서랍을 열었다. 시우의 종이 한 장과 자기 답장 종이를 꺼냈다.
두 종이를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수능 끝나면 너랑 같은 자리에 앉을게. 야자가 아닌 자리.' '야자 끝나고 어디서 앉을지 같이 정하자.'
이안이 펜을 들어 새 종이 한 장에 한 줄을 적었다.
'어딘가는 정했어. 다음에 정할 자리도 있어.'
새 종이를 두 종이 옆에 놓았다. 세 종이가 책상 위에 한 줄로 늘어섰다.
이안이 형광등을 껐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가까웠다. 어머니의 집 천장이 청람관 4인실 천장보다 한 톤 더 가까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감았다.
같은 새벽 1시. 시우의 방.
시우가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청람관에서 가져온 가방 안에 있던 메모지 한 다발을 꺼내 보고 있었다. 그 안에 이안이 건넨 답장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야자 끝나고 어디서 앉을지 같이 정하자.'
시우가 종이를 한 번 더 봤다. 책상 서랍에 새로 넣어두었다, 메모지 다발 가장 위에.
다발 안에 청람관 5개월 동안 시우가 받은 메모와 시우가 적은 메모가 같이 있었다. 한정수의 펜 한 자루도 메모 다발 옆에 같이 놓여 있었다. 11월 6일 면담실에 한정수가 두고 간 펜, 시우가 1차 자습실로 가져와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펜. 학원에서 가져올 때 한정수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기 가방에 넣어 왔다.
펜이 한정수의 단어가 더 이상 무기가 아닌 시점부터 시우의 책상 서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시우의 책상 서랍 안에 한정수의 펜 한 자루와 이안의 메모 한 장이 같이 들어 있었다, 두 가지가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자리였다.
형광등을 껐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가까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형이 시우를 데리러 올 거였다, 형과 시우가 같이 학교 캠퍼스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한 날이었다. 형이 4년 동안 다닌 학교에 시우가 이번에 들어간다, 그 사실의 무게가 시우의 안쪽에서 처음으로 가볍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하 1층 자습실의 형광등은 그 새벽 1시에도 켜져 있었고, 2주 후 같은 시각에 누군가 새로 12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